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홍성 홍주아문과 안회정, 홍주읍성과 조양문

모산재 2012. 2. 20. 20:00

 

 

동료들과 남도 여행 중 보원사지 해미읍성을 거쳐 홍성에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시간, 홍성의 옛 읍성인 홍주읍성과 옛 관아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홍주아문(洪州衙門) 안에는 홍주군청 건물이 들어서 있어 아쉬움이 크다. 관아인 동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문은 관아의 정문이란 뜻일 터. 홍주목사가 집무를 하던 관아인 안회당(安懷堂)의 외삼문이다.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이 성의 동문인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같이 세운 것으로 규모는 5칸이다.

 

홍주아문 안에는 10칸 반 규모인 내삼문과 남과 북으로 행랑을 이어서 지어 담장을 대신했던 큰 건물이 있었는데, 3·1 운동 당시 홍성의 만세사건을 진압시키기 위해 진주한 일본군이 홍성군청을 병영으로 삼고 군수를 추방하는 한편 내삼문을 헐어버렸고 오직 외삼문인 홍주아문만 보존된 것이다.

 

 

홍주아문(洪州衙門)은 우리 나라의 아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라 한다. 현판의 글씨는 원래 흥선대원군의 것이라고 하는데 6.25 전후에 사라지고, 현존하는 현판은 광천에 살았던 중국인이 쓴 것이라고 한다.

 

 

군청 안마당에는 고려 공민왕 때 심었다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름하여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600년을 넘어 700살에 가까운 노거수는 군청건물도 홍주아문도 초라해 보일 만큼 당당한 위엄을 뽐내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관아가 사라진 줄만 알았는데, 동헌인 '안회당(安懷堂)'은 '여하정(餘何亭)'이란 정자와 함께 군청 뒤쪽에 자리잡고 있다.

 

 

안회당(安懷堂)

 

 

 

 

안회당은 정면 7칸에 전체 22칸인 긴 건물로 오른쪽에는 누마루가 한 칸 튀어나와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양쪽으로 방이 있는데 홍성의 여러 유물유적 사진이나 책을 진열해 놓아 사료전시실로 쓰고 있다. 소박한 아름다움과 함께 늠름한 모습을 보인다.

 

'안회당(安懷堂)'이란 당호는 논어 공야장편(公冶長篇)의 "老子安之 朋友信之 小者懷之(노인을 평안히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어린 사람을 품어야 한다.)"란 구절에서 유래된 것으로 노인들과 젊은 사람 모두를 위해 정사를 펼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편액은 원래 대원군이 썼다고 하는데 사라지고 지금은 집자한 편액이 걸려있다. 전면 7칸의 목조 기와집인 안회당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동헌(東軒)'이란 편액을 붙이지 않은 건물이라고도 한다.

 

 

안회당 뒤에는 후원으로 아름다운 연못 가운데 '여하정(餘何亭)'이란 정자가 있다.

 

 

 

 

 

고종 33년(1896)에 목사 이승우가 연못가에 세운 육모 지붕 정자이다.

 

 

 

 

 

■ 홍주읍성 (사적 제231호)

 

군청 맞은편 작은 구릉을 이룬 성으로 지금은 홍주성역사공원으로 단장되어 있다.

 

원래 성곽 길이는 1,772m 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810m 정도만 남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고 성곽을 허무는 것을 읍민들이 강경하게 반대하여 이만큼이나마 남은 것이다.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때(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라고 하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역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홍주성 수성비>

 

순조 때(1824) 홍주성을 보수하고 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

 

 

 

 

 

 

<병오항일의병기념비>

 

1905년 을사늑약 후 1906년 병오년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농민과 유생이 의병을 조직하여 예산에서 출발하여 부여를 거쳐 홍주성을 공격하여 탈환했으나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에 패퇴하여 수백여 명이 전사하였다.

 

 

 

 

 

 

1870년에 목사 한응필이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서문인 경의문(景義門), 북문인 망화문(望華門)과 관영(官營)을 지었다. 다른 성들과는 달리 남문은 문루가 없는 점이 특이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여 지금은 동문인 조양문만 남았다.

 

 

북문에서는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를 처형하였으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에는 잡혀온 농민군 수백 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조양문(朝陽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문루는 규모는 작아도 숭례문이나 수원화성의 팔달문을 연상시킬 정도로 당당하다. 원래 옹성이 있었으나 일제 때 사라졌다고 한다.

 

 

 

<홍주의사총>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병오년) 홍주지역의 전 이조참판 민종식이 의병을 조직하여 5월 19일에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일본군이 의병군을 공격하여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대교리 일대의 냇가와 남산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1949년 이 부근에서 많은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병오 항일의병시 전사한 의병군의 유골이 임시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어 유골을 모아 합장하여 구백의총(九百義塚)이란 불려 왔는데,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이 바뀌어 매년 5월30일에 순국의사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충남>

 

 

 

 

 

※ 내포의 가장 큰 고을이었던 홍성

밀물 때면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다가 썰물 때면 빠지는 지역을 사람들은‘내포(內浦)’라고 불렀다. 밀물 때가 아니면 배가 뜨지 못하는 서산·당진·해미·면천·태안·덕산·대흥·홍성·보령·결성 등 10 고을이 내포인데, 조선중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 1690~1756)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고을을 내포라고 하며, 이곳은 가야산의 서쪽에 큰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는 경기도와 바다를 사이로 고을이 마주하며 바닷물이 내륙까지 깊숙이 들어온 지형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고 한 것과 그 설명이 대체로 비슷하다.

내포에서 가장 큰 고을이던 홍성은 1904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충청지방의 중심축이 공주·홍주에서 신흥도시 천안·대전으로 이동되면서 급속도로 쇠퇴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속현이던 보령은 물론 서산시, 당진에게 그 옛날 자신이 누렸던 지위와 역할까지 빼앗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