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철불은 선종이 도입되고 지방 호족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전기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통일신라 말, 경주의 중앙집권적 권력이 무너지고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하던 시기, 정교하고 화려한 금동불에 반란이라도 일으키듯 무뚝뚝하고 강인한 철불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국보 63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98호 충주철불좌상, 보물 332호 하남 철불, 보물41호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등 수많은 철불들이 이 시기에 조성됐다.
철불 제작을 주도했던 세력은 지방에서 새롭게 일어난 호족들. 이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차갑고 강인한 무쇠로 무인풍의 기상과 패기, 자신감 넘치는 철불을 대량으로 조성한다. 철불은 바로 불상을 조성한 호족, 자신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지방 호족은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선종과 제휴하게 되는데 이는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이념이 실력을 쌓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호족의 정치적 입장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철불은 선종이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지권인(智拳印)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로 조성되다가 점차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현세불인 석가여래불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철불이 일체 중생의 구원불인 법신불에서 악을 정복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바뀌는 것은 싸움터의 한 복판에 있던 호족 자신의 모습이 형상화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철불의 숫자는 72점에 이른다. 가장 오래된 철불로 국보 제117호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헌안왕 2년(858), 국보 제63호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보원사지 고려철불좌상 / 미지정문화재, 고려초(10세기)
높이 257㎝의 큰 불상으로 석굴암 본존상 계통을 이은 것으로 고려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두 손이 사라졌으나 항마촉지인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넓적한 얼굴에 눈이 가늘고 길며 코와 입이 유난히 작고, 아래턱을 안으로 당기고 앉은 표정이 인상적이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입었는데, 얇고 몸에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드러나 보인다. 옷주름은 선각(線刻)에 가까운 얕은 층단형으로 도식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상과 매우 흡사한 철불 2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데,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출토로 같은 장인이나 공방의 솜씨로 보인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는 949년(광종 1)에 법인국사가 발원한 석가삼존상의 내용이 보이는데, 이 철불은 그 삼존상의 본존상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고려 초의 조각사 연구에서 중요한 상이다.
원주철조석가여래좌상
■ (전)보원사지 철조여래좌상 / 미지정문화재, 통일신라 말기~고려 초기
높이 1.5m. 국립중앙박물관 수장품 카드에 1918년 4월 20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당시 옮겨진 철불은 위의 철불 하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불상이다.
불의(佛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착의법으로 간결한 옷주름을 형성하며, 비교적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두 손이 모두 없어졌는데, 남아 있는 흔적으로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은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민머리에 생동감 넘치는 얼굴과 벌어진 어깨와 풍만하고 탄력 있는 가슴, 결가부좌한 육중한 다리 등, 당당한 체구가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시킨다. 신라말과 고려 초기의 불상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데, 신라말에 만들어지는 정형화된 철불과는 다른 점이 있어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 / 보물 제332호, 고려 초기(10세기)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리의 절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철불 좌상이다. 높이 2.88m로 우리나라 최대의 철불인데, 과거 박물관을 옮길 때마다 정문으로 출입할 수 없어 벽체를 허물고 옮기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던 철불이다.
얼굴은 둥글지만 치켜 올라간 눈, 꼭 다문 작은 입, 날카로운 코의 표현에서 관념적으로 변해가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으나 가슴까지 내려와 목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짓지 않고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 감싸고 있는 옷에는 간결한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당당한 어깨와 두드러진 가슴은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이어 받은 것이며, 날카로운 얼굴 인상과 간결한 옷주름의 표현은 고려 초기 불상의 전형적인 표현 기법이다.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10세기)의 전형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보물로 이미 지정되었음에도 전시실 안내문에는 지정된 내용을 써 놓지 않았다.
■ 포천 철조여래좌상 / 미지정문화재, 고려 초기(10세기)
허리가 유난히 길어보이는 이 철불은 포천에서 출토되었다.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 법의를 걸친 우견편단(右肩偏袒)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상을 그대로 본받고 있는 모습이나 조형미나 신체의 비례 등이 떨어진다.
두 손은 모두 없어졌지만 오른 손목의 위치와 형태로 볼 때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듯하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과 항마촉지인의 수인, 법의의 깃이 왼쪽 어깨에서 뒤집힌 모습, 법의의 물결식 주름 등은 10세기 경 개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경기 북부지역에서 나타나는 불상의 공통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미지정문화재, 통일신라말 ~고려 초기
지난해 입적한 법정 스님의 방에 이 불상의 미소짓는 얼굴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높이 112cm.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뺨의 굴곡이 선명하고 눈꼬리가 살짝 꺾인 특이한 눈매를 하고 있다. 머리는 날카로운 나발이 선명하며 육계의 윤곽도 어느 정도 구분된다. 신체는 양감이 적고, 어깨가 움츠러들어 당당한 느낌이 줄어든 반면 지권인을 맺은 두 팔의 자세는 사실적이고 손의 비례 또한 알맞다.
옷 주름으로 걸친 대의의 옷 주름은 9세기 불상에서 성행했던 평행하는 넓은 띠 주름으로, 왼쪽 어깨에서 한 번 접혀져서 드리운 가슴의 옷깃을 한 단 높게 조각하여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가부좌한 무릎 아래로 부챗살 모양으로 주름잡힌 옷자락은 무거운 느낌이다.
가슴을 경계로 틀을 나누어 주물을 결합한 형태로 안정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불상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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