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흥 팔영산, 여덟 선녀와 양소유의 꿈인 듯 솟아 있네

모산재 2012. 8. 22. 08:42

 

팔영산.

 

생소한 산이었다. 

 

땡볕이 내리 쬐는 한여름 오후, 처음 올라본 팔영산은 참 좋았다.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높아지며 일렬로 늘어선 여덟 개의 바위 봉우리와 남쪽 끝에서 넓은 품으로 우뚝 솟은 육산 최고봉 하나, 여덟 선녀를 거느린 양소유를 떠올리게 하는 산이다.

 

 

수십 년래의 가장 뜨거운 여름, 팔영산 중턱의 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날은 40도에 육박하는 숨막히는 폭염이 내리쬐고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 등산을 위해 숙소 마당으로 나서니 팔영산 암봉들이 푸른 하늘을 이고 빛나고 있다. 아무리 극심한 염천이라도 이리 아름다운 산을 어찌 오르지 않으리.

 

 

 

 


팔영산은 고흥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최고봉 깃대봉이 해발 608.6m다. 깃대봉은 육산이지만 병풍처럼 늘어선 8개의 바위 봉우리를 비롯한 산 전체는 기암괴석들이 많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점차 높아지며 늘어선 여덟 개 봉우리는 차례대로 1봉, 2봉... 으로 불렀는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유영봉(491m), 성주봉(538m), 생황봉(564m), 사자봉(578m), 오로봉(579m), 두류봉(596m), 칠성봉(598m), 적취봉(591m)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이름은 모두 능가사를 보수할 때 발견된 ‘만경암 중수기’에 기록돼 있는 것이라 한다.

 

기운차게 솟구친 암봉들이 병풍처럼 고흥반도를 감싸고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는 다도해를 조망하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1998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바로 작년(2011년)에 다도해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팔영산 등산 안내도 


 

 

'그림자 영(影)'자를 쓴 팔영산(八影山)이란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이에는 그럴싸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국가지식포털의 <팔영산 전설과 송팔응 장군>에서 발췌한 내용.

 

팔영산은 여덟 봉우리이므로 팔봉산이라 불렸다. 그런데 옛날 중국의 위왕이 세수를 하는데 문득 세숫대야에 여덟 봉우리가 비치지 않는가. 위왕은 그 아름다운 봉우리에 감탄하며 신하들에게 그 산을 찾기를 명한다. 하지만 중국 땅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봉우리를 찾지 못하고 마침내 국경을 넘어 우리 나라에까지 왔다가 이곳 고흥에서 비로소 찾았다. 신하들이 돌아가 이 사실을 고하자 위왕은 산의 이름을 팔영산(八影山)이라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먼저 대나무숲을 지나고...

 

 

 

암갈색 등을 가진 산개구리도 만난다.

 

 

 

능선길로 접어들며 돌아보니 멀리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휴양림 숙소가 눈에 들어온다.

 

 

 


제1봉인 유영봉으로 가는 길과 제6봉인 두류봉으로 가는 갈림길, 두류봉길을 선택한다. 여덟 봉우리를 다 돌아보고 싶기도 하지만 햇살이 너무 뜨거워 포기하기로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팔영산은 제1봉 유영봉에서 한 번, 제2봉 성주봉에서 두 번... 이렇게 봉우리 수에 맞춰 제8봉까지 절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소원이 절실한 분들은 부디 제1봉부터 오르시기를...

 

 

능선길에는 잎이 가느다란 백운기름나물이 자생하고 있다.

 

 


코스모스처럼 가늘게 갈라진 잎으로만 보면 가는기름나물과 어떤 점이 다른지 잘 모르겠는데, 백운기름나물은 남부지방에서 자라고 가는기름나물은 북부지방 두만강 지역 등에서 자생한다 하니 백운기름나물임에는 틀림없겠다.

 

 


두류봉 정상에 가까워지니 건너편 낮은 능선 너머로 해안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왼쪽에 살짝 보이는 봉우리는 5봉인 오로봉(五老峰)이고 오른쪽으로 주능선에서 벗어나 있는 암봉이 선녀봉.

 

 


지도를 통해 확인하니 바다는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여자만(汝自灣).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섬들은 백일도, 진지도, 미덕도, 원주도 등으로 보이고 멀리 대여자도와 송여자도 등은 내가 낀 탓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내 제6봉인 두류봉(頭流峰)이 눈 앞에 나타난다.

 

험한 바위봉우리에는 철계단이 놓여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동쪽으로 내려다본 휴양림 골짜기, 숙소

 

 

 

해발 596m 두류봉 정상.

 

 


두류봉 정상에서 바라본 선녀봉

 

 


두류봉 정상에서 올라서자 선녀봉 너머로 여수 화양 일원이 어슴프레 보이고, 왼쪽으로는 여자만의 섬들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적금도, 조발도, 낭도 등의 섬이 아주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맑은 날이면 일본 대마도와 제주도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내가 낀 오늘 날씨로는 여수반도와 돌산도도 보이지 않으니 어쩐지 '뻥'으로 느껴진다.

 

 

 

 

두류봉 너머로는 제5봉인 오로봉(五老峰)·만 보일 뿐이다. 높이는 579m.

 

 


제1봉부터 제5봉까지 다 보일 것으로 기대했는데, 다른 봉우리는 모두 제5봉인 오로봉에 가려 있는 것인지...

 

오로봉 너머에는 선비의 그림자를 닮았다는 제1봉 유영봉(儒影峰·491m), 제2봉 성주봉(聖主峰·538m), 제3봉 생황봉(笙篁峰·564m), 제4봉 사자봉(獅子峰·578m)이 있다.

