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가장 오래된 백제 마애불, 태안마애삼존불입상

모산재 2012. 2. 21. 01:17

 

홍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김좌진 장군 동상 맞은편 거리의 어느 식당에서 소고기국밥으로 늦은 아침식사를 한 다음 태안마애삼존불을 향해 출발합니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서산마애삼존불에 앞선 양식이면서 여러 모로 다른 특징을 가진 불상입니다.

 

몇 년 전 찾았을 때 마모가 심한 불상이 볼 게 없다 싶어 대충 보아 넘겼는데, 나중 국보로 승격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 장중하고 화려한 태을암(太乙庵) 대웅전

 

603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다 태안읍 북쪽에서 백화산(白華山) 길로 접어들어 급비탈을 올라서니 태을암(太乙庵)이라는 절이 나타납니다.

 

백화산은 태안읍내를 품에 안고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산입니다.

 

 

 

 

 

태을암 대웅전이 나타나고, 그 오른쪽 산언덕에 희미하게 전각 지붕이 보이는데, 그곳에 태안마애삼존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기와지붕인데도 날타로운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태을암은 태안8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백화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수덕사의 말사입니다.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고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다 최근에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가공이 잘된 4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원형초석과 원형기둥을 세워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모습이 중후하면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상과 작은 크기의 150 여래불상, 후불탱화·칠성탱화·신중탱화·산신탱화 등의 불화, 그리고 동종이 있다고 합니다.

 

 

 

 

 

태을암이라는 사찰 이름은 동북쪽 400m 지점에 단군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태일전(太一殿)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태일(太一)은 태을(太乙)과 같은 뜻으로 천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매년 상원(上元)에 임금께서 향을 내리시어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어 왕조 차원에서 단군을 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성 성종 때(1479년) 경북 의성에 있던 단군 영정을 이곳으로 이안하였는데, 여말 선초 극심했던 왜구의 출몰로 폐군까지 되었던 태안의 민생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국조신을 모신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태일전은 사라지고 터만이 남아 있는데, 태을암이란 절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군은 환인과 환웅, 그리고 용왕과 산신과 함께 대웅전 아래 삼성각에 모셔져 있습니다.

 

 

새로 지은 불전이지만 건물과 문양, 그림들이 아름다워 한동안 살펴보았습니다.

 

 

 

대웅전 현판. 편액에는 한석봉(韓石奉)이라 되어 있으나 석봉의 글씨와는 거리가 있다.

 

 

 

 

 

 

화려한 꽃창살문

 

 

 

 

 

 

 

주두와 공포, 도리 부근의 화려한 단청 무늬와 그림

 

 

 

 

 

 

섬세하고 화려한 벽화

 

 

 

 

 

 

대웅전 앞마당을 지나 태안마애삼존불을 모신 보호각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보입니다.

 

 

 

 

 

 

■ 유블선의 혼합공간, 태을동천'(太乙洞天)

 

계단을 오르면 마애삼존불상 보호각 앞 계곡 곁에 '태을동천'(太乙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큰 바위벽면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일소계'(一笑溪)라고 씌어진 바위와 빗돌도 보입니다.

 

 

 

태을동천이라 새긴 바위 위 암반에는  바둑판을 새겨 놓았다.

 

 

 

 

 

절집과 마애불이 있는 자리에 나타나는 낯선 풍경이 여행자를 잠시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태을암이 단군을 모시던 태일전과 연관을 가졌듯 '태을동천'도 천제, 또는 단군과 연관을 가진 공간것이라고 생각하면 혼란이 정리될 듯합니다.

 

 

'태을동천'이라는 글씨를 쓴 이는 김해김씨 김규황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태을(太乙)'은 '태일(太一)'이라고도 하며, 중국 철학에서 천지만물이 나고 이루어진 근원, 곧 우주의 본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태을'은 또한 천제가 머물며 병란, 재화, 생사 따위를 맡아 다스린다는 북극성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천여 년 전 중국 금나라 때 태을교라는 종교가 위세를 떨쳤는데 이는 도교의 일파였으며, 근세 증산 강일순을 교조로 하는 증산교(흠치교)도 태을교라 일컫기도 하였습니다. '동천(洞天)'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니, 이렇게 보면 태을동천은 일단 도교와 관련된 유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왼쪽 축대 위에 '감모대(感慕臺)'라는 글씨가 새겨진 독특한 석조물이 놓여 있어 눈길을 끕니다.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 모양인데, 선인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라고도 하고 부임하는 관리들을 맞이하던 곳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감모(感慕)'가 '조상을 사무치게 그리워하여 기린다'는 뜻을 새겨 태을동천의 주인이 선조의 음덕을 기리고 위로하기 위한 장소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 어떤 설도 확실한 근거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마애불 앞 계류를 막은 연못공간과 감모대, 바위 위에 새겨진 바둑판 등으로 볼 때 조선 후기 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도가적 문화현상이 아닐까, 더 넓히면 유불선 합일을 지향하고자 하던 사상이 바탕이 된 공간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이제 마애불을 만나볼 차례입니다.

