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흥 소록도, 한센병 환우의 통한이 서린 아기사슴섬

모산재 2012. 9. 1. 13:44

 

거금도에서 돌아오는 길, 소록도를 방문하였다.

 

 

아기 사슴을 닮은 작은 섬, 그래서 소록도(小鹿島)라 부른다고 한다. 일제시대부터 '천형'이라고 했던 '문둥병', 나환자라고도 했고 지금은 한센병 환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수용되어 살아왔던 작은 섬이다.

 

 

고흥 녹동항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에 자리잡은 듯 가까운 섬이다. 그러고보니 녹동(鹿洞)이란 이름도 '사슴동네'라는 뜻 아닌가. 물 건너 아기사슴을 바라보고 있는 어미사슴 동네가 바로 녹동이다. 소록도는 녹동항 서쪽에서 소록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 녹동항 풍경. 멀리 소록대교가 보인다.

 

 

 

 

 

 

 

소록대교는 2001년 착공하여 2008년 완공한 뒤 2009년부터 완전 개통한 길이 1,160m의 현수교이다. 12개의 교각에 가운데 교량 상판을 매단 케이블은 높이 87.5m의 주탑 2개가 지탱하고 있다.

 

 

소록대교가 완공되기 전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록도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섬의 동편으로 예전 소록도 선착장이 건너다보인다.>

 

 

 

 

 

 

거금대교를 건너 소록도로 들어서자마자 차는 대형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700여 명이나 되는 한센병 환자와 의료인들이 생활하는 작은 섬이지만 여느 관광지보다도 더 많은 관광버스들이 가득 들어선 모습이 너무 뜻밖이다.

 

섬 경치가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는 데다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섬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끈 모양이다. 섬 일부만 개방되어 한센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들어갈 수 없고, 해 진 뒤에는 출입이  통제된다고 한다.

 

 

 

소록도해변 휴게소 앞 제2안내소에 이르자 '수탄장(愁嘆場)'이란 이름의 안내판이 나타난다. 

 

 

 

 

 

 

수탄장... '수심에 차서 탄식하는 마당'이라니...

 

 

소록도의 직원들이 사는 동쪽 공간과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서쪽 공간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철조망이 쳐져 있었던 모양이다. 1970년까지는...

 

한센병 환자와 따로 수용된 자녀들이 한 달에 한 번 만날 수 있게 했는데, 전염을 우려해 이 도로에 마주 서서 멀리 눈으로만 마주쳐야만 했으니 서로 얼싸안고 혈육의 정을 나눌 수 없었던 이들의 탄식이 어떠했을까...

 

 

 

이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채, 수탄장을 지나면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해변길이 이어진다.

 

 

 

 

 

 

주요 시설들은 서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해송이 늘어선 산책길은 해안을 따라 국립소록도병원과 중앙공원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해안 산책길을 따라 가면 중앙공원, 국립소록도병원에 이르게 된다.

 

 

 

 

 

돌아보니 멀리 소록대교가 보인다.

 

 

 

 

 

 

해안 및 소록대교 풍경

 

 

 

 

 

 

 

 

시설지구에 들어서자마자 바닷가 언덕에 서 있는 추모비 하나.

 

커다란 자연석을 올려 '애한의 추모비'라 새겨 놓았는데, 안내판에 적힌 사연을 읽고나니 참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인간 백정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이곳 소록도 원생들이 자치권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8월 22일, 이들의 당연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협상 대표와 84명이 처참하게 학살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2001년 12월 화장 매몰된 이들의 유골을 발굴하고 2002년 8월 그 자리에 추모비를 세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찾아본 내용은 참으로 처절하다.

 

 

소록도에서 해방 소식을 안 것은 1945년 8월 17일이라고 한다. 원생들은 자연스럽게 해방이 되었으니 자치권을 찾자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병원 당국자들은 다음날로 협상을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1945년 8월 22일, 이들은 치안유지대라는 사람들을 불러 원생들을 대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학살하는 처참한 살육을 감행했다. 그리고 구덩이를 파서 넣고 원생들을 동원해 전쟁용으로 채취한 송탄유를 쏟아부어 생화장을 하였다. 살육에서 살아남은 자들도 함께 화형을 당했다. 모두 84명. 살육 당한 사람은 원생 외에도 교회 전도원 3명과 집사 9명 등도 포함되었다.

