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서울 부암동 백사실 계곡 / 백석동천, 백사실, 현통사

모산재 2012. 5. 20. 13:30

 

노동자의 날, 오늘은 동료들과 함께 백사실 계곡을 찾는다.

 

서울 도심에 있는 아름다운 자연계곡,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는 백사실 계곡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찾아가보는 일은 처음이다.

 

 

 

3호선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려 경복궁 옆 골목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백사실 계곡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꽤 먼 거리라 세검정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덛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경복궁 담을 끼고 얼마간 걸으니 금방 청와대 앞 청와대사랑채란 공간에 이른다. 길 건너편엔 청와대 별관건물이 보이고, 무전기를 든 사내들이 곳곳에 얼쩡거리고 섰다. 청와대 부근이라고 가로수 아래엔 온갖 꽃들로 곱게 단장해 놓았다.

 

괜한 거부감에 삐딱한 눈길 한번 던져 보낸 뒤 길을 건넌다.

 

 

 

 

 

청와대 담벼락이라 생각하고 걸었는데, 담장길이 끝나는 지점에 담장 안쪽에 한옥으로 된 전각들이 나타난다. 거의 지붕만 보이는 전각에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무슨 전각들인지 궁금하여 나중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이 전각들은 조선시대 후궁 7명의 위패를 봉안한 '궁정동 칠궁' 의 일부.

 

저경궁(儲慶宮)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원래는 16대 임금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로 송현궁(松峴宮)이라 불렸는데 남대문로 회현방 송현(松峴)에 있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

 

 

대빈궁(大嬪宮)은 19대 임금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낙원동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궁정동 칠궁은 1908년 여러 곳에 흩어져 6명의 후궁 사당을 옮겨 육궁(六宮)이라 하였는데, 1929년 순헌황귀비 엄씨의 덕안궁(德安宮)을 옮겨오면서 지금과 같이 칠궁이라 하게 되었다. 원래 이곳은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국가적인 봉사를 받지 못한 후궁 출신의 생모 최숙빈을 추념하여 사당을 짓고 봉사한 육상궁(毓祥宮)이 있던 곳이었다.

칠궁에 합설된 궁은 ① 육상궁: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 ② 저경궁(儲慶宮):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仁祖의 아버지)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사당, ③ 대빈궁(大嬪宮):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영조의 이복형)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당, ④ 연우궁(延祐宮):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영조의 첫째 아들)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사당으로 현재 신위는 육상궁에 합사, ⑤ 선희궁(宣禧宮):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映嬪李氏)의 사당으로 현재 신위는 경우궁에 합사, ⑥ 경우궁(景祐宮):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사당, ⑦ 덕안궁(德安宮):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비 엄씨의 사당이다.

1968년 1·21사태 이후 경비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2001년 11월 24일부터 다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걷는 길에서 만난 토종 민들레. 서양민들레에 비해 잎과 꽃이 훨씬 크고 꽃받침이 꽃을 일편단심으로 알뜰히 받치고 있다.

 

 

 

 

청운동을 지나 인왕산을 끼고 창의문로를 따라 창의문 방향으로 가는 길. 꽃을 피운 박태기나무

 

 

 

 

부암동 입구에는 한양도성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이 있다. '자하문'으로 더 알려진 창의문은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남았다.

 

인왕산 쪽에는 청운공원과 윤동주문학관 자리잡고 있다. 자하문 인근에는 환기미술관도 있다. 널널한 시간에 혼자 와서다 둘러보았으면 좋으련만...

 

 

 

창의문 부근에서 일단 안내 지도를 확인하고...

 

 

 

 

 

창의문을 지나 백석동길로 막 접어드는 곳, 길 아래 카페(라 카페 갤러리)에 '박노해 파키스탄 사진전'이란 플래카드가 걸리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들렀다 가기로 한다. '구름이 머무는 마을'이란 이름의 사진전.

 

 

 

 

어느 사이 사진가로 변신한 박노해. 파키스탄 여행에서 담은 사진들은 모두 흑백이다.

 

 

 

 

흑백으로 담겨진 풍경 속에서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그 중 한 작품, 차 마시는 사람들을 담은 사진에 눈길이 간다.

 

 

 

 

사진은 모두 차분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한때 뜨거운 심장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진보를 외쳤던 혁명가는 이제 고요한 명상의 세계에 잠긴 수도자가 된 듯하다.

 

입구에 써 놓은 그의 아포리즘은 어째 좀 진부하다.

 

 

 

 

사랑 없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뭐지...? 견디고 또 견뎌내야 하는 삶은 뭘까...

