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제주도 (7) 아름다운 해안 산책길, 함덕 서우봉(망오름, 서모봉)

모산재 2012. 4. 9. 01:04

 

김녕을 지나 조천읍 함덕에 이른다.

 

동승한 사내들이 함덕해안에서 막걸리나 한 잔 하고 있겠다 하여 함덕해수욕장에 떨어뜨려 주어 홀로 서우봉을 오르기로 한다.

 

 

 

 

 

거센 바람이 소리를 내며 불어대는데, 좁은 함덕해수욕장 백사장으로 바다는 연신 흰 파랑을 일으키며 달려든다. 백사장을 건너 서우봉 길로 접어들자 모래바람이 귀를 따끔하게 때리며 빠르게 지나간다.

 

서우봉(犀牛峰)은 함덕해수욕장 동쪽에 바다를 끼고 솟아 있는 오름이다. 제주올레길 19코스가 바로 이 서우봉 해안으로 통과한다.

 

 

 

 

 

완만한 등성이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남북으로 나란히 솟아 있는데, 남사면은 완만하고 북사면은 바다쪽으로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북쪽 봉우리를 '망오름'이라 하고 남쪽 봉우리를 '서모봉'이라 하며 둘을 합쳐 '서우봉'이라 부른다.

 

'서우(犀牛)'는 '물소'를 이르는 말이니 '서우봉(犀牛峰)'이라는 이름은 두 개의 봉우리가 이어진 지형이 물소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망오름의 높이는 표고 111.3미터,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니 정상까지 1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올레길이라지만 올레꾼보다는 산책하는 가족들이 더 많다. 서우봉은 함덕 사람들이 찾는 공원의 구실을 톡톡히 하는 곳으로 보인다.

 

거센 바람이 불어대는 오름의 허리로 구불구불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 유채꽃이 피어 있는 길은 파란 하늘로 걸려 있어 아름답다. 산책하기에 이보다 더 멋진 길이 그리 흔하지 않으리라.

 

 

 

 

 

길이 하늘과 만나는 곳에서 함덕 해안을 돌아본다.

 

거센 바람이 바다를 밀어 드높은 물 이랑을 이루며 바다는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다. 멀리 우람하게 솟은 한라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동쪽으로 원당오름이 머리만 살짝 보여주고 있다.

 

 

 

 

 

하늘과 만난 길은 꺾여져 정상인 망오름으로 곧장 오른다.

 

아래에서 볼 땐 급경사로 보이던 땅이 뜻밖에 완만한 계단식으로 된 드넓은 밭을 거느리고 있다. 제주에서 보기 힘든 황톳빛길이다 했는데, 보니 주변 들판의 흙이 모두 황톳빛이다. 화산이 뿜어낸 검은 제주 땅에서 예외인 듯 서우봉의 흙이 뿜어내는 붉은빛이 색다른 미감을 자아낸다.

 

 

 

 

 

서우봉이 바람을 막아주는 덕택에 따스한 볕살을 맘껏 흡수한 황토밭에는 마늘과 밀을 파릇파릇 자라고 있다.

 

이 생동감 넘치는 봄 풍경에 엉뚱하게도 이 제주에서 김영랑의 '오월'이란 시가 떠오른다.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밭 언덕 곳곳에서 아낙들이 봄을 캐고 있다.

 

 

 

 

 

함덕해변의 올린여 무지개다리를 당겨 본다.

 

그러자 함덕 해변 너머 원당오름도 제 모습을 또렷이 드러낸다.

 

 

 

 

 

들판길은 끝나고 이제 오름의 정상을 향하여 숲길로 접어든다.

 

직진하면 망오름, 오른쪽 길은 들판과 숲이 만나는 경계를 따라 서모앞길이라는 산책로가 이어진다.

 

 

 

 

 

이곳 숲에도 개구리발톱 꽃이 지천으로 피고 있다.

 

 

 

 

 

망오름 정상까지는 몇 분 걸리지 않는다.

 

뜻밖에 이곳 정상부는 숲 대신 너른 초지가 자리잡았는데, 그곳은 무덤들이 차지하고 있다. 중간 중간 나무들이 울을 이룬 가운데 평지에 가까운 곳은 모두 죽은 자들의 세상을 이루고 있다.

 

이곳엔 동쪽의 원당오름과 서쪽의 삿갓오름을 이어주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을 발견할 길이 없다.

 

무덤을 담기는 뭣해서, 대신 정상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풍경을 담아본다. 북촌과 그 너머 김녕 땅의 삿갓오름(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왕이면 올레길도 잠시 걸어보고 싶어 북쪽 해안길로 내려서본다. 너머쪽 비탈에는 계단식 작은 밭이 묵은 채로 버려져 있다.

 

밭 귀퉁이에 서서 보니 북촌과 그 앞바다의 다려도와 등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여러 개의 여가 모여서 하나의 섬을 이룬 다려도는 낚시터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서 있다가 문득 저 북촌 마을이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무대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63년 전 이승만 정권이 펼친 광란의 제주 4.3 살인극... 남자들이 다 죽어 무남촌이라 불렸던 마을, 그 이름이 바로 북촌이다.

