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통영 (2) 김춘수 시비, 남망산 국제조각공원, 청마 시비, 초정시비

모산재 2012. 3. 14. 20:36

 

동피랑에서 내려와 강구항 동쪽으로 솟은 산언덕의 남망산 국제조각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에는 세계의 조각가들이 만든 조각 외에도 통영이 낳은 예술가들을 기리는 시비와 화비 등이 자리잡고 있다.

 

 

 

통영은 예술가들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문인으로는 유치환,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이 있고, 음악인으로는 윤이상이 있으며 미술가로는 전혁림이 있다. 이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통영은 더욱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입구 삼거리에는 '꽃'이라는 시를 새긴 김춘수 시비가 서 있다.

 

 

 

 

 

 

'존재의 의미'를 이처럼 잘 나타낸 시가 있을까. 명작 중의 명작인 이 시, 하지만 이 시를 쓴 김춘수는 내게 참으로 마뜩찮고 거북한 이름으로 남았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짓밟고 광주를 포위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학살하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출발할 때 '순수시', '무의미의 시'를 외치던 김춘수는 민정당 창당 발기인과 전국구 국회의원이 됨으로써 '순수'란 말이 얼마나 역겨운 역설적인 언어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여기에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서정주가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써서 사람들을 분노케 하더니 김춘수는 살인마의 퇴임식에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라는 헌사를 보내 그래도 그에게 존경을 거두지 않던 사람들조차 경악하게 만들었였다.

 

왕조시대에 포악한 군주에게 아첨하던 간신을 떠올리게 하는 이 기막힌 부르짖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님이 헌헌장부로 자라 마침내 군인이 된 것은 그것은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천구백칠십구년 가을에서 팔십년 사이 이 땅 이 겨레는 더할 나위 없는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우선 그것부터 끄고 봐야 하듯이 우선 치안을 바로잡고 우선 민심을 안정시키고 우선 경제의 헝클어진 운행을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일을 해내기 위하여 천구백팔십일년 새 봄을 맞아 마침내 제5공화국이 탄생하고 님은 그 방향을 트는 가장 핵심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님께서 단임으로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천한 일 그것입니다 건국 이래 가장 빛나는 기념비적 쾌거라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님은 선구자와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 물러남으로써 이제 님은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님이시여 하늘을 우러러 만수무강 하소서."

 

 

김춘수는 전두환을 호명함으로써 살인마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고, 또다시 민주주의가 압제되던 시절 신고를 겪어야 했던 사람들 뇌리에 더러운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각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동피랑 벽화마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있다.

 

 

 

 

 

 

남망산 국제조각공원은 아름다운 통영 시내와 한려수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에는 여러 나라 조각가들이 전시되고 있다.

 

 

언덕 위에는 통영시민문화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1997년에 조성된 조각공원에는 10개국 15명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의 조각작품들은 미리 만들어진 작품들을 들여온 것이 아니라, 세계의 조각가들이 직접 이곳 남망산을 방문하여 현장을 답사하고 논의를 거쳐 주위 경관과 어우러지는 작품을 창작해낸 것이라고 한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이 발길을 오래도록 붙든다.

 

일본 작가 이토 다카미치'네 개의 움직이는 풍경'이라는 키네틱 조각. 수직의 긴 스텐레스 판이 4면으로 풍경을 비추며 회전하는 작품이 독특한 시각적인 미를 창조해내고 있다.

 

 

 

 

 

 

 

그 아래 이대와 동백나무 숲 사이 작은 마당에는 생명과 명상의 조각가로 불리는 홍익대 교수 김영원'허공의 중심'이라는 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언덕으로 오르니 아름다운 강구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늑목처럼 하얀 칠을 한 철재로 세워진 입체적 구조물도 작품이다. 헤수스 라파엘 소토라는 작가의 '통과 가능한 입방체'라는 작품.

 

 

 

 

철재 사이에 빼곡하게 길게 늘어져 있던 비닐 가닥 사이를 사람들이 통과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체험할수 있도록 만든 작품이라는데, 교체하기 위해선지 비닐 가닥이 제거되어 있다.

