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괴산의 절경 화양구곡, 제1곡 경천벽에서 제9곡 파천까지

모산재 2012. 10. 28. 17:16

 

괴산에는 유난히 '구곡(九曲)'이란 이름이 붙은 비경이 많다. 쌍계구곡, 연하구곡, 갈은구곡, 선유구곡, 화양구곡이 그것으로 속리산이 거느린 산줄기에서 발원한 남한강 상류들이 한결같이 기암절벽의 계곡을 이루며 이 땅 최고의 산수 문화를 낳았다.

 

이 많은 구곡 중에서 화양계곡(華陽九曲)은 바로 상류에 있는 선유구곡과 더불어 구곡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선유계곡이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면 화양계곡은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평가된다.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는 이 계곡에 조선 후기를 지배했던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흔적이 배어 있는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기도 하다. 시류가 듯과 같지 않던 시절, 이 골짜기에 물러나 머물던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흠모하여 화양구곡이라 이름 짓고 주자가 그렸던 이상향에 도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9월 하순, 화양계곡 들어서는 길에는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다.

 

 

 

 

 

 

화양구곡의 이름은 차례대로 제1곡 경천벽, 제2곡 운영담, 제3곡 읍궁암, 제4곡 금사담, 제5곡 첨성대, 제6곡 능운대, 제7곡 와룡암, 제8곡 학소대, 제9곡 파천(파곶)이다.

 

이들 이름은 송시열 사후 제자인 민진원이 바위에 명칭을 새기면서 최종 완성됐다고 한다.

 

 

 

 

 

 

 

● 제1곡 경천벽(擎天壁)

 

화양동 입구 화양1교 다리 위에서 옆 모습이 보인다. 물가로 가파르게 솟아 있는 층암절벽의 모습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 '경천벽'이라 한다.

 

 

 

 

 

경천벽 왼쪽 바위 벽면에는 화양동 입구임을 알리는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우암 송시열 글씨로 전해져 온다.

 

아래쪽으로 소나무 숲에 가려져 바위의 절경이 잘 보이지 않는 점이 아쉽다.

 

 

 

 

 

● 제2곡 운영담(雲影潭)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운영담은 화양2교 다리에서 바라보면 댐으로 담겨 있는 물이다. 

 

 

 

 

 

계곡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못을 이루고 있는 곳이 제2곡인 운영담이다.

 

댐 안 물속에는 금모래가 잔잔하게 깔려있는데 건너편으로 수심이 깊어지는 곳에 기암이 솟아 있어 가히 절경을 이룬다.

 

 

 

 

 

물이 너무 맑아 기암절벽의 소나무와 하늘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 그리고 하늘의 구름 그림자가 계곡 물속에 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이라 불린다.

 

 

운영담 암벽 밑에 ‘雲影潭’이란 예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상류에서 바라본 운영담 방향 풍경

 

 

 

 

 

● 화양서원과 만동묘(萬東廟)

 

운영담을 지나면 금방 송시열 유적지가 나타난다. 이른바 화양서원과 만동묘, 그리고 읍궁대와 암서재가 그것이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으로 그의 제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 화양서원 : 송시열을 배향한 서원

 

 

 

만동묘(萬東廟)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의종과 신종을 제사지내기 위해 송시열의 유지로 1703년에 역시 제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어떤 사당에서도 볼 수 없는 거대한 높이의 돌계단은 노론들의 모화사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웅변하는 듯하다.

 

 

만동묘 : 임란을 도운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였다.

 

 

화양동은 우암 송시열이 북벌정책을 펼치던 효종 임금을 잃고 은거하며 세월을 보낸 곳이다. 그의 사후 이곳은 노론의 학문적 정치적 기반이 되었고 그를 따르던 유학자들의 결집 장소가 되었다. 자주 외교 노선을 지키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 조선 후기 시대착오적인 소중화주의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은 노론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송시열을 따라 패망한 명나라 황제를 모시며 주자학 근본주의를 추구하던 화양동서원은 악명을 떨친다. 숙종 영조 정조 3대에 걸쳐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권력을 남용, 민폐를 끼치는 온상이 되어갔다. 남발한 '화양묵패(華陽墨牌)'는 수령의 봉납을 강제하고 응하지 않으면 사형을 가하고 협박장이 되었고, 양민들을 착취하고 토색질하는 등 서원의 폐단이 극심하여 결국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원인이 되었다.

 

 

 

 

● 제3곡 읍궁암(泣弓岩)

 

서원 앞 개울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송시열은 효종의 승하를 슬퍼하며 새벽마다 통곡하였다고 한다.

 

 

 

 

 

청나라에 당한 국치를 설욕하기 위해 북벌을 꿈꾸었던 효종대왕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자 송시열은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 새벽 읍궁암 위에 엎드려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읍궁(泣弓)'이란 이름은 중국의 순 임금이 죽은 뒤 신하가 활(弓)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궁벽한 골짜기, 시대착오적인 소중화주의에 갇혀 허황한 북벌을 꿈꾼 노론 영수가 슬퍼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빼어난 풍광도 아닌데... 송시열에 얽힌 스토리가 구곡의 하나로 만든 모양이다.

