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저 발가락 좀 보소,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모산재 2012. 2. 23. 09:30

 

태안마애삼존불을 보고 이제 서울로 돌아가는길, 그냥 가기에는 아쉽다고 하여 고속도로에서 접근하기 가장 쉬운 곳을 선택한 것이 바로 안국사지입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석불과 석탑을 만나러 산 사이 그리 넓지 않은 들판을 흐르는 냇가의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갑니다. 들판이 지나고 산길로 접어들자 산 쪽으로 금방 안국사지 석불이 눈에 들어옵니다.

 

 

차를 세운 곳, 장독들이 늘어선 장관에 잠시 넉넉한 기분이 되었다가 석탑과 석불로 향합니다.

 

 

 

 

 

 

휑하게 빈 절터.

 

축대를 향해 다가서니 대부분의 몸돌이 사라진 석탑 하나와 장승처럼 서 있는 삼존석불이 환한 햇살 속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안국사지는 서산과 인접한 당진 정미면 은봉산 중턱에 있는 있습니다.

 

 

 

안국사의 창건 시기는 백제 말이라고도 하고 고려시대라고도 하는 등 분명하지 않은데, 2003년 발굴조사 때 중국 요나라 성종 때 연호인 '대평(大平)'을 사용한 석불 보존각(금당) 명문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려 현종 12~21년(1021~1030)에 해당되는 시기입니다.

 

거란이 침략하자 고려 현종은 부처님 가피로 나라를 수호하고자 대장경을 제작하였고,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 후에는 민심 안정을 안국사를 창건하고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이 때가 현종 10년(서기 1030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삼존입상을 보호하던 금당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절터와 석탑 등 일부만 남아있는데, 폐사된 절터에 1929년 절이 세워졌지만 또다시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안성 아양동이나 기솔리 미륵보다는 잘 생겼고, 중원 미륵리 미륵불보다는 추상적이고 섬세하지 못한 불상, 그럼에도 아주 편안하게 느껴지는 불상입니다.

 

오른쪽 불상은 안타깝게도 머리가 사라져버렸습니다.

 

 

 

 

 

 

 

■ 당진 안국사지 석탑 (보물 제101호)

 

 

이게 과연 보물일까 싶을 정도로 탑은 훼손이 심한 모양입니다. 오층탑으로 보이지만 지붕돌 네 개가 하나밖에 없는 1층 몸돌 위에 엉성하게 포개져 있습니다.

 

 

 

 

 

그나마 1층 몸돌에서 보물다운 격이 살짝 엿보이는데, 각 면에 불상을 새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살펴보니 불상은 3면에만 새기고 한 면은 문짝 모양을 새겼습니다. 사방불(四方佛)의 기본 형식에서 벗어난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겨 놓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층 몸돌은 지붕돌에 비해서 지나치게 왜소하여 안정감을 잃고 있습니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고 무거워 보입니다. 처마 밑으로 깊숙하게 새긴 4단의 층급받침이 밖으로 드러나는데, 지붕선이 곡선을 그리며 추녀의 반곡(反曲)이 아주 심한 편입니다.

 

 

 

 

 

 

크고 무거운 지붕돌에 작은 몸돌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잃고 있고 조각도 형식적이어서 그다지 우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점에서 평가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오층탑 오른쪽에는 같은 형식으로 된 탑 몸돌이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지붕돌과 몸돌을 다 잃어버리고 홀로 남은 모양인데, 원래 쌍탑으로 세워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폐허의 절터에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탑까지 서 있어 쓸쓸함이 도는 풍경은 그나마 삼존석불이 있어서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제100호)

 


석불은 모두 얼굴과 신체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두 돌기둥 모양의 신체에 얼굴은 그린 듯 건너편 산을 바라보는 듯 그윽한 표정입니다.

 

 

 

 

 

지금까지 수백 년 간 이들 석불은 허리까지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작년(2011년)에 대대적으로 정비공사를 하여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주변 석축도 정비하고, 동시에 균열 부위를 접합하고 소실된 좌협시보살의 좌대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 복원되기 전 석불의 모습(출처: 문화재청)

 

 

 

 

 

석불의 높이는 본존불 491㎝, 왼쪽 협시보살 355㎝, 오른쪽 협시보살 170㎝.

