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보물 제365호
강원도 원주의 흥법사터에 있던 것을 1931년 경복궁으로 가져왔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옮겨 놓았다.
진공대사 충담(忠湛)의 속성은 김씨. 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신라 왕족의 후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여 장순선사(長純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889년(진성여왕 3) 무주 영신사(靈神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법상부(法相部)를 배우고 율장(律藏)을 연구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 가서 정원(淨圓)을 만나고 효공왕 때 귀국하여 왕사(王師)가 되었는데, 신라가 망한 뒤에도 고려 태조의 왕사로 있었다. 죽은 뒤 원주 흥법사(興法寺)에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짓고 당태종의 글씨를 새긴 탑비를 세웠다.
진공대사 사리탑 곁에는 석관을 연상시키는 석함이 함께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 석함에 대하여 안내판은 "이 탑과 함께 발견된 석관을 통해 고승의 시신을 화장뿐만 아니라 매장도 했음을 알 수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시신을 넣기에는 너무 작은 석관이다. 그리고 사리탑이 스님의 유골을 모시는 묘탑인데, 또 매장을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돌로 만든 함에는 불교 경전과 함께 관련된 유물을 담아두었는데, 뚜껑까지 완전하게 남아있어 그 가치를 지닌다. "고 하여 석관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안내문이 잘못된 것...
그렇다면 이 석조물의 명칭도 오해를 불러들이기 쉬운 '석관'보다는 '석함'으로 바꾸는 게 온당할 듯하다.
탑은 전체가 8각의 기본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은 목조 건축 양식을 살려 표현하였다. 밑면에는 겹으로 된 서까래가 새겨졌고, 지붕은 8각 모서리선이 굵게 새겨져 그 끝에는 높이 솟아있는 꽃조각이 달려있다. 낙수면은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되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 모양의 머리장식인 보개(寶蓋)가 있다. 원래 보개 위에는 보주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독특하고,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기단의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는데 문양의 모양이 서로 다르다.
북 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 표면에는 웅장한 구름과 함께 뒤엉켜 있는 용의 몸체를 생동감있게 조각하였다.
두 유물의 조성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94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 나말선초 동시대를 산 두 분의 진공(眞空) 대사
진공대사 탑비는 경북 영주 풍기에 있는 비로사에도 남아 있다.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라는 이름의 이 탑비의 주인공은 소백산에 비로사를 짓고 주지로 있으며 법문에 감화받은 태조가 극진히 예우했으며 937년에 입적하자 태조가 ‘진공'이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명을 내리었던 분이다. 소백산을 주무대로 수행했던 이 분의 생몰 연대는 855년∼937년.
당나라를 유학하고 돌아와 태조의 왕사가 되었고 원주 흥법사에서 입적한 진공대사는 비로사 진공대사보다 14년 후배로 생몰연대는 869년∼940년. 태조는 어찌하여 그가 가까이하고자 했던 두 고승에게 같은 시호를 내렸는지...
원주 흥법사지에 따로 남아 있는 진공대사탑비에 대한 기록은 문화재청 자료로 대신한다.
※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보물 제 463호
흥법사터에 남아 있으며, 나말여초의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놓아 이 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진공대사가 입적하니 고려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경복궁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 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상 자료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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