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지혜의 빛으로 장엄했던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과 삼층석탑

모산재 2012. 11. 4. 13:08

 

시월의 첫날, 조카의 제안으로 영암사지에서 시작하여 모산재를 지나 황매산을 등반하기로 합니다.

 

중학교 시절, 소풍지 1호였던 영암사지... 늘 지나쳐가기만 했던 절터를 오늘은 제대로 한번 살펴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발굴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온 것이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감바우 마을 앞을 지나 구불구불 오솔길로 걸어오르노라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이제 영암사지에 도착했음을 알려 줍니다.

 

600년이라는 수령, 조선 왕조와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아온 느티나무는 학창 시절 보았던 모습과 다름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느티나무 왼쪽으로 서금당터가 오른쪽으로는 금당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람한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모산재는 서쪽으로 감바우(감암) 마을, 동쪽으로 영암사지를 안고 있습니다. 영암사지 건너편 산을 하나 넘으면 바로 내 고향 마을입니다.

 

 

소풍을 왔을 때 선생님이 들려주신 영암사 전설은 아직도 뇌리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신라 말이었는지 고려시대였는지 시기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영암사에 큰 법회가 열려 왕자가 말을 타고 영암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말이 다리를 건너는 순간 우렁찬 범종이 울리고 그 소리에 말이 놀라고 왕자는 그만 계곡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진노한 왕은 영암사를 불태우게 하였으며, 불은 3년간이나 꺼지지 않고 타올라 대가람 영암사는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왕자 대신 왕비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폐허가 된 채로 절터의 대부분이 논으로 바뀌어 있던 영암사터는 이제 발굴 작업이 거의 끝난 모양인지 다시 절터로 복원되어 옛 절의 위용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복원된 석축 앞으로 나서니 영암사 뒤로 아름다운 모산재의 절경이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전각이 가득 들어찬 절의 모습이 가히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처럼 잘 다듬은 석재로 쌓은 석축은 견고한 성을 연상시키는데, 이 땅의 다른 어떤 절에도 보기 힘든 웅장한 모습입니다. 반듯하고 웅장한 석축은 절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모산재의 기암절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석축을 이루는  대부분의 석재들이 오랜 세월에 방치되면서 사라져 버려 새 석재로 대체한 것이 좀 아쉬움을 남깁니다. 아마도 주변 민가에 부뚜막이나 댓돌 등으로 간 것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황매산 줄기가 흘러내린 기운이 아름다운 바위의 절벽을 이루며 멈춰선 곳, 그곳에 영암사는 자리잡고 있습니다. 

 

언제 지어졌고 언제 사라졌는지도 제대로 알려진 바 없지만, 폐허가 된 너른 절터에 쌍사자 석등과 3층석탑, 그리고 두 개의 귀부 등이 남아 있어 절의 규모가 정말 대단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록으로는 서울대 도서관의 <적연국사 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 탁본에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 절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절이 당시까지 존속하고 있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홍각선사비(886년 세움)에 영암사라는 절 이름이 보이는 것 등으로 영암사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축 위 법당 마당으로 들어서니 삼층석탑과 쌍사자석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각각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아직 법당 마당은 땅고르기가 덜 된 모습입니다.

 

신심 깊은 신라와 고려의 스님들과 선남선녀들이 저 탑을 돌고 석등 앞에서 금당의 부처님을 향해 배례하며 나무아미타불을 외고 있는 장면이 절로 떠오릅니다.

 

 

 

 

 

 

보물 제480호 영암사지삼층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방형 삼층석탑입니다. 상륜부가 사라진 탑의 높이는 3.8m.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아래기단은 4개의 석재로 맞추고 위에는 덮개돌(甲石)을 얹었네요. 위의 기단 면석은 4매의 판석을 세우고 위에 2매의 판석을덮개돌로 덮은 모양입니다. 면석에는 목탑의 흔적인 모서리기둥(隅柱)과 받침기둥(撑柱)을 새겼습니다. 탑신은 1층이 높고 2층과 3층은 크게 줄여진 모습인데, 옥개석은 4단의 층급받침개로 지붕이 흘러내리며 네 귀에서 살짝 반전한 모습이 멋스럽습니다.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삼층석탑에서 높다란 금당터를 향해 올려다보면 쌍사자석등이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석등은 성채의 망루처럼 돌출시킨 자리에 세워짐으로써 금당의 위엄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 위엄을 더욱 배가시키는 것은 돌출된 축대 양쪽으로 금당으로 오르는 무지개형 돌계단입니다.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를 연상시키는 돌계단은 원의 일부를 잘라놓은 듯한 아치형 곡선이 독특한 미감을 자아냅니다.

 

 

 

 

 

돌계단 위로는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이 보이는군요.

 

통돌을 아치형으로 깎아 만든 계단은 경사가 급하고 발 뒷꿈치가 닿지 않게 되어 만들었으니 어떤 신분이든 부처님을 만나는 마음과 몸가짐이 몹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려한 곡선의 돌계단과 돌출된 석축 위에 자리잡은 쌍사자 석등, 최고의 예술미에 절로 감탄이 쏟아집니다. 