 

 

 

 

 

가운데 석불은 머리에 커다란 판석으로 네모 갓을 쓰고 있습니다. 좁은 어깨 폭이 발끝까지 이어지고 두 팔은 몸에 붙여 새겨져 빈약하여 몸 전체가 기둥처럼 단순화된 모습입니다.

 

 

 

 

 

네모에 가까운 크고 넓적한 얼굴에는 반원형 선으로 새긴 눈썹, 일직선에 가까운 눈, 납작한 코, 앞으로 내밀어 오므린 작은 입술, 어깨까지 닿은 귀 등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표정이 다소 엄숙한 편입니다.

 

오른손은 팔을 굽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 앞에 놓아 각각 가운데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에 붙인 수인으로 아미타불의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보기

※ 아미타 9품인

 

극락에 왕생하는 중생들의 성품은 모두 다르다. 이에 따라 아미타불이 알맞은 설법을 위해 중생들을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눈 뒤 이들 3등급을 다시 3분하여 모두 9등급으로 나눈 것을 구품(九品)이라 한다. 각 단계에 맞게 설법해야 모두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품을 아미타불의 수인(手印 : 무드라)에 적용한 것이 구품정인이다. 묘관찰정인(妙觀察定印)·아미타구품인이라고도 한다. 먼저 엄지와 맞닿은 손가락이 검지냐 중지냐 아니면 약지냐에 따라서 상중하 삼품으로 나뉘는데, 엄지와 둘째 손가락이 서로 맞대고 있을 때에는 상품이고, 엄지가 셋째 손가락과 맞대고 있을 때에는 중품, 그리고 엄지와 넷째 손가락이 닿아 있을 때에는 하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은 상생인(上生印) 중생인(中生印) 하생인(下生印)으로 나뉜다. 두 손을 포개어 배꼽 아래에 두었느냐, 가슴높이에서 대칭되게 비스듬히 들었느냐, 아니면 한 손은 들어 올리고 한 손은 배꼽 근처에 두었느냐에 따라서 3생을 나눈다.

이 중에서 상품상생인은 좌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반면에 입상에서는 상품 하생인이 일반적이다.

아미타 구품의 수인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상품인(上品印 ) : 선정인(禪定印)과 동일한 형태이다.
① 상품상생인 - 무릎 위 단전 아래에 먼저 왼손을 놓고 그 위에 오른손을 포개 놓은 다음 집게손가락을 구부려서 엄지의 끝을 마주 대어 집게손가락이 서로 닿게 한다. 자비심이 높아 죽는 순간 극락 세계의 불보살이 맞이하여 극락에서 가장 좋은 곳을 말한다.
② 상품중생인 - 상품상생인의 모양에서 중지를 구부려 엄지에 댄다. 대승경전의 깊은 이치를 모두 깨닫고 인과의 윤회를 알아 수행하고 정진한 자가 태어나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③ 상품하생인- 역시 상품상생인의 모습에서 무명지를 구부려 엄지에 댄다. 인과의 도리를 믿어 성불하겠다는 신심으로 수행한자가 태어나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중품인(中品印) : 두 손을 가슴 앞까지 들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다.
④ 중품상생인 - 이 때 두 손의 집게손가락을 엄지와 마주댄다. 5계와 8계를 지키고 선을 수행한 자가 태어나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⑤ 중품중생인 - 장지를 엄지에 댄다. 불교의 계율을 지키고 열심히 수행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⑥ 중품하생인 - 약지를 엄지에 마주댄다. 10악을 저지르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덕행을 쌓은 사람이 태어나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하품인(下品印) : 중품인과 같은 요령으로 한다. 단 왼손이 아래로 향한다.
⑦ 하품상생인 - 악을 곧바로 참회하고 공덕을 쌓은 사람이 스님의 염불공덕으로 태어날 수 있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⑧ 하품중생인 -  5계나 10계를 범하였으나 바로 뉘우치고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스님의 염불공덕으로 태어날 수 있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⑨ 하품하생인 - 많은 죄를 지었으나 늦게나마 참회하고 불심을 가진 사람이 스님의 염불공덕으로 태어날수 있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아미타불의 수인은 다양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아미타정인, 즉 선정인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 3품 3생의 기준이 뒤바뀌어 설명되기도 하여  (    )와 같이 보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있다.

