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소백산의 아름다움, 희방사와 희방폭포

모산재 2012. 6. 11. 23:30

 

죽령 고개에서 소백산 연화봉을 거쳐 희방사 계곡으로 내려오면서 들른 희방사.

 

연화봉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갑자기 급경사를 이루는 골짜기로 들어서서 30여 분을 내려오면 그 너머 능선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와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희방사를 만나게 된다.

 

 

그 골짜기의 끝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화산대종사사리탑'과 탑비이다.

 

 

 

 

 

 

화산대종사가 누구인가? 비문을 읽어 보면 될 것이지만 시간에 쫓기는 등산객이 그걸 읽어 볼 겨를이 있겠으랴. 집에 와서 찾아보니 별 기록이 없다. 수많은 검색 끝에 얼핏 한  구절만 잡히는데 '희방사 전 주지'. 그 기록 외엔 근거를 찾을 길 없고. 아마도 맞겠지요.

 

 

이렇게 해서 절의 경내를 뒤에서부터 탐방하게 된다. 희방사를 찾고자 하는 분들은 이 사진들을 보고나서 역순으로 복기하시길 바란다.)

 

화산스님 사리탑에서 산허리를 타고 만나는 다른 골짜기로 접어드니 거기에 희방사 범종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 범종루에는 한국전쟁 이후 절을 다시 지으면서 조성한 범종이 있겠지만, 현재 보물 제11-5호 로 지정되어 있는 화계사의 범종루의 범종은 1898년에 이곳 희방사에서 옮겨간 것이라고 한다.

 

 

다리를 건너 법당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다리를 건너기 전 범종각 윗쪽 언덕에는 지장전과 7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지장전의 유려한 현판 글씨는 일타 스님의 것이라고 한다. 일타 스님은 불심 깊었던 외증조할머니의 감화로 시작되어 친·외가를 포함해 일가족 41명이 모두 출가한 이야기로 유명한 스님이기도 하다.

 

 

 

 

 

 

지장전 내부는 시왕상이 따로 봉안되어 있지 않고 대신 시왕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탱화가 지장보살 뒤에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진영은 희방사를 창건한 두운조사이다.

 

 

 

 

 

다리를 건너면 대웅전이다.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본 계곡 풍경.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이 골짜기에 들어서서 땀을 씻고 있다.

 

 

 

 

 

 

희방사는 의성에 있는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라고 한다.

 

선덕여왕대이던 643년 두운(杜雲)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호랑이에 얽힌 창건 설화가 전하고 있다.

 

 

두운은 태백산 심원암에서 이곳의 천연동굴로 옮겨 수도하던 중, 겨울밤에 호랑이가 찾아 들어 앞발을 들고 고개를 저으며 무엇인가를 호소하였다. 살펴보니 목에 여인의 비녀가 꽂혀 있었으므로 뽑아주었다. 그 뒤 어느 날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어여쁜 처녀가 호랑이 옆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처녀를 정성껏 간호하고 원기를 회복시킨 다음 사연을 물으니, 그녀는 계림의 호장 유석의 무남독녀로서, 그날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려고 하는데 별안간 불이 번쩍 하더니 몸이 공중에 떴고, 그 뒤 정신을 잃었다고 하였다. 두운은 굴속에 싸리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따로 거처하며 겨울을 넘긴 뒤 처녀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유호장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동굴 앞에 절을 짓고 농토를 마련해 주었으며, 무쇠로 수철교(水鐵橋)를 놓아 도를 닦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하였다.

 

 

이에서 유래했는지 희방사계곡이 있는 지명이 수철리이다.

 

 

 

대웅전이다.

 

 

 

 

 

현재의 희방사 전각은 1850년에 불탔던 것을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또 불타고 1953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6.25 전쟁 때 이 골짜기는 치열한 전투장이 되었다. 절과 함께 보관해오던 국보급 문화재 <월인석보>가 소실되었다.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석가의 일대기를 훈민정음으로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의 공덕을 노래한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이다. 1568년에 1·2권의 판목으로 새긴 것인데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을 뿐 아니라 1권 머리에 훈민정음 판 15장 30면이 얹혀 있어서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3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 희방사 동종(경북유형문화재 226)과 월인석보 책판을 보존하고 있다. 동종은 1742년에 제작되었는데, 폐사된 단양 대흥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은은한 종소리가 유명하다.

 

현재 대웅전에 모신 주존불은 한국전쟁 당시 화재를 면하여 두운조사가 기거하던 천연동굴 속에 봉안하였다가 중건한 뒤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표현한 걸까. 단순한 장식품?

 

 

 

 

 

 

희방사는 1980년대 태고종과 조계종 사이에 끊임없는 분규로 내홍을 겪었다 한다. 조계종으로 등록되어 있는 절이지만 실질적인 점유권은 태고종이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희방사를 떠나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금방 희방폭포로 접어든다.

 

 

 

 

 

예전 암벽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지나던 폭포 옆의 등산로는 폐쇄되었고 대신 높은 출렁다리가 폭포를 비껴서 가설되었다.

 

 

 

 

 

 

 

 

 

소백산 영봉 중 하나인 연화봉(1383m)에서 발원하여 희방계곡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요란한 굉음과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직 암벽을 타고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으로 영남지방 제1의 폭포로 꼽힌다. 소백산 중턱 해발 700m 지점에 있으며 높이는 28m이다.

 

 

서거정(1420~1488)은 이 폭포를 가리켜 '천혜몽유처(天惠夢遊處)' 즉 '하늘이 내려준 꿈에서 노니는 듯한 풍경'이라 평했다 한다.

 

 

 

 

 

 

희방폭포는 희방사입구에서 출발하여 연화봉에 이르는 최단 등산코스인 희방사계곡으로 오르면 약 20분이면 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