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단양 팔경의 제1경, 도담삼봉

모산재 2012. 6. 13. 12:42

 

도담삼봉,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청춘의 추억이 담겨 있는 여행지이다.

 

80년 민주화의 봄,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게 해달라는 외침에 전두환 등 신군부가 계엄을 선포하고 휴교령을 내렸을 때 대학문 앞에 세워둔 탱크를 본 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잠시 서울을 떠나 있기로 하였다. 청량리역에서 집총한 채 삼엄한 검색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단양으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도담삼봉과 사인암과 고수동굴 등을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던가. 막걸리 한잔 나눈 객기로 승객이 별로 없는 버스에서 유행가를 함께 불렀던가. 장을 보러 나온 시골 어른들도 함께 흥겨워 노래를 부르고... 그 시간 광주에서는 무참한 살륙극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서울에 돌아오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몇 년 뒤 대학을 졸업하고 또 한번 찾았다.

 

대통령을 탈취한 전두환 폭압정치가 한창이던 여름날,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함께 다녔던 친구, 결혼식 사회를 봐 주었던 친구 부부와 함께 중선암(여기서 윗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주민등록증을 흘려보내고 다시는 만들지 않았다가 몇 년 전에야 만들었다. 그 시절 내 아이디는 그곳 어느 강바닥 지층 속에 퇴적되어 있겠지...)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바로 도담삼봉으로 와서 건너편 강가에서 야영을 한 것이다.

 

 

20년 세월이 더 지나 추억의 강가에 서니 알 수 없는 감회가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강물은 유연히 흐르고 삼봉은 옛 모습 그대로 깊은 강물 속에 발을 담그고 우두커니 서 있다.

 

바위는 수십 년 전의 그 바위인데 물은 그 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 풍경은 그대로 아닌가. 사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리라. 그 때 보았던 어른들의 모습이 되어 내가 강가에 섰고, 또 누군가가 내 청년 시절의 객기를 가지고 이곳에 들르고 있으리라. 물이 흐르듯 사람도 흘러간다. 흘러간 물에 또다른 물이 뒤를 이어 흐르듯 또 다른 사람들이 삶의 풍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 도담삼봉(島潭三峰)

단양팔경의 하나로, 남한강 상류 한가운데에 3개의 기암으로 이루어진 섬을 말한다. 푸른 강물 가운데 우뚝 선 기암괴석이 모두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 가장 높은 가운데 봉우리 허리에 정자가 있어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다.

단양군수를 지낸 이황을 비롯하여 황준량, 홍이상, 김정희, 김홍도, 이방운 등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긴 곳이다. 이곳에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탄생에 관련한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정도전은 정자를 짓고 이따금 찾아와서 경치를 구경하고 풍월을 읊었다고 하며,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고 한 것도 도담삼봉에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도담삼봉은 충주댐의 완성으로 약 1/3이 물에 잠기게 되었지만, 월악산국립공원에 이웃하여, 수상과 육상교통이 개발됨에 따라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2008년에 명승 제 44호로 지정되었다.

 

 

그럼에도 시선은 자꾸만 유유히 흘러 멀어져가는 강물보다는 변치 않고 우뚝하게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를 향한다. 부질없는 사람의 마음이다.

 

 

 

▲ 가운데 봉우리는 장군봉(남편봉), 왼쪽 봉우리는 첩봉(딸봉), 오른쪽 봉우리는 처봉(아들봉)이라 부른다.
장군봉에 자리잡은 육각정에는 '삼도정'이란 현판이 달려 있다.

 

 

올해 날씨가 하도 가물어서인지 물이 많이 빠져 물에 잠겼던 부분이 선으로 드러나고 있다. 폭우가 내릴 때에는 충주댐의 만수위로 첩봉이 물속에 잠기고 정자까지 물이 드는 일도 있다고 한다.

