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대둔산 (1) 금강구름다리, 삼선계단, 마천대, 동학농민혁명군 최후 항쟁지

모산재 2012. 4. 20. 19:23

 

3월에 왔다 짙은 안개와 비로 돌아서야 했던 대둔산을 한 달만에 다시 찾았다. 며칠 전부터 또 비가 내려 마음을 졸이게 하더니 청명절을 지나면서 보란듯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드러내었다.

 

 

대둔산 주차장에서 바라본 대둔산 암봉들

 

 

 

 

주차장 매표소

 

 

 

매표소를 지나고 식당가를 지나면 케이블카 탑승장이 나타난다.

뒤 따라오던 한떼의 무리들이 탑승장 앞에서 얼쩡거리다 그냥 걷기로 한 모양이다.

 

 

 ※ 대둔산 안내도

 

 

 

대둔산은 충남 논산시와 금산군 및 전라북도 완주군에 걸쳐 있다. 오대산·월성봉·천등산 등과 함께 노령산맥의 북부 잔구군(殘丘群)을 형성하며 수십 개의 봉우리가 6km에 걸쳐 솟아 있다. 최고봉인 마천대(摩天臺)의 높이는 878m로 서쪽으로 만경평야를 굽어보고 있다. 우리나라 팔경 중 하나라 일컫기도 하고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둔산(大芚山)은 ‘두메의 험준하고 큰 산'이란 뜻을 가진 산이다. 옛 이름은 한듬산이라고 하는데, ‘크다’는 뜻의 ‘한’과 ‘덩이’라는 뜻의 ‘듬’이 합성된 말로 풀이한다. 계룡산의 지세와 겨루다 패해 한이 든 산이라는 설도 있다. 대둔산은 '한듬산'이 한자어로 정착된 것이다.

 

대둔산 동쪽의 배티재(梨峙)는 대둔산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통로로, 이를 분수령으로 유등천과 장선천이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전주-대전 간 국도가 지난다.

 

대둔산 남쪽 완주의 운주 쪽은 기암절벽의 절경으로 전북도립공원이 되었고, 북쪽 논산의 벌곡과 금산 진산 쪽은 숲과 계곡이 아름다워 충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완주 쪽에는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연결하는 높이 70m, 길이 50m의 금강구름다리가 특히 유명하며, 마왕문·신선바위·넓적바위·장군봉·남근바위 등의 기암과 칠성봉·금강봉 등 첨봉들이 산재하여 경승지를 이룬다. 충남 쪽에는 낙조대의 일몰이 장관이며, 가까이에 6·25 때 불타고 중건된 태고사(太古寺)가 있다.

 

 

케이블카 승탑장을 돌아서자 대둔산 정상과 암봉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앞의 두 채의 건물을 지나면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가 나타난다. 커다란 화강암 비석 받침돌 위에는 "척양척왜 보국안민(斥洋斥倭 保國安民)" 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최후 항쟁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199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번역, 간행함으로써 세간에 알려졌다.

 

1894년 10월, 청·일전쟁의 승리를 이용해 조선의 주권을 유리하려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동학농민군은 ‘척왜양창의’의 기치 아래 동학농민혁명 제2차 삼례봉기를 단행했다. '반봉건'에서 '반외세'로 투쟁이 전환한 것이다. 수십만 동학농민혁명군이 서울로 북진하였으나 12월 공주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퇴각하며 최공우등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 1천여 명이 대둔산에 들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3개월 간 항쟁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2월까지 일본군과 조선관군으로 편성된 부대에 맞서 싸우다 대부분 전사했고, 2월 18일 거점지인 대둔산 석두골(798m)에서 농민군 지도자급 25명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몇몇은 칠성봉과 장군바위에서 뛰어내렸는데, 동학 접주 김석순은 한 살 쯤 되는 여아를 품에 안고 150m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한다.

 

 

금강계곡으로 접어들자, 물가 언덕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청보랏빛 현호색 꽃들이 산객을 맞이한다. 

 

 

 

바위들이 노출된 골산이라 골짜기는 수량이 그리 많지 않다. 

 

가파른 계곡길. 일본군과 관군에 쫓겨 최후 항쟁을 위해 골짜기를 올랐을 농민군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골짜기를 오른다. 120여 년 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랐을 그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골짜기 위로 보이는 건물이 암자일까 했더니 음식을 파는 쉼터다. 도립공원 작은 골짜기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 시설이다.  

 

 

 

골짜기 아래에서는 꽃봉오리만 보이던 개별꽃이 위쪽 전석지 볕이 드는 돌틈에서는 꽃을 피웠다. 큰개별꽃으로 봐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동심정를 향해 오르다보니 남근석을 연상시키는 기둥 바위가 나타난다.