2001년12월8일 오후 1시, 학살 소각 현장에서는 송진 덩어리와 유골들이 엉켜있는 처참한 모습으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추모비만 세워 놓으면 그만일까. 그날 학살자들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어떤 책임도 묻지 않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대한민국은 여전히 부끄러운 나라다.

 

 

 

추모비 맞은편에는 그날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국립소록도병원이 세련된 외양을 자랑하며 서 있다.

 

 

 

 

 

1916년 일인이 설립한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시작한 병원은 여러 이름으로 바뀌어 부르다가 1982년 12월 31일 이래 국립소록도병원이란 이름으로 불려오고 있다.

 

 

 

 

병원을 지나 중앙공원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입구에는 중앙공원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고  위쪽으로는 생활자료관 건물이 보인다.

 

 

 

 

소록도 중앙공원은 1936년 12월에 착공하여, 1940년 4월에 완공된 약 6천여 평의 공원이다. 일제말기 10년 동안 재임했던 악명 높은 제4대 수호원장 때, 한센병 환자 연인원 6만여 명을 강제 동원하여 산을 깎아 조성한 것이다. 공원 조성을 위해 득량만과 완도 및 소록도 주변 섬에서 암석을 채석하여 옮겨오고,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관상수를 반입하여 심고 섬 일주도로까지 닦았다.

 

 

초등학교 소풍 때 처음 소록도에 와 보았다고 하는 장흥 출신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섬 안에 시설이 한 가지씩 늘어갈 때마다 그만큼 섬 전체가 천국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지옥으로만 변해가고 있었듯이, 이번에도 이 섬은 공원이 하나 더 늘고 그곳에 바쳐진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노력이나 희생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1972년에 확장된 공원에는 솔송과 황금편백, 후박나무, 삼나무, 히말라야시다, 종려, 치자, 팔손이나무 등 관상수 100여 종이 심어져 작은 수목원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공원으로 오르는 길, 아래 쪽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은 이름도 섬찟한검시실.

 

 

↑ 검시실(사진 출처 : 문화재청 자료)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정관 수술과 시체 해부를 했다고 한다. 한센병 환자의 근절의 위해 1927년 일본생리학회에서 제기되고 남녀 환자 별거제를 실시하였는데, 1936년부터 정관수술을 조건으로 부부 동거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감금실에 수감된 환자들에 대한 벌칙으로 정관수술이 행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망자는 검시 절차를 마친 뒤 구북리 뒤편 바닷가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록도 사람들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전해진다. "한센병으로 죽고, 시체 해부로 죽고, 화장되어 죽는다."

 

 

 

검시실을 지나니 감금실이란 안내판이 선 건물이 나타난다.

 

 

 

 

 

한센병 환자를 불법적으로 감금했던 곳이다. 두 개의 건물을 회랑으로 연결하여 H자형을 이룬 감금실은 붉은 벽돌로 높은 담을 둘러 놓았다.

 

 

 

 

 

 

들어가서 내부를 살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끔찍하기도 하고 더 우울한 기분에 갇히기 싫어 그냥 중앙공원 쪽으로만 걸음을 옮기고 만다. 

 

 

 

 

 

 

공원의 중심에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구절을 사방에 새긴 구라탑(求癩塔)이 서 있다.

 

 

 

 

 

탑 위에는 '천상 군대의 지휘관'이라고 하는 미카엘 대천사 상을 올려 놓았다. 라파엘이 그린 <성 미카엘>이란 그림 속에서 미카엘은 창을 들고 사탄을 무찌르는데, 구라탑에서는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으로 형상화해 놓았다. 1963년에 세운 것이라 한다.

 

 

구라탑 위쪽에는 벨기에 다미엔재단 공적비를 세원 놓았는데, 두 명의 의사와 두 명의 간호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문둥이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새겨진 너럭바위 시비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고 있다.

 

 

 

 

이 비는 1972년 5월 17일 개원 56주년 기념식을 기념하여 한하운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피―ㄹ 닐니리.

 

* 인환(人寰) :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

 

 

 

뭉툭한 사각 기둥으로 세워진 개원 40주년 기념비 앞에는 '수호(周防正秀) 원장 동상' 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 속에는 스탈린 동상을 연상시키는 스오 마사히데(周防正秀) 동상과 그 앞에 경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는데, 정작 동상은 보이지 않는다.