 

영원할 것 같은 저 바위도 흘러가야할 물을 가로막은 인간의 행위로 그 존재가 위협받기도 한다.

 

 

 

 

 

도담삼봉은 스스로 호를 '삼봉'이라 지을 정도로 정도전과 인연이 깊은 곳. 단양 도전리에서 태어난 정도전은 젊은 시절 이곳에 와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도담삼봉에는 정도전과 관련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 오다 이곳에서 멈추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매년 정선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소년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오.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

 

 

 

 

 

 

전설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개국공신으로 위세를 떨치던 시기 삼봉 덕분에 단양 사람들이 경제적 혜택을 받는 일이 있었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고려 왕조가 망하면서 길재, 이색, 원천석 등과 같은 사람들이 고려 멸망을 안타까워하는 시조를 남기고 있는데, 정도전은 이와 반대로 그것이 부질없다는 뜻의 시를 남기고 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 창업에 나선 그로선 당연한 일일 터.

 

 

선인교(仙人橋) 내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흘러드니
반천년(半千年) 왕업(王業)이 물소리뿐이로다.
아이야 고국 흥망(故國興亡)을 물어 무엇 하리오.

 

 

자하동은 송악의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송악에서 발원한 물이 선인교를 지나 자하동에 이르러 물소리만 들릴 뿐이니 그 근본인 송악(고려 왕업)을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선 왕조 창업의 당위성을 넌지시 비치고 있는 시 아니겠는가.

 

 

이제 정도전이 정당성을 부여했던 5백 년 조선 왕조조차 물소리로만 남았다.

 

저 멀리 하류 쪽으로 단양읍으로 들어서는 붉은 철교와 높이 솟은 빌딩이 보인다. 조선 왕조의 흔적을 다 지워버렸다는 듯...

 

 

 

 

 

그 옛날 중앙선 철도가 지나가던 산줄기에는 보다 많은 관광객을 싫어 나를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강가 언덕은 삼봉 정도전을 기념하는 작은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삼봉 정도전(1342~1398)은 목은 이색의 제자로 성리학 사상을 배경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의 기틀을 세운 일등 공신이었지만, 이방원과 정치투쟁 과정에서 1차 왕자의 난으로 살해된다.

 

한양 천도 때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고, <조선경국전>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였으며 <불씨잡변佛氏雜辨)>을 통해 불교를 비판하는 등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아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 유교 정치의 근간을 세웠다. 문집으로 <삼봉집>이 전하고,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 국문학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 삼봉 선생 숭덕비

 

 

 

 

 

↓ '김거사의 들집을 찾아서(訪金居士野居)'라는 시를 새긴 시비

 

 

 

 

 

김거사가 살고 있는 시골집을 찾아 갔다가 스스로 한폭의 그림 속에 서 있는 무아(無我)의 경지를 읊은 작품이다.

 

秋雲漠漠四山空    가을 구름 아득하고 온 산은 텅비었는데
落葉無聲滿地紅    소리없이 지는 잎은 온 땅에 단풍일세.
立馬溪橋問歸路    개울가 다리 위에 말 세우고 돌아가는 길 물을 제
不知身在畫圖中     알지 못했네, 이내 몸 그림 속에 있는 줄을.

 

 

 

↓ '선인교 내린 물이' 시조비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는 유응부를 작가로 밝혀 놓았으나 대부분의 가집에는 정도전이 지은 것으로 밝혀 놓았다. 그러나 작품에 투영된 화자의 태도로 보아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가 지은 많은 작품들은 조선 왕조 창업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도담삼봉을 둘러보았으니, 이제 또 하나의 단양팔경인 석문(石門)으로 발길을 옮긴다.

 

저기 보이는 상류 왼편의 절벽 위에 석문이 자리잡고 있다.

 

 

 

 

 

※ 단양 팔경의 제2경, 마고할미 전설이 깃든 석문 => http://blog.daum.net/kheenn/15855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