 

 

 

동심정 앞에 이르러 옆에서 바라보니, 바위 모양이 2층으로 얹힌 형태다. 안내판에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이 바위를 보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사흘을 이 바위 아래에서 지냈다는 전설"이 있다고 써 놓았다.

 

 

 

 

그리고 금방 깎아지른 듯한 두 바위 절벽 사이로 길이 열린 금강문에 이른다.

 

 

 

이 골짜기는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방불케 하는 대둔산 최고의 절경이라 금강계곡으로 불리는데,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의 전승지로 왜군들이 금산을 점령하였을 때 영규대사가 의병과 함께 싸우기 위해 연곤평으로 진군할 당시 이 금강문을 통과하였다고 전한다. 

 

 

금강문 위에는 아찔한 금강구름다리가 걸려 있는데, 철판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살짝 보인다.   

 

 

 

구름다리를 지나지 않고 바로 골짜기로 오를 수도 있지만(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그냥 직진), 대둔산의 명물인 금강구름다리를 어찌 지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쪽 바위 위로 올라야 금강구름다리로 갈 수 있다. 

 

 

 

금강구름다리로 오르는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니 거기에 케이블카 승탑장이 자리잡고 있다. 계단길로 케이블카를 타고 온 사람들이 오르고 있는 모습.

 

 

 

동쪽 절벽 너머로 보이는 풍

 

 

 

구름다리를 만나려면 이 석문을 통과해야 한다. 

 

 

 

금강문 협곡 꼭대기를 연결하는 금강구름다리.

 

 

 

출렁거리는 느낌이 심장 약한 사람은 아랫도리에 감동이 제법 올 만큼이다.

 

 

 

 

아까 올라 왔던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만큼 이렇게 까마득하고...

 

 

 

위를 바라보면 무수한 바위 봉우리와 절벽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크지 않은 산이지만 가히 금강산을 연상시키는 절경이다.

 

멀리 왼쪽으로 삼선계단과 정상인 마천대가 보인다.

 

 

 

 

그리고 멀리 삼선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철계단인 삼선계단과 마천대를 가까이 당겨서 본다.

 

 

 

높이 70m  절벽을 잇는 현수교는 길이 50m, 폭 1m. 1985년 9월 27일에 개통됐다고 한다.

 

양쪽의 절벽 바위 이름이 임금바위와 입석대라고 하는데, 어느쪽이 임금바위일까. 처음 건너는 쪽이겠지...?

 

 

 

다리를 건너 조망대에서 바라본 구름다리

 

 

 

 

조망대 서쪽 암봉들 풍경

 

 

 

 

 

 

삼선계단 오른쪽 골짜기에 약수정 쉼터가 있다. 암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자리에 있는 건물은 음식을 파는 가게다.

 

'삼선'은 세 신선이란 뜻인데, 아마도 마천대를 충심으로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가 세 신선과 같은 모습이어서 붙은 이름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고 전설이 전하는데, 고려가 망한 것을 한탄하며 이 산에 들어온 한 재상의 세 딸이 선인으로 돌변하여 바위가 되었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이다.

 

 

 

 

막걸리와 음식 냄새가 유혹하는 약수정 쉼터를 지나고...

 

 

 

약수정 쉼터에서 곧장 오르면 정상으로 이어지고, 왼쪽으로 꺾으면 삼선계단 가는 길이다.

 

 

절벽을 이룬 까마득한 바위에 매달아 놓은 철제계단인 삼선계단의 길이는 36m, 계단 수는 모두 127개이다. 경사가 51도라는데 몹시 가파르고, 올라보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느낌이 아찔하게 전해진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금강구름다리 풍경이 아름답다.

 

 

 

 

 

삼선바위 서쪽 저 골짜기가 바로 한겨울에 동학농민혁명군들이 움집을 짓고 일본군가 관군 연합군에 맞서 저항하다 최후를 맞이한 곳이라 한다.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한 글을 보기로 하자.

 