 

 

 

 

 

● 제4곡 금사담(金沙潭)

 

읍궁암 앞에서 상류로 이어지는 곳. 맑고 깨끗한 물결 아래로 금싸라기 같은 모래가 흘러 금사담이라 한다.

 

 

 

 

 

화양구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처럼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물속에 깔려있는 곳으로, 주변에 너럭 바위가 많아서 훌륭한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금사담 절벽 위에는 암서재(巖棲齋)라는 정자가 있다.

 

 

 

 

 

1666년(현종 7)에 화양동으로 들어와 '화양계당'이라는 초가집을 짓고 살던 송시열이 건너편 큰 바위 위에 주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본따 3칸짜리 집을 지었는데, 그의 사후 방치되어 있던 것을 그의 제자에 의해 중건되고 여러 차례 중수되면서 전해진 것이다.

 

 

 

 

 

화양3교에서 내려다본 금사담, 암서재 방향 계곡의 풍경

 

 

 

 

 

 

 

● 제5곡 첨성대(瞻星臺)

 

화양 제3교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 산 언덕 위에 층층으로 쌓은 듯 우뚝한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 위에서 별을 관측하였다 하여 '첨성대'라 한다. (하지만  천문관측소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곳에는 선조 어필인 '萬折必東(만절필동)', 숙종 어필인 '華陽書院(화양서원)'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첨성대 아래에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이 쓴 '非禮不動(비례부동)'과 우암이 쓴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 능운대(凌雲臺)

 

능운대는 화양 제3교 다리를 건너 채운사 이정표 뒤 나무 숯에 가려져 있는 큰 바위이다.

 

 

 

 

 

능운대는 우뚝 솟은 바위의 위엄이 구름을 찌를 듯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무들에 가려 있는 바위에서 그 위엄을 느끼기 힘들다. 예전 계곡 가까이 보다 낮은 위치로 나 있던 길에서 바라본다면 그런 위엄이 느껴졌을까...?

 

채운사로 오르는 길이 능운대 뒤쪽으로 이어지는데, 거기서 보면 정상은 수십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 형태로 되어 있다. 정상에는 ‘능운대(凌雲臺)라는 큼직한 글씨가 예서체로 새겨져 있다.

 

 

 

능운대를 지나 내려다본 계곡 풍경. 왼쪽으로 첨성대 바위가 살짝 보인다.

 

 

 

 

● 제7곡 와룡암(臥龍岩)

 

열길이나 된다는 긴 바위가 꿈틀거리는 용을 닮았다는 와룡암은 길에서 계곡으로 길게 누워 있다.

 

 

 

 

 

와룡암의 한쪽 끝부분이 길 아래로 들어가 버린 탓에 웅장함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계곡 물줄기가 바뀌고 큰 길이 지나고 있어 옛 분위기를 느낄 수 없지만, 예전에는 와룡암 주변으로 물이 흘러 신비로운 형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와룡암 위쪽으로 보이는 계류 풍경

 

 

 

 

 

● 제8곡 학소대(鶴巢臺)

 

와룡암을 조금 지나면, 화양천을 건너는 다리가 나타나는데, 이 다리 위에 서면 화양천 오른족에 우뚝 솟은 층암절벽 학소대가 바라보인다. 

 

 

 

 

 

옥빛 물에 발을 담그고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붉은 바위 벼랑에는 낙락장송이 드리우고 있어 절경을 이룬다. 백학과 청학이 이곳에서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를 치고 살았다 하여 '학소대'라 한다.

 

다리를 건너 도명산을 오르면 마애삼존불이 있다.

 

 

 

 

● 제9곡 파천, 또는 파곶(巴串)

 

화양구곡의 맨 끝을 장식하는 파천은 학소대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상류에 있다.

 

 

 

 

오른쪽 커다란 바위에 '파천(巴串)'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파천은 계곡 전체에 희고 넓은 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위로 흐르는 물결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처럼 보여 '파천'이라 부른다. 커다란 바위에 '巴串'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파천'으로도 '파곶'으로도 읽힌다. '파(巴)'자는 '화(華)'자와 통하는 말로, 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다.

 

200평쯤 되는 드넓은 너럭바위에는 신선들이 술잔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아름다운 절경을 찍기 위해 사진 매니아들이 많이 찾는다.

 

 

 

 

 

파천은 파곶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어 파곶산이라 불리던 낙영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을 뜻하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계곡 곳곳 바위에는 시인묵객과 벼슬아치들이 거쳐간 흔적들이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구곡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각하며 호젓한 계곡 산책길을 걷는 즐거움이 화양구곡만한 곳도 드물지 싶다. 내친 김에 상류에 있는 선유구곡까지 걷는다면 요즘 유행하는 어떤 걷기길보다 훨씬 뿌듯한 보람이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