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정원의 아름다운 사리탑과 석등

모산재 2012. 2. 23. 14:25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다.

 

용산으로 옮긴 새 박물관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답사 여행 때마다 박물관에 가 있다는 석조유물의 모습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영하의 날씨에 집을 나섰다.

 

 

이촌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박물관 서문으로 들어선다. 

 

 

 

 

 

 

 

박물관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거울못'이란 커다란 연못이 나타난다. 연못가에는 '청자각'이란 정자가 서 있다.

 

길게 늘어선 하얀 박물관은 '카사블랑카'(하얀 성)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가운데는 넓은 마당을 두고 양쪽으로 전시실을 두었다.

 

그 열린 공간으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그런데 눈 앞에 보이는 이런 공간 구성이 모두 치밀한 건축원리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 한다. 

 

남산을 의지하여 한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원리에 따라 자리잡은 박물관.

 

남산과 어울리도록 호수를 두었고, 성곽의 개념을 적용하여 건물을 설계했으며, 한옥의 대청마루 개념을 응용하여 중앙에 열린 마당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니 야외 공간은 정원이 되는 셈인데, 특히 동쪽의 넓은 터는 석조유물을 전시하는 정원으로 조성되었다.

 

어쨌거나 국립박물관은 시원스럽게 멋지게 잘 설계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국립중앙박물관 배치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이제 이곳에 온 목적대로 석조 유물들을 돌아볼 차례.

 

 

 

먼저 박물관 건물 앞 뜰에 전시된 부도탑과 석등 등을 돌아보기로 한다.

 

오늘 볼 석조유물들 중 상당수는 일제에 의해 야만적으로 옮겨진 것들... 공진회란 이름의 박람회를 위해 경복궁 전각을 다 뜯어내고, 그 자리에 전국 사찰의 석조유물들을 철거해 와 볼거리로 장식한 것이다.

 

고승들의 무덤이었던 사리탑조차 결국 볼거리로 일제가 유린한 경복궁으로 왔다가 이제 미군이 물러난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얄궂은 역사...

 

 

사리탑과 탑비, 석등은 박물관의 동쪽 전시관 뜰을 배경으로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에 전시된 사리탑, 탑비, 석등은 아래와 같다. 

 

 

 

 

 

편의를 위하여 여기서는 전체 모습을 간단히 소개하고, 자세한 내용은 각각 따로 글을 올리기로 한다.

 

 

 

 

■ 염거화상탑 국보 제104호

 

 

 

 

통일신라시대 후기 도의선사의 제자로 신라 선종 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대 선사이다. 보조선사에게 가르침을 전하여 가지산문을 대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기단 밑부분과 상륜부는 없어졌다. 지붕과 탑신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충실히 모방하였으며, 탑신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우리나라 승탑의 기본 형식이 되는 팔각 집(八角堂) 모양을 처음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탑 안에서 발견된 금동 탑지(塔誌)를 통해 제작 연대를 알 수 있어 우리나라 승탑의 시원을 밝히는 데 그 가치가 크다.

 

 

 

 

■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보물 제362호

 

 

 

 

진경대사( 855~923)는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으로 신라 선종 산문 중의 하나인 봉림산문을 세웠다.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의 봉림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팔각 집 모양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기단부의 가운데 부분의 북 모양 중대석은 꽃장식의 띠를 두르고 있으며 아래에는 중대받침을 부착하였다. 탑신부의 몸체는 단순한 팔각이며 이무런 장식이 없다. 지붕은 처마 밑이 평탄하며 지붕 위는 경사가 완만하고 널찍한 지붕의 추녀 끝에는 우아한 꽃무늬 장식이 돋아 있다.

