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천연기념물 비자나무 숲에 안긴 고흥 천등산 금탑사

모산재 2012. 9. 2. 20:30

 

거금도를 벗어나 다시 고흥반도로 들어서며 한 곳만 더 들르자고 하여 천등산 비자나무숲으로 가자고 하는 것을 비자나무숲이 볼 게 뭐 있나 싶어 관광지도에 고흥10경으로 표시되어 있는 마복산 기암괴석으로 가자고 하여 '내비'를 찍는다. 

 


그런데 마을에서 아스팔트 길은 끝나고 임도로 이어지는 곳에서 내비의 길 안내는 멈춘다. 기암괴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두리번거리다 결국 돌아서서 천등산 금탑사로 향한다.

 


나중에 마복산 기암괴석이 궁금하여 고흥군청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바로 마복산 봉우리 자체를 일컫는 이름이다. 물개바위, 거북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은 산세로 소개골산(小皆骨山)이라 불리는 마복산, 정상에 서면 고흥의 넓은 벌판과 다도해의 절경이 한눈에 펼쳐지고 패러글라이딩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한다. 

 


마복산 기암괴석(출처 : 고흥군청 홈페이지)

 

 


'하늘로 오른다'는 이름의 천등산(天登山), 처음으로 오르는 산은 높이 550m의 작은 산이지만 금탑사로 오르는 길은 밀림이라 해도 좋을 깊은 숲이다. 옛날 금탑사 승려들이 정상에 올라 천 개의 등불을 바쳤다기도 하고 도를 닦으려고 수많은 등불을 밝혔다기도 하는 산이다.

 


천등산 서남쪽 바위능선에서 거금도를 바라보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는데, 우리가 오르고 있는 길은 그 반대편에 있는 금탑사 쪽이다.

 


비자나무 숲을 통과해온 사실조차도 모르고 금탑사에 도착한다.

 

 


특이하게도 절의 가장 아래쪽에 단청도 하지 않은 독특한 양식의 범종각만난다.

 

범종각

 


금탑사는 송광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 금탑(金塔)이 있어 금탑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등산을 '千燈山'이라 쓰기도 하는데, 옛날 인도의 가섭존자가 어머니를 위해 천등 불사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며, 금탑사라는 이름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阿育王)의 금탑 건립 고사를 기리기 위해 따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극락전 마당으로 올라서자, 창건 당시에 있었다는 금탑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조성된 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산뜻한 5층석탑이 눈에 띈다.

 

극락전과 5층석탑



1982년 중창 불사 중 진신사리 2과가 발견되었는데, 아소카왕이 보낸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탑이 있었다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극락전 뒤편으로 숲을 이룬 짙은 나무들이 비자나무라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239호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은 절의 앞에도 울창하게 들어서 있어 금탑사는 비자나무 숲에 안겨 있는 형국이다.

 

약 3만 평의 비자나무숲은 절 주변에 조성되었고 나무의 높이가 10m 정도인 것으로 보아 금탑사 창건 이후 모두 같은 시기에 심어진 인공림으로 추정된다.



법당은 극락전(極樂殿)으로 서방정토를 지키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탑사는 정유재란 때 불타고 1604년 다시 지었지만 100년 뒤 숙종 때 또 화재를 만나 건물들이 다 타버렸다고 한다. 다만 이 극락전만이 남았다고 한다.

 

극락전은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았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은 지붕이 많이 무거워 보인다. 정면의 넓은 어칸에는 공간포 둘을, 양쪽 협칸은 공간포 하나를 배치하였는데, 어칸의 양쪽 기둥머리에는 용머리(龍頭)가 달려 있다.


 



예전에는 극락전 앞마당에 마당이 아닌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물을 잃은 두 마리의 용이 안쓰럽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삼존불은 목조불을 개금한 것이라 한다. 오른쪽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보병(寶甁)을 든 관세음보살, 제작 기법이 유사한 왼쪽은 대세지보살로 보인다.

 


천장은 우물천장. 어칸 밖으로 내민 용머리는 극락전 안에서 몸통으로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극락전 우물천장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괘불탱

 

 

 


금탑사에 전해지는 유일한 보물, 금탑사괘불탱(보물 제1344호)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506cm×648cm 크기의 괘불탱은 사천왕 등의 권속을 배제하고 삼세불과 주요 협시보살만으로 구성된 간략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삼세불은 화폭을 3등분하여 큼직하게 그려져 있고, 상단과 하단으로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정조 2년(1778년)에 비현과 쾌윤이 그렸다고 하는 이 그림은 작은 이목구비의 표현, 옆으로 퍼진 육계에 큼직한 정상계주, 각이 진 어깨, 발목의 치견장식 등에서 18세기 후반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괘불탱은 1697년에 제작된 괘불궤 속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극락전 서쪽, 명부전으로 가는 길에는 운치 있는 음수대, 독특한 돌수각이 조성되어 있다.