 

소토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프랑스 조각가로, 베네수엘라에선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헤수스 라파엘 소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가느다란 선을 줄무늬로 그린 화면 앞에 가는 막대기를 줄무늬로 평행되게 매어달고 양자가 일으키는 시각적 모아레 현상을 의도한 키네틱 아트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시민문화회관 앞 잔디밭에는 황용핑이라는 중국 작가의 '뒤집힌 무덤'이라는 독특한 석조 조각이 자리잡고 있다.

 

 

 

 

거북 모양의 중국 남방식 무덤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을 한 조각인데, 장수와 영원을 상징하는 거북의 형상으로 죽음을 거부하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황용핑은 모더니즘을 도입하며 중국 현대미술의 다원화를 이끈 '85 신사조 미술'의 하나인 '샤먼 다다'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다음은 미국에서 활동중인 조각가박종배의 '물과 대지의 인연'이라는 작품.

 

 

 

 

 

박종배의 작품을 관류하는 정신은 통일성과 지속성이라고 한다. 하나의 형태가 또 하나의 형태를 잉태하는 연속의 개념으로 그의 작품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서쪽 언덕길로 오르면 청마 유치환의 '깃발'이란 시비가 나타난다. 

 

 

 

 

내 사춘기의 문학적 감수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청마. 그가 친일 논란에 휘말리게 된 것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비적을 노래한 '수(首)'란 시에 이어 몇 년 전 만선일보에 실린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 라는 글이 발견되어 친일 논란이 일었지만 혐의가 뚜렷하지 않아 현재 그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는 빠져 있는 상태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흑룡강', '대추나무', '북진대' 등 친일 '국민연극'을 주도한 거두로 친일인명사전에 일찌감치 자리잡았다.)

 

 

 

서쪽 구릉에 오르니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에  '장 피에르 로이노'라는 프랑스 작가의 '분재'라는 조각 작품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자연과 인간 관계를 재조명하도록 만들었다는데, 화분에 담긴 소나무는 말라 죽어 버렸다. 다른 소나무들은 다 멀쩡한 걸 보면 이 조각 탓이 아닌지 .. 아니면 바로 생명의 죽음이라는 분재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려 함인지...

 

 

 

 

 

언덕 아래 소나무 숲그늘에는 시조 '봉선화'를 새긴 초정 시비가 자리잡고 있다. 초정(草汀)은 시조시인 김상옥(金相沃)의 호. '봉선화는 1938년 그가 <문장>지에 가람 이병기의 추천을 받고 데뷔한 시조 작품이다.

 

 

 

 

 

194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낙엽>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년 선배인 윤이상 등과 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몇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 경남여고 등에서 교원 생활을 했으며 그림, 서예, 전각 등에 뛰어나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시조집으로 <초적>(1947) <목석의 노래'>1956가 있다.

 

 

 

 

 

 

비 오자 장독 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보듯 힘줄만이 서노나.

 

 

고향의 정겨움이 애틋하면서도 따뜻하게 묻어나는 초정의 시로 '사향(思鄕)을 잊을 수 없다.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미륵산을 건너다 보는 언덕 아래에는 국궁장이 자리잡고 있다.

 

 

 

 

조각공원 너머 동쪽 바다. 만의 안쪽 높은 아파트 건물이 있는 그 어딘가에 아마도 초가집 생가와 함께 청마기념관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들러보고 싶은데 벌써 해가 기울어져 버렸다.

 

 

 

 

 

통영시민문화회관 옆에는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1910~1959)의 화비(畵碑)가 자리잡고 있다. 

 

 

 

 

화비에는 그의 모습과 1940년 작품 '방위(防衛)'를 담았다.

 

'방위'는 암탉이 평화롭게 먹이를 먹는 동안 수탉이 경계를 서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수탉은 국가, 암탉은 국민을 비유하여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솟아오르는 애국심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해 지는 통영항 풍경

 

 

 

 

 

 

 

청마기념관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미 해는 기울어 문을 닫았지 싶어 발걸음을 돌려 중앙시장으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