우리 산하와 문화재

청송 (1) 소헌왕후와 청송심씨의 얼이 서린 청송객사와 찬경루, 현비암

모산재 2012. 11. 16. 22:35

 

주왕산 가을 산행을 하자고 청송을 찾은 길.

 

청송군청 주변에서 아침을 맞고 주왕산행 버스를 타러간다. 버스 타는 곳은 터미널이 아니라 청송읍사무소  옆 삼거리 부근 관광안내소 앞이다. 거기로 가다가 뜻밖에 고풍스런 건물과 너른 공간을 만났는데, 그 이름이 '소헌공원'이란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이곳이 세종대왕비 청송심씨 소헌왕후의 친정 고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가에서 소헝왕후의 이름을 딴 소헌공원이 들여다보이는데, 조성된 지 얼마되지 않은 모습이다. 확인해보니 작년(2011년) 4월이다. 

 

 

양쪽에 날개채를 거느린 긴 건물은 한눈에 보아도 객사. 그 옆으로 고을 원님 송덕비들을 수습하여 정렬해 놓았다.

 

 

 

 

 

 

 

 

관광안내소 옆 소헌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청송객사

 

 

 

 

 

 

지붕을 높게 올린 정당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날개채를 둔 전형적인 객사이다. 정당 한가운데는 '운봉관(雲鳳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런데 건물을 살펴보다보니 정당과 서쪽 날개채는 새로 지은 것이고 동쪽 날개채는 기둥과 들보가 옛것임이 목재 색깔로 또렷하게 드러난다.

 

연유를 알아보니, 일제강점기인 1918년 경 중당과 서쪽 날개채가 사라져 버린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객사는 세종 때인 1428년 청송부사 하담이 바로 앞에 있는 찬경루(讚慶樓)와 함께 지었다고 한다. 화재 등으로 소실되는 등 여러 차례 중건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 동쪽 날개채. 기둥과 들보, 포 등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서까래의 대부분은 새 목재로 교체되어 있다.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기둥은 대체로 왼쪽 반은 모기둥을를, 오른쪽 반은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 동쪽 날개채 측면에서 바라본 운봉관, 앞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찬경루

 

 

 

 

 

 

↓ 뒤편에서 바라본 청송객사 운봉관

 

 

 

 

 

 

 

 

운봉관 앞뜰에서 계단을 내려서면 서쪽으로 커다란 비석 하나와 아담한 담장에 둘러싸인 한옥 한 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비석에는 '청송심씨사적비'라 새겨져 있고, 건물 입구 앞에는 '보광제각(普光祭閣)'이라 새긴 빗돌이 서 있다.

 

세종대왕 정비인 소헌왕후를 낳은 청송 심씨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승 13명, 왕비 4명, 부마 4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청송의 역사에 중심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보광제각은 청송심씨의 시조인 심홍부의 묘소가 보광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보광산소'라 불리는 것에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

 

 

 

 

 

 

 

 

강둑으로 올라서서 바라보니 소헌공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송객사가 언덕 위에 동서로 길게 자리잡고 있고, 그 앞마당에 동쪽으로 찬경루, 서쪽으로 보광제각이 자리잡고 있는 짜임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 작은 고을임에도 객사 앞에 이렇게 큰 누각이 세워져 있는 것이 경이롭다. 이름하여 찬경루(讚慶樓)!

 

 

 

 

 

찬경루는 청송읍을 끼고 흐르는 용전천을 바라보는 언덕 자연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이 최초에 지어진 것은 조선 세종 10년(1428). 청송부사 하담이 청송 심씨의 시조 심홍부 선생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세종의 여덟 왕자들이 어머니인 소헌왕후 청송심씨를 위해 각 2칸씩 지었다고도 한다.

 

'찬경루'라는 이름은 건너편 보광산에 있는 청송심씨의 시조묘를 우러러보며 찬미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홍수가 나 용전천을 건널 수 없을 때 시조 묘소로 갈 수 없을 때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누각은 1732년 겨울 청송 고을에 큰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는데, 1792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번 수리한 것이라 한다.

 

2익공 건물로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건물 내부의 중앙열 기둥은 생략하였다. 북쪽 중앙에 2통칸의 온돌방을 설치하고 나머지 14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꾸몄다.

 

 

 

 

 

누각 북쪽 양 옆칸에는 쌍여닫이 판문을 달고 그 앞에 돌계단을 놓아 누상으로 오르게 하였다.

 

 

 

 

 

온돌방 벽 위에는 '송백강릉(松栢岡陵)'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송백'은 소나무와 잣나무, '강릉'은 '묏부리처럼 언덕처럼'을 뜻하는 '여강여릉(如岡如陵)'의 준말이니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늘 푸르고 묏부리와 언덕처럼 영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성어로 보인다.

 

청송심씨에 관한 기록을 살피다 보니, 소헌왕후와 인순왕후(명종비)가 연달아 시조묘인 보광산소에 사자(中使)를 파견하여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이와도 관련이 있는 성어인 것 같기도 하다.

 

 

 

 

원래 찬경루의 이 편액은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이 썼다고 하는데 1732년의 화재로 찬경루가 전소하면서 편액도 불타고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재청 기재문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라고 되어 있다.

 

지금의 편액 글씨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기록이 있어서 혼란을 주고 있다. 소헌공원의 안내판과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정조 때 찬경루를 중수한 청송부사 한광근의 아들 한철유가 쓴 것이라 하고, 청송심씨의 카페 '청송의 뿌리'에서는 한석봉의 글씨로 쓴 현판이라 하고, 청송문화원 홈페이지에서는 '명필가인 한규희가 안평대군의 필체를 모방해 쓴 것'이라 기록해 놓았다.

 

 

 

용전천 강둑에서 바라보면 서쪽에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절벽이 보인다. 

 

 

 

 

 

이 절벽을 현비암(賢妃岩)이라 부른다.

 

보광산에 모셔져 있는 시조묘 보광산소는 가파른 산줄기가 급히 흘러내리다 평지를 이룬 곳에 있어 풍수지리학상으로는 '괘등혈(掛燈穴)'이라고 하는데, 등잔대에 호롱불을 올려놓은 듯한 형세를 일컫는다고 한다.

 

현비암은 이 시조묘의 북쪽에서 서쪽을 향해 큰내가 흘러 내려가면서 살 먹인 활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수구(水口)에 바위절벽이 연꽃이 물위에 솟아 있는 듯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현비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에는 바위가 아주 험악하고 보기 흉했는데 시조인 문림랑공이 별세하시어 장례 모시는 전날 밤에 갑자기 천둥이 일어나고 벼락이 떨어져서 그 암석이 부서지면서 험악했던 형태가 옥순(玉筍)을 깎은듯이 아름다운 형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사로운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과연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소헌왕후가 탄생하였다. 그로부터 어진 왕비가 태어났다고 하여  청송 고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현비암(賢妃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비암은 '용비암'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른 새벽 한 여인이 용전천에 빨래를 하러 나가다가 안개 속에서 승천하는 용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승천하던 용은 여인이 지르는 소리에 그만 그 자리에 떨어져 바위가 되었다. 용은 원통한 눈물을 흘렸고 그것이 용전천이 되었다.

용이 떨어진 뒤 마을에는 흉년이 들었는데, 이에 마을 사람들은 바위 위에 성황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한다. 지금도 바위는 멀리서 보면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용비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위 아래 드넓은 백사장을 끼고 완만히 흐르는 강물은 여름에는 현비암 강수욕장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 외씨버선길 안내판. 이곳 소헌공원에서 출발하여 봉화, 영월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