 

 

 

백석동길의 돌담 벽 담쟁이

 

 

 

 

 

 

가는 길 부근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유명한 ‘산모퉁이카페’를 내려다보며 지나고...

 

 

모퉁이를 도는 곳에서 바라본 백악산의 서울성곽

 

 

 

 

 

 

고개를 넘어 백사실 계곡으로 접어든다.

 

 

도룡농이 산다는 안내 팻말이 보이고, 골짜기로 내려서는 길로 들자 금방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 새긴 큰 바위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은 백사실 계곡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계곡 중간에 백사실과 모정 등 별서(別墅) 유적이 남아 있다. '별서(別墅)'란 농장이나 들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을 가리키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지은 별장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이곳 백악산 깊은 골짜기 푸른 숲 속의 백석동천의 별장과 정자에서 왕족과 사대부들이 맘껏 풍류를 즐겼으리...

 

 

그러나 계곡은 기대와는 달리 수량이 적어 실망스럽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계곡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서야 계곡인 줄 알았으니...

 

 

 

 

 

계곡 옆 언덕엔 솟대를 세워 계곡의 단조로움을 지우려 했다.

 

 

 

 

 

 

그리고 그 아래 넓은 터가 나타나고 백사 이항복의 별장터와 연못터, 백사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계단 위로 긴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백사실터가 보이고..

 

 

 

 

 

 

계단을 오르며 돌아보면 거기에 아담한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남아 있는 주춧돌은 ㄱ자로 지어진 백사실의 모습을 또렷하게 떠오르게 한다.

 

낮은 주춧돌 자리는 안채였을 것이고 돌기둥 모양의 주춧돌 자리는 사랑채였을 것이다. 돌기둥 위에는 3면이 탁 트인 누마루를 두어 계곡과 연못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기는 공간으로 삼았으리라.

 

 

 

 

 

백사 이항복은 권율 장군의 사위. 그는 바로 위 인왕산 암벽인 필운대에 있던 장인의 집을 물려받아 살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필운(弼雲)은 그의 또다른 호가 되었다. 백사(白沙)라는 호는 그의 문집 <백사집>에 따르면 1611년 그가 꿈속에서 별천지인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 흰 모래가 펼쳐진 풍경을 보고 감동하였다고 하는데 이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꿈 속에서 본 정자는 윤두수의 것이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나중에 이항복의 소유가 된 모양이다. 어쨌든 인왕산 자락 필운대에 집을 두고 백악산 계곡에 별장을 두고 살앗던 이항복의 삶이 참으로 부럽기만 할 뿐이다.

 

 

연못 저쪽 끝에는 육모지붕을 한 육정자의 주춧돌과 돌계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벌써 여름처럼 더워진 날씨에 계곡을 찾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다.

 

 

 

 

백사실에서 계곡을 따라 얼마간 내려가노라면 현통사(玄通寺)란 절이 나타난다.

 

 

 

 

통 너럭바위가 계곡을 이룬 언덕 위에 작은 일주문을 세운 현통사 절집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절에 대한 정보는 알 길 없는데, 일주문 앞 바위에는 일붕 서경보의 애국시를 새겨 놓은 것으로 보아 일붕의 '세계불교'에 속한 사찰인 듯하다.

 

 

 

 

계곡 위 가파른 언덕을 깎아 만든 좁은 마당 위엔 제월당, 칠성각, 산신각, 대웅보전 등 네 채의 전각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작은 절이지만 현통사는 너럭바위와 폭포가 있는 계곡과 어울려 독특한 미감을 자아내는 풍경을 이루었다.

 

 

 

 

 

 

 

지금은 물이 말라 아쉬움이 있지만 수량이 많은 계절이면 썩 볼 만한 풍경이 연출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곳은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한다.

 

 

 

 

현통사를 벗어나니 바로 마을로 이어진다.

 

멀리 마을 너머로 신록을 입은 북악의 봉우리들이 싱그럽게 다가온다.

 

 

 

 

 

백사실 계곡이 북한산 계곡과 만나 부암동을 가로지르는 홍제천에는 세검정이 있다. 광해군 때는 김류, 이귀 등이 칼을 갈아 물에 씻으며 인조반정을 모의하던 곳이었다는 곳,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시민들의 쉼터로 인기가 높았던 곳, 하지만 지금은 이미 그 운치를 잃어버린 곳...

 

버스를 타고 오면서 뭔가를 잃어버리고 떠나는 듯 아쉽다. 차창 밖으로 대원군이 살았다는 석파정이 빠르게 지나간다. 한때는 최고의 민가였을 저택이 대로변에 주저앉은 듯 초라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