 

 

 

 

 

어린 시절 이 석등이 원래 국보였는데 법주사가 유명해서 법주사 쌍사자석등에게 국보를 빼앗기고 보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이야기를 듣고 분해하기도 하였지요.(실제로 법주사 쌍사자석등은 선이 뚜렷하긴 해도 미감은 영암사지의 것보다 떨어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그만큼 이 석등은 우리 고장 사람들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도 얽혀 있습니다.

 

지금부터 80여 년 전인 1933년, 이 석등을 탐낸 일본놈들이 밀반출을 시도한 것입니다. 도로도 없던 이 오지에서 석등을 싣고 삼가 방향으로 싣고가던 중 그믐재라는 험한 고개로 넘어갈 때 가회 면민들이 제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회면 사무소에 보관되어 오던 석등은 1959년에 지금의 금당터에 작은 절집을 세우면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여동생 부부와 형님과 누나의 아들과 딸들은 석등을 바라보고 만지며 감탄하고 또 감탄하고 있습니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물 제35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가회면민들이 석등을 원위치시키고 나서도 한참 뒤인 1963년이니, 당시 우리의 문화재 정책이 엉망이었다 할 수 있겠지요. 

 

석등의 높이는 2.31m, 기둥돌(竿石) 역할을 하는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석등의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모습인데, 각 부재는 통일신라의 기본 형식인 8각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대석과 상대석은 연꽃을 새겼고, 상륜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탑과 함께 9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쌍사자의 엉덩이를 볼까요. 우량아의 엉덩이처럼 통통한 게 그 귀여운 모습에 절로 어루만져 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왜 석등을 사자가 받치고 있는 걸까요.

 

불교에서 사자는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 부처님의 깨달은 정신을 사자로 표현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사자후(獅子吼)라 하고 부처님의 말씀대로 용맹정진하는 의미를 사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실천을 상징하는 동물인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과 대비되는 것이지요. 지혜를 상징하는 사자 두 마리가 진리의 빛인 부처님의 등불을 받치고 있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자 두 마리. 이를 지혜의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우스개로 입을 벌린 사자는 암사자를 나타낸다고 하더군요. 힘들어 입을 벌린 것이니 약한 암사자라고...

 

 

석등의 화사석을 살펴보니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지혜의 등불을 신장이 수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천 년이 넘는 세월 비바람에 마모되어 안타깝게도 신장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지 않습니다.

 

 

 

 

 

화사석 화창(火窓) 주변에는 10여 개의 작은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무엇을 위한 흔적일까요.

 

 

쌍사자 다리 사이로 내려다본 삼층석탑의 모습입니다.

 

 

 

 

 

쌍사자 석탑을 구경하였으니 이제 금당터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일단 전체 모습을 조망하기 위해 금당터 뒤의 언덕 위로 올라봅니다.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로 금당터 ·서금당터 ·중문터 ·회랑터 등의 건물터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로 그 중심에 금당이 자리잡고 있고 금당 터 한가운 석조불상을 모신 것으로 짐작이 되는 대좌 자리가 보입니다.

 

금당은 3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1984년 발굴조사 때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각종 기와조각과 토기조각, 금동여래 입상 등이 발견되었는데, 높이 11㎝의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이 절의 창건 연대를 보다 당길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금당의 기단석에는 이렇게 안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금당 건물터를 따라 놓여진 주춧돌 등의 부재도 아주 잘 다듬어진 모습입니다.

 

 

 

 

금당 계단을 오르는 소맷돌은 극락정토에 산다는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를 새긴 것이라는데, 윗부분이 파손되어 나가 그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금당의 기단 면석에는 뒤쪽을 뺀 3면에 각각 두 마리씩의 사자를 새겨 놓은 것이 눈에 뜨입니다.

 

 

 

 

 

선입견을 떠나서 보면 사자라기보다는 삽살개 등 개에 더 가까운 모습입니다. 포효하는 맹수라기보다는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반기는 다정다감한 개의 모습과 표정으로 새긴 사자상은 절로 미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모두 다른 모습으로 새겨져 있는 다양한 사자상을 살펴보는 일은 이 절에서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그러고보면 영암사지는 지혜를 상징하는 사자가 지키는 사찰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금당을 밝히는 석등도 쌍사자 석등이요, 금당의 기단을 장식하는 동물도 사자상이니 영암사는 가히 부처님의 말씀, 지혜의 빛을 밝히던 사자사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금당 자리의 사자는 물론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외호신장의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불국사 다보탑이나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의 사자상도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려는 뜻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넓의 절터의 동쪽에는 물을 담았던 커다란 석조가 발굴되어 놓여 있고,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돌기둥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어 폐사지의 쓸쓸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 동쪽 마당에는 새로 지은 웅장한 절집이 자리하고 있지만, 발길을 서금당터로 옮깁니다. 소풍을 왔을 때면 두 개의 귀부가 있는 넓은 잔디밭 금당터에서 전교생이 모여 장끼자랑을 하곤 했던 추억의 장소로 말입니다.

 

 

※ 영암사 서금당지와 귀부 => http://blog.daum.net/kheenn/15855959

※ 황금들녁과 기암절벽이 어울린 환상의 모산재 => http://blog.daum.net/kheenn/15855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