 

한센병 환자를 짐승처럼 부리며 군림했던 한 시대의 괴물 이야기를 검색하여 읽으면서 소록도의 역사에 대해 너무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스오 마사히데는 일제 말기인 1933년 9월 1일부터 1942년 6월20일까지 8년 9개월 동안 제 4대 원장으로 자신의 심복인 사토(佐藤三代治)라는 간호주임을 이용하여 온갖 강압적 수단으로 성치 않은 나환자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여 각종 공사를 추진하였다. 벽돌공장을 세워 벽돌을 찍고 골재 운반 등을 하게 해 직원관사 42동과, 물품 창고 2동, 소록도 일주 도로 등을 완성시켰다. 연간 6천 킬로의 송진 채취, 30만 장의 가마니 짜기, 1천 5백 장의 토끼 가죽과 3만 포대의 숯 제조 등 전쟁 군수 물자 조달에 환자들을 동원했다.

죽음보다 더한 강제 노역과 매질과 고문을 견디다 못한 많은 나환자들이 자살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하다 익사했다.

수호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환자들은 자진 헌납의 명목으로 각 사람이 3개월 분의 임금을 바쳐야 했으며 노동을 하지 못하는 중증 환자들은 배급 식량과 의복을 팔아서 납부해야 했다. 1940년 8월 20일 높이 3.3m로 단을 포함한 전체 높이 9.6m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 날을 기념하여 매월 20일을 '보은감사일'로 지정하고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하였다.

1942년 6월 20일, 수호 원장의 동상을 참배하는 정례 보은 감사일 행사장에서 이춘상이라는 청년이 수호 원장을 가로막고 "너는 환자에 대하여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라고 외치며 앞가슴을 찔렀다. 원장은 죽었고, 나중 원장의 동상은 전쟁 물자로 징발 철거되었다.

이춘상은사건 후 9개월 만에 대구 형무소에서 사형에 처해졌으며, 그때의 나이가 27세였다고 한다. 경북 성주군 대가면 용흥리의 한 빈농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호 원장의 동상이 서 있던 자리에 개원 40주념 기념비가 서게 된 것이다.

 

 

 

 

 

 

수호 원장과는 완전히 딴판인 인물,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일컬어지는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하나이는 초대 원장 아리카와 도루(蟻川 亨: 1916~1921)에 이어 부임한 제2대 원장으로 원생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환자들을 노예나 짐승처럼 다루며 의식주 모든 생활을 일본식으로 강요했던 아리카와와는 달리 하나이는 군의관 출신이었지만 군인답지 않게 자상하고 한국식 생활 풍습과 전통을 존중해 줬으며, 자유 취사를 허용하고 의식주에 불편이 없도록 했고 신앙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신사 참배의 의무를 폐지하고 천조대신을 모시던 사당을 철거하였으며 기독교 예배 전용으로 하는 등 그는 실로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 하나이 원장 창덕비(출처 : http://blog.daum.net/mohwpr/12878377)

 

 

뿐만 아니라 보통학교를 세워 환자들의 교육에도 힘쓰고 오락시설을 확장하고 환자위안회를 조직하여 고향을 등진 환자들의 외로움과 아픔을 달래 주려고 애썼다고 한다. 일본 사람이면서도 환자들을 친가족처럼 돌보았다. 민족을 초월한  헌신적인 사랑에 환우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창덕비(彰德碑)를 세우고자 했지만 하나이 원장의 강력한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원장이 과로로 순직을 한 이듬해에야 자혜병원 본관 옆에 세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으로 폐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환자들이 몰래 땅에 묻었던 것을 60년대 대일 감정이 완화된 시기에  발굴하여 본래의 자리인 구 자혜의원 옆에  다시 세우게 된 것이라 한다.

 

 

 

 

공원 주변에 몇 그루 서 있는태산목에 꽃이 피었다.&

 

 

 

 

 

사람들을 몰고다니는 어느 가이드는 '후박나무'라고 알려 주고 있다. 일본인들이 '후박'이라고 부르는 일본목련으로 잘못 알고 말하는 듯... 우리에겐 목련과가 아닌 녹나무과의 후박나무가 따로 있다.

 

 

 

공원의 아래쪽 작은 연못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서 있다.

 

산상수훈 후 찾아온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었던 예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천형을 짊어진 소록도의 환우들이 고통 받는 예수상을 보며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 수 있었을까...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이 소록도에도 무겁게 침전되어 있다. 돌아서 나오는 길, 이들의 아픈 상처를 대한민국은 언제쯤 치유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 소록도 중앙공원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