 

 

 

 

■ 백제 최고의 불상,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국보 제307호)

 

전각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오른쪽 도로 석축 아래에 '감모대'도 보이는군요.

 

 

 

 

 

태안마애삼존불은 1966년에 보물 제432호로 지정되었던 것이 2004년에 국보 제307호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첫눈에도 세 불보살상은 오랜 세월의 훼손과 풍화 탓으로 얼굴과 전체 윤곽이 뭉개져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서산마애여래삼존상에 앞서는 조형양식을 지닌 백제의 가장 오랜 마애불상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특히 가운데에 보살입상을 세우고 좌우로 커다란 여래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중앙에 본존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형식을 벗어난 파격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유일한 것이라 합니다.

 

불상의 높이는 왼쪽 여래상 2.96m, 오른쪽 여래상 3.06m, 가운데 보살 2.23m

 

이 불상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문명대 교수는 현세의 석가불과 과거의 다보불을 양쪽에 두고 그 사이에 미륵보살을 둔 삼존불을 이룬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여 1보살 2여래설을 뒤집기도 하였습니다.

 

 

 

 

 

대좌 부분은 근래에 이르기까지 바위 전체의 안정성 때문에 줄곧 땅에 묻힌 채로 있었는데, 1995년 무렵 보강 조치를 하고 흙을 제거하면서 삼존상 모두 날카로운 홑잎 연꽃잎무늬로 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백제 연꽃무늬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양쪽의 여래입상은 머리부분은 거의 환조에 가깝고 상체는 높은 돋을새김인데, 이는 서산마애삼존불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조각 기법으로 양감 풍부한 얼굴, 직사각형의 얼굴에 어깨에 닿는 커다란 귀, 넓게 벌어진 당당한 어깨, 장대한 체구를 새김으로써 강건한 인상을 줍니다. 이런 점은 중국의 북제(北齊) 내지 수(隋)나라 불상의 장대한 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하체로 내려갈수록 돋을새김의 정도는 다소 약해지고 있습니다.

 

두 여래상 사이에 작게 새겨진 보살입상은 두 여래와 달리 돋을새김이 약해 선이 여성적으로 부드럽고 양감이 적어 서산마애불의 조각기법을 떠올리게 합니다. 삼산관을 쓴 원만하고 통통한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두 여래상은 오른손은 '두려워 마라'고 하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습니다. 서산매애삼좁불처럼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으며 통견(通肩)의 법의도 두껍고 힘 있게 처리되었으며, 앞자락이나 두 팔에 걸쳐 내린 옷자락도 묵직하게 표현되어 부처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보살상은 배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보주를 감싸 쥔 봉보주인(捧寶珠印)을 하고 있습니다. 어깨를 덮어 내린 천의는 무릎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며 묵중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이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 위에는 목조 전실을 위한 조성 당시의 시설공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일종의 석굴사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해가 내려다 보이는 백화산 기슭, 중국과 교류하던 관문이었던 태안반도에 위치하여 북위 말 이래 중국 산둥 지역에서 유행하던 마애석굴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건한 얼굴, 당당한 신체와 묵중한 법의 등이 6세기 후반이나 7세기 초의 백제 불상 양식으로 보입니다.

 

 

복을 비는 마음일까요. 마애불 뒤 암벽에는 많은 동전들이 붙어 있어 눈길을 끕니다.

 

 

 

 

 

다시 태을암 입구로 돌아오니 길 아래 쪽 능선에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가 눈에 띕니다.

 

'백조암'이란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백조를 닮은 것 같지는 않고... 그 유래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백화산의 정상은 284m, 작고 아담한 산이지만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은 충청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절경을 자랑합니다.

 

금북정맥의 능선이 서쪽으로 팔봉산(326m)을 이루고 다시 산줄기가 이어져 서해를 앞둔 태안에서 백화산으로 솟았는데,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최고의 경관이라고 합니다.

 

 

 

 

 


 

 

 

※ 태안마애삼존불입상 크게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