 

전체적으로 날씬한 몸체와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변화를 시도한 조형적 특징은 신라 승탑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이 변모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 흥법사 진공대사탑, 석관 보물 제365호

 

 

 

 

진공대사는 나말여초의 고승으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효공왕(재위 897~912) 때 귀국하여 왕사가 되었다. 고려 건국 후 태조의 왕사가 되었는데, 940년 입적하자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팔각 집 모양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기단 중간부는 원통형으로 하여 구름과 용무늬를 새겼고. 아담한 탑신 위에는 곡선이 강한 지붕을 얹고 보개로 장식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 초기 승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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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 보물 제361호

 

 

 

 

나말여초의 승려 대경대사의 업적을 새긴 탑비이다. 대경대사는 특히 고려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930년에 대사가 입적하자 태조는 ‘대경(大鏡)’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와 신도들은 이 탑비를 세웠다.

 

탑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돌 머리는 보주를 물고 목을 세운 용머리 모습이며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고 있어 고려시대 초기 탑비예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보물 제190호

 

 

 

 

원공국사는 고려 태조 때(930)에 출생하여 현종 때(1018) 입적한 고려 전기의 고승이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거돈사 터에 있던 것을 1948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다. 승탑과 같이 있던 탑비는 지금도 거돈사 절터에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승탑을 이어 받은 팔각 집 모양으로 단정하고 균형 잡힌 형태에 격조 있는 장식을 더하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승탑 중에서 매우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동쪽에서 바라본 부도탑 풍경

 

 

 

 

 

 

 

■  현화사 석등

 

 

 

 

고려 현종 10년(1020)에 세워진 석등으로 원래 경기도 개성 부근의 현화사 터에 있다가 1911년 서울로 옮겨 왔다.

 

일반적인 팔각 석등과 달리 사각 석등으로 고려시대 개성 일대에 유행했던 양식이다. 화사석(불밝이집)도 사방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다. 불밝이집에 세운 작은 네 기둥은 석등 밑의 간주석(받침 기둥) 모양을 축소한 형태이며, 지붕은 듬직하고 안정감이 있다.

 

이 석등의 당당한 품격과 신선하고 세련된 조형미는 고려시대 문화의 전성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석등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석등의 장대한 규모와 건장한 자태는 당시 국가 대찰로 창건된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 나주 서문 석등 보물 제364호

 

 

 

 

>전라남도 나주읍성 터 서문 안 절터에 파손된 채로 남아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석등의 기둥 돌에는 석등을 세운 내력과 함께 이 석등이 고려 선종 10년(1093)에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석등의 본체인 불밝이집은 파손되어 조선총독부 시절 옛 모습대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지붕은 처마 밑에 드림 장식을 하고 처마와 추녀 끝에는 귀꽃 장식을 하여 고려시대 중엽에 새로이 드러내는 매우 장식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위에는 현재 작고 아담한 덧지붕만이 남아 있으며, 맨 꼭대기의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는 부서진 것을 옛 모양대로 새로 만든 것이다.

 

고려시대 문화의 전성기에 나타난 단아하고 격조 있는 팔각석등의 조형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 북묘비(北廟碑)

 

 

 

 

촉한의 장수 관우를 제향하기 위하여 1883년에 북묘를 세우고 1887년에 그 내력을 비석에 기록하여 세운 것이다. 북묘는 서울 명륜동의 홍덕골에 있었는데 꽃과 나무와 연못, 정자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고종 임금은 나라가 어려울 때 도와준 명나라와 장수 진린을 기념하기 위하여 북묘를 짓고 손수 북묘비의 비문을 지었으며 글씨는 민영환이 썼다.

 

임진왜란 이후 관우를 모신 사당이 생기기 시작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우러 온 명나라의 장수 진린과 병사들이 관우에 대한 신앙심이 지극하여 남대문밖에 임시 사묘를 만들고 참배하다가 1598년에 처음으로 남묘를 세웠다. 그후 1602년에는 동묘를 세우고 1883년에는 북묘, 1902년에는 서묘가 세워졌는데, 지금은 동대문 밖 동묘와 사당동 남묘만 남아 있다.

 

북묘비는 조선왕실에서 세운 석비답게 높직한 댓돌 위에 세워진 육중한 빗돌의 당당한 풍채와 간결하고 엄숙한 조형미, 그리고 또렷하고 질서있는 해서의 글씨체가 돋보이는 조선 말기의 대표적 석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