 

 

 

두 협시보살도 본존불과 같은 양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른쪽 보살은 머리에 높고 둥근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는데, 몸에 비하여 큰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술 등이 묘사되어 있고 턱은 둥글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본존불에 비히여 훨씬 부드러운 모습입니다.

 

 

 

 

 

 

이제 시선을 불상의 밑부분으로 돌려 봅니다.

 

본존불의 저 발가락을 좀 보실까요. 긴장을 했는지 다섯 개의 발가락을 잔뜩 오무린 채 힘주어 구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발 밑에는 연꽃무늬를 형식화한 선으로만 새긴 대좌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머리 없는 보살상의 발가락은 또 어떤가요. 신체 대비해서 작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본존불에 비해서 많이 작습니다. 그런데 이 발가락이 새겨진 좌대는 복원하면서 만든 것이라는 것, 석재의 상태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안국사지 삼존석불입상은 발가락까지 새겨 놓은 고려시대의 석불 입상으로 아주 드물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상의 형태는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던 양식으로서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6호)이나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극도로 형식화되고 제작 기술이 쇠퇴한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서 고려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안국사지 석조여래 삼존 입상

 

 

 

 

 

 

 

 

 

 

삼존석불 바로 뒤에는 또 하나의 문화재가 놓여 있습니다.

 

 

 

 

 

 

 

■ 당진 안국사지 매향암각(埋香岩刻)(충청남도 기념물 제163호)

 

 

매향암각(埋香岩刻)이라는 이름의 이 문화재는 글이 새겨진 긴 자연석 통바위입니다.

 

바위의 형태가 배 모양 같다 하여 '배바위'라고도 하고 고래 모양이라 하여 '고래바위'라고도 하며, 베를 짤 때 쓰는 북 모양이라 하여 '북바위'로도 불리는 이 바위는 높이 2.93m, 길이 13.35m, 폭 2.5m의 크고 긴 바위입니다.

 

 

 

 

 

그러니까 이 바위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매향 의식을 기록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전국에서 발견된 매향 관련 명문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자료로 조성 시기를 달리하는 2건의 매향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매향(埋香)은 부처님께 바치는 최고의 공덕인 향을 땅에 묻어 미륵보살을 공양하고 도솔천의 미륵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종교의식으로 행하여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례와 행사의 연유, 시기, 장소 관련된 사람 등을 기록한 비문을 매향비라고 하는데, 매향비는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해안지역에 주로 세워져 불안한 민심을 달래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삼천포 매향암각(보물제 614호)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매향 암각을 확인하여 바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끼가 두껍게 낀 탓인지 또렷한 글씨는 보이지 않고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흔적 두 곳만 확인합니다.

 

 

 

 

 

 

글씨를 읽을 도리가 없어 문화재청 자료를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위 기록이 있습니다.

 

 

배바위 왼쪽에는 “경오이월일(庚午二月日) 여미북천구(餘美北天口) 포동제매향(浦東際埋香) 일구화주○선(一丘化主○先) 결원향도(結願香徒)”라는 명문이 있고, 배바위 오른쪽에는 “경술시월일(庚戌十月日) 이염솔서촌출포유(二鹽率西村出浦由) 목향매치(木香埋置)”라는 명문이 있다.

 

 

 

매향 암각 바위에도 고드름이 달렸습니다.

 

 

 

 

 

전각도 복원하는 모양입니다.

 

 

 

 

 

복원 공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다소 어수선한 모습인데, 행여나 삼존석불이 불편한 공간으로 정비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