동학군 간부들 26명(이 중에 임산부 1명, 소년 1명 포함)은 해산이나 항복을 거부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대둔산으로 들어가서 대둔산 속의 한덕산 산정에다 요새를 설치하였다. 동학군 26명은 대둔산 속의 한덕산 산정의 약간 아래쪽의 몇 길이나 되는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지을 짓고 주위에 큰돌을 쌓아 올려 여기에 총구멍을 냈으며, 큰 독과 거목을 쌓아두었다가 관군이 오면 밑으로 떨어뜨리면서 총을 사격하여 저항을 하였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동학군의 이 요새는 몇 길이나 바위 위에 있어서 아래로부터는 사다리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관군측에서는 공주 감영에서 음력 1월 8일경 영병을 파견하여 3일간이나 공격을 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 후 민보군이 찾아와서 공격을 시도하다가 도리어 동학군으로부터 총을 맞고 패주하였다. 음력 1월 24일 경부터 공주의 관군이 다시 파견되어 공격을 시도했으나 큰돌과 거목을 떨어드리면서 총을 쏘아댔었음으로 접근을 하지 못하였다. 전주 감영에서는 사관 1명과 병사 30명을 파견하여 대포를 끌고 가서 포격하여 이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전주의 감영 31명은 대포를 끌고 대둔산 속으로 들어가서 동학군의 요새를 향해 계속 포격을 하였다. 그러나 대포를 가장 근접해서 설치할 수 있는 위치가 동학군의 요새에서 약 1,500 미터나 거리가 떨어져 있고 게다가 200~300 m 아래에서 위를 향해 포격했기 때문에 포탄은 모두 동학군의 요새에 미치지 못하고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 방도 명중하지 않았다.

 

이후 일본군은 일본군 3개 분대와 조선 관군 30명으로 된 특공대(모두 60명)를 편성하여 대둔산에 파견해서 이 최후의 동학군을 토벌케 하였다. 이 특공지대는 총기뿐만 아니라 등산용 사다리와 장비를 갖고 음력 1월 24일 새벽 5시 공격작전을 시작하여 세 방면으로 나누어서 기어오르면서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동학군의 요새는 세 방면이 큰 바위로 뒤덮여 있고 전면은 큰돌을 쌓아 올려서 총구멍을 냈기 때문에 일본군 특공지대의 총기사격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에 일본군 특공대는 조선 관군으로 하여금 요새 전면에서 맹공격을 계속하도록 해 놓고 일본군 특공지대는 특공작전의 공식대로 요새 후면의 바위 절벽을 몰래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동학군은 오직 절벽의 산이 험한 것만 믿고 배후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서 계속 전면의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머리 위에만 맹렬한 사격을 하였다. 그러다가 불의에 배후에서 돌격해 들어오는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용감히 싸우다가 패전하게 되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동학군은 대둔산 전투에서 9시간 동안 항전하다가 요새가 함락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어린 소년 1명만 남고 도검찰(都檢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도집강(都執綱)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도집행(都執行) 이광우(李光宇), 대정(大正) 이시탈(李是脫),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접주(接主) 진수환(陳秀換), 교수(敎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김판동(金判童) 등을 비롯해서 25명이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25명은 대개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간부급들이었다. 27, 8세의 임산부 1명도 전사하였다.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쯤되는 여아를 안고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모두 일본군에 항복하지 않고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다.

-출처 : http://blog.daum.net/cloudship1004/10350643

 

보국안민을 외쳤던 농민군을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 조엊이 진압했던 부끄러운 역사, 21세기 오늘에는 청산된 것일까... 계곡 너머를 어림 짐작으로 바라보며 117 년 전 그날의 처절했던 죽음을 잠시 떠올려 본다. 전망대 한쪽에라도 안내판을 두어 산객들이 그 날의 아픔을 느끼고 갈 수 있게 했으면... 

 

연이어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에 밀려 다시 골짜기로 내려서는 길로 접어든다.

 

 

삼선계단 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대둔산 정상 마천대, 그리고 왕관바위

 

 

 

삼선계단을 지나면 길은 다시 골짜기의 길과 합쳐진다.

 

거기서 10여 분쯤 완만해진 길을 따르다보면 금방 마천대 아래 능선으로 올라서게 된다. 거기서 왼쪽 길로 오르면 금방 마천대요, 오른쪽 길로 가면 낙조대로 가게 된다.

 

 

드디어 마천대 정상(879m). '개척탑'이란 이름의 생소한 철탑이 시야를 채운다.

 

 

 

 마천대(摩天臺)는 '하늘을 어루만질 만큼 높은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정상임을 표시하는 바윗돌이 아닌 생뚱맞은 '개척탑'이란 이름의 철탑이 썩 마땅치 않은데...

 

그 이유가 뭔가 싶어 찾아보니, 1960년대 말 전주의 어느 여고에 부임한 지리교사가 대둔산에 반해 관공서에 개발 청원을 하여 1970년에 대둔산의 개발이 이뤄지게 됐다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대둔산의 개발이 개발과 개척의 상징이 되었고, 그래서 마천대에 ‘개척탑’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마천대에서 바라본 칠성봉 암봉들

 

 

 

 

금강구름다리와 칠선계단으로 이어지는 풍경

 

 

 

 

대둔산 북서쪽 방향 전경

 

 

 

마천대에서 한 동안 머무르며 전망을 즐기다 낙조대로 발길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