 

 

 

 

명부전 처마 밑에서 바라본 극락전 옆 모습. 그리고 독특한 미감을 주는 금탑사 굴뚝

 

 

 

명부전 처마 밑에서 바라본 법당 마당

 

 

 

서쪽에 자리잡은 요사채. 전각의 지붕선과, 장독대와 담장 풍경이 아름답다.

 

 


절 곳곳에서 여성적인 선과 정갈함이 느껴지는데, 이곳이 비구니 사찰이라는 걸 알고 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 년 고찰이지만 퇴락을 거듭해오던 금탑사는 1992년부터 서림 스님이 머물면서 불사를 펴고 주민들이 힘을 보태면서 절의 모습이 일신되어가고 있고, 호남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 명성을 얻고 있다. (참고 : http://cafe.daum.net/goldtower-temple/DjTI/1)

 

 


극락전 동쪽, 나한전과 삼성각이 자리잡은 언덕 풍경

 

 

 

법당 마당의 동쪽 입구에서 바라본 금탑사 전경

 

 

 


일주문에 이 고장 도덕면 출생인 신동 손문경이 13세 때 썼다는 '금탑사' 현판이 있다고 하는데, 일주문이 있는지도 모르고 내려왔으니 예정에도 없던 탐방이긴 했지만 많이 허술하였다. 천여 년 전에 그렸다는 원효와 의상대사의 영정도 있다는데...

 

 



 

● 금탑사 가람배치도


 

 


※ 아소카왕

 

형제들을 죽이고 정복왕이 된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소카왕(기원전 273~232년)은 인도 남동부의 칼링가 지역을 치열한 전쟁 끝에 정복했다. 칼링가 측 10만 명, 아소카왕의 부하 1만 명이 희생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상은 그를 번민하게 만들었다. 정복지를 돌아보며 그는 말했다.

 

이런 것이 승리인가? 이것은 정의(正義)인가 불의인가? 이것이 용기라면 무고한 아이와 아녀자들을 죽이는 용기가 아닌가? 내가 한 일은 제국을 넓히고 번성시키기 위한 것인가? 다른 왕국을 파괴하기 위한 것인가? 남편 잃은 여인, 아버지를 잃은 사람, 아이 잃은 부모. 이것은 승리의 징표인가 패배의 징표인가? 시체에 몰려드는 독수리와 까마귀들은 죽음과 악(惡)의 사자들이 아닌가?

 

아소카왕은 불교를 깊이 받아들이고 기원전 260년경부터 불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다르마(Dharma)에 바탕을 둔 정치였다. 다르마에는 다양한 뜻이 있지만, 아소카왕에게 그것은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윤리이자 석가모니의 가르침’이었다. 아소카왕이 인도 각지에 세운 비석과 돌기둥에는 다르마의 의미와 법칙(法勅)이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육식을 버리고 살생을 삼가며 흰개미에서 앵무새까지, 돌고래에서 하마까지 모든 생명을 보전하라.


종교들 사이의 소통은 선한 것이다. 다른 이들이 따르는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그것을 존중하라. 대왕께서는 모든 이가 다른 종교들의 선한 가르침을 잘 익히기를 바라신다.

 

다양한 인종, 종족, 문화, 종교 등을 포괄하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자면, 갈등을 지양하고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아소카왕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요컨대 아소카왕에게 불교는 제국의 통합과 통치를 위한 이념이기도 했다.

 

아소카왕의 중요한 업적으로 일컬어지곤 하는 것이 바로 재판의 공정성과 함께 보편적 법치를 시행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법률은 한결같아야 하고 판결은 일관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사형 선고는 즉시 집행되어서는 안 되며 사형수는 감옥에서 적어도 사흘 이상 머물러야 한다. 이 기간 사형수의 친지들은 감형의 자비를 호소할 수 있고, 그렇게 호소하는 이가 없다면 사형수는 내세에서의 복락을 위해 금식을 포함한 (종교적) 의무를 지킬 수 있다.

 

나는 길을 따라 반얀나무를 심어 모든 짐승과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물을 파고 쉼터를 짓고 물이 흐르는 곳을 만들어, 모든 짐승과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단치 않은 업적이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미 예전의 왕들이 행했던 것들이다. 내가 그러한 일들을 시행한 것은, 사람들이 다르마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소카왕은 아육왕(阿育王) 또는 아수가(阿輸迦)로 기록되어 있다. 아소카왕은 불사리를 8만 4천 개로 나누어 제국 각지에 탑파를 세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8만 4천 개라는 숫자에는 과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를 통해 아소카왕은 제국과 주변 지역으로까지 불교를 보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소카왕은 고대 인도 종교와 신화에서 세계를 통일, 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상을 충족시킨 인물, 즉 세속의 전륜성왕으로도 일컬어졌다. 전륜성왕은 무력이 아닌 정의와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이기도 하다. <네이버캐스트, '아소카왕'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