 

 

나는 이따금 마음이 스산한 날, 북촌포구를 찾는다. 이 작은 포구엔 외팔이 어부의 삶을 사는, 그러나 웃음을 잃지 않는, 올해 나이 68세, 그 사람이 산다. 나는 그의 생애를 들으면서 시대의 상처와 인간의 초극을 느꼈다. 무자년 그해 광풍이 휩쓸던 이 바다를 떠올렸다.- 현기영 <순이삼촌>에서>

 

 

올레길을 따라 북촌 방향으로 좀더 갈볼까 망설이고 있는데, 돌아오라는 전화가 온다.

 

 

되돌아가는 길에 보니 숲에는 후추등이 흔하게 자생하고 있다.

 

 

 

 

 

망오름 기슭의 올레길

 

 

 

 

 

혼자 편하게 왔더라면 북촌 포구, 서우봉 동쪽 기슭에 있는 학살의 현장과 너븐숭이 4.3기념관도 돌아보았을 것을...

 

아쉬운 마음으로 푸른 들판 사이 붉은 황톳길을 되내려온다.

 

 

 

 

 

<덧붙이기> 서우봉은 진도에서 제주로 피신해온 삼별초군이 추토사 김방경 장군과 전투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라고 한다.

또한 서우봉 북쪽 해안에는 태평양 전쟁 말기, 패전을 눈앞에 둔 일제가 1945년에 미국의 일본 본토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대규모로 강제동원해 만든 23개의 동굴 진지가 있다고 한다. 특공기지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송악산과 수월봉, 삼매봉, 일출봉에 있는 특공기지와 유사한 구조라고 한다.왕(王)자형 진지의 경우 총 길이가 110m로, 폭은 310㎝ 내외, 높이는 310㎝ 내외.

 

 

 

 

 

※ 서우봉과 그 주변(출처 : 다음 스카이뷰)

 

 

 

 

 

 

 

 

 

※ 서우봉 주변 함덕과 북촌의 4.3 비극

일제시대에도 겪지 않았던 비극은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된 직후 이곳 서우봉 주변 조천읍 조천, 함덕과 북촌에서 가장 참혹하게 일어났다.

1948년 11월 21일, 조천의 선흘마을은 들이닥친 군경에 의해 불타고 소개령이 내려진다. 그런데 소개령에 따랐던 주민들 중 20대 여성 5명이 함덕 바닷가에서 총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에 남아 았던 사람들은 선흘곶 숲속의 동굴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체포된 마을 주민의 취조로 이들은 모두 발각되어 노약자를 제외하고 모두 죽음을 당한다. 살아남은 마을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함덕초등학교에 소개되었던 주민들도 함덕해안에서 수없이 처형되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blog.daum.net/kheenn/15855131 참조)

1949년 1월 17일 아침 세화리 주둔 제2연대 3대대 11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유격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황한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의 시신을 들것에 담아 함덕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노인 가운데 경찰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 함덕리 해변 서우봉 기슭에서 모두 사살해 버렸다. 2개 소대 가량 되는 군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친 것은 이 때였다.

시간은 오전 11시 전후. 무장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남녀노소, 병약자 가릴 것 없이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몰아 내고는 온 마을을 불태워 버렸다. 400여 채의 민가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학교 운동장에 모인 1,000명 가량의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군 지휘관이 민보단장을 불렀으나 타 지역에 출타 중이었다. 이에 머뭇거리던 청년단장 장운관(39)이 나오자 "민보단 운영을 이따위로 해서 폭도를 양산시켰다"며 총대로 사정없이 때린 뒤 웃옷을 벗겨 운동장을 돌리다가 사살해 버렸다. 마을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다.

군인들은 다시 군경 가족을 나오도록 해서 운동장 서쪽 편으로 따로 분리시켰다. 어린 학생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군경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을 20여명 단위로 묶어 '너븐숭이'라 부르는 옴팡밭(움푹 패인 밭)으로 끌고가 차례로 죽이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만 죽은 게 아니었다. 어린이나 노인, 여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았다. 이 주민학살극은 오후 5시께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됐다. 이 날 희생된 주민들만 300명이 넘었다.

떼죽음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살 중지를 명령한 대대장은 주민들에게 다음 날 이웃마을인 함덕으로 오도록 전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살아남은 주민들 가운데는 다음 날 산으로 피신한 사람, 함덕으로 간 사람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대대장의 말대로 함덕으로 갔던 주민들 가운데 100명 가까이가 '빨갱이 가족 색출작전'에 휘말려 다시 희생됐다.

이 사건으로 북촌마을에는 대가 끊어진 집안이 적지 않다. 제주도의회에서 발간한 4.3 피해 조사 보고서는 이 마을의 희생자를 총 47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blog.daum.net/kheenn/1118184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