 

오로봉은 다섯 늙은 신선들이 놀았다는 산으로 중국 산서성을 비롯하여 강서성, 복건성 등에 두루 존재하는 도교적인 산 이름이다.

 

 

 

돌아서서 남동쪽을 바라보니 팔영산의 최고봉 깃대봉(608m)이 넓은 어깨에 팔을 벌린 듯한 듬직한 모습으로 팔봉을 지켜보고 섰다. 

 

 

 

두류봉에서 내려서며 바라보는 제7봉 칠성봉(七星峰·598m)은 기암 여럿을 모아놓은 듯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두류봉 바로 아래, 두류봉을 구성하는 여러 바위들 사이의 공간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다가온다.

 

 

 


살펴보니 절리에 의해 세로로 갈라진 바위들 사이에 많은 공간들이 형성되어 있다. 바로 그 공간에서 냉각된 공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주변 풀섶과 절벽에는 비비추들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있다. 포엽이 제법 잘 발달한 것으로 보아 주걱비비추가 아닐까 생각된다.

 

 

 

 


칠성봉 정상으로 올라서는 곳에는 '통천문'이 있다. 

 

북방식 고인돌처럼 양쪽에 거대한 바윗돌이 섰고 그 위에 그만한 바윗돌 하나가 얹어져 있는 모습이 아주 근사하다. 

 

 

 

  

통과하여 돌아본 통천문

 

  


칠성봉 정상 표지석

 

 

 

칠성봉에서 돌아보니 1봉부터 5봉까지 두류봉에 가려서 보이지 않고, 두류봉과 선녀봉만 나란히 보일 뿐이다. 여자만의 섬 풍경은 좀더 뚜렷해졌다.

 

 

 


칠성봉에서 바라보는 제8봉 적취봉(591m) 방향의 남서쪽 능선 풍경

 

 

 

능가사가 자리잡고 있을 남서쪽 방향은 역광인데다 내가 끼여 제대로 된 풍경을 볼 수가 없다.

 

대개 팔영산 산행은 능가사 쪽에서 시작한다. 송광사의 말사로 보현사로 불려지던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탄 뒤 능가사로 불려졌다고 한다. 

 

 

 

중간 능선에서 돌아서서 바라본 칠성봉과 선녀봉

 

 

 

후각을 즐겁게 하는 조록싸리꽃이 피고 있다.

 

 

 


칠성봉에서 적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유난히 길고 기암괴석들이 작은 봉우리를 이루며 아름다운 굴곡을 이루고 있어 걷는 재미가 유난하다. 중간중간 솟아오른 봉우리에서 조망을 즐길 수 있으니 더욱 유쾌하다,

 

 

 

살아 있는 나무에 착생한 버섯. 무슨 버섯일까...

 

 

 

다시 돌아본 칠성봉과 선녀봉.

 

칠성봉은 많은 바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봉우리여서 적취봉으로 내려서는 긴 능선길을 그 품에 안고 있는 형상이다.

 

 

 

클로즈업해 본 칠성봉

 

 

 

팔영산 휴양림 골짜기의 품이 참 넓다는 걸 새삼 느낀다.

 

 

 


눈 앞으로 다가서는 팔영산 제8봉 적취봉(591m)과 최고봉 깃대봉(608m).

 

화려한 여덟 개의 바위봉우리를 마지막에 품이 넓고 높은 육산이 감싸고 있는 형세가 인상적이다.

 

 


일직선의 능선길에서 오른쪽으로 비켜선 길로 들어서자 비로소 적취봉은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늘에는 때늦은 바위채송화가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적취봉 오르는 능선에서 바라본 칠성봉 능선길

 

 

 

 

적취봉 허리에서 돌아본 칠성봉과 선녀봉 

 

 

 

 

다가선 적취봉 정상, 표지석이 보인다.

 

앞쪽에 보이는 거대한 암봉 너머에 정상 표지석이 서 있다. 얼핏 둘이 하나로 보이지만, 그 사이는 50m 이상 벌어져 있다.

 


 

 

앞쪽에 있는 암봉은 오를 수 없어 우회해야 한다.

 

 

 

 

비로소 보이는 적취봉 정상 표지석.

 

공룡능선처럼 아기자기한 기암 능선을 지나 자리잡고 있다.

 

 

 

 

적취봉으로 오르며 돌아본 풍경

 

 

 

 

적취봉(積翠峰, 591m) 정상에서

 

 

 

 

 

팔영산의 제8봉 적취봉을 넘어서자 빛나는 바위봉우리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산세는 우람한 육산으로 바뀐다.

 

저 든든하고 부드러운 육산의 감촉을 발바닥으로 느껴보고도 싶었지만, 따가운 햇살 아래 장 시간 산행이 부담스럽기도 하려니와 기다리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해 이쯤에서 만족하고 하산하기로 한다. 

 

 

깃대봉에서 남서방향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이 참으로 듬직하고 포근하지 않느냐! 저 방향으로 하산해 봤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발길은 반대편 골짜기로 내려선다.

 

 

 


아름다운 팔영산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다.

 

적취봉 아래 칠봉암 터는 빨치산 은거지였고, 만경암 터가 의병들의 격전지였다면, 능가사 만경암터는 을사늑약이라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선 의병들이 일제의 토벌대에 의해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라 한다. 

 

나중에 또 팔영산을 찾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이런 역사의 흔적도 찾아보리라. 

 

 

고흥을 떠나며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본 팔영산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