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서산 (6) 해미읍성의 쓸쓸한 동헌과 내아, 그리고 객사

모산재 2012. 2. 20. 19:39

 

하얀 눈이 덮고 있는 넓은 마당 너머로 보이는 동헌과 객사가 외로워 보입니다. 주변에 민가와 저자거리가 있다면 얼마나 훈훈한 느낌이 들까요.

 

푸른 하늘과 흰 땅의 경계에 갇혀 있는 인간의 영역은 이처럼 쓸쓸한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동헌으로 들어서는 문루 뒤, 언덕 위에는 청허정이라는 정자의 지붕만 살짝 보입니다.

 

저 자리엔 장군당이란 신당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없애버리고 신사를 세웠던 것을 지금은 정자가 세워져서 해미읍을 내려다보는 전망소가 되었습니다.

 

 

 

동편에서 바라본 동헌과 주산쪽 언덕의 풍경입니다.

 

 

 

 

 

옥사 옆에서 바라본 동헌과 객사 풍경입니다.

 

 

 

 

■ 해미읍성 객사, 지성관(枳城館)

 

해미읍성의 객사는 동헌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1981년 발굴조사를 통하여 객사터를 발견하고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중앙 정청과 날개채로 되어 있는 일반적인 객사와는 달리 7칸 팔작지붕집으로 지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객사 본채와 부속채를 포함한 면적이 105 평 가량이었고, 객사의 정청() 좌우로 동익헌과 서익헌이 있었으며, 건물 주위에 막담이 둘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탱자나무로 목책을 두른 객관'이라는 뜻으로 지성관(枳城館)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 해미읍성 외삼문(外三門)

 

해미읍성 외삼문은 호서좌영장을 겸직한 해미현감이 정사를 보던 동헌으로 들어가는 정문입니다.

 

효종 3년(1652) 해미에 있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청주로 이설한 후 해미읍성에는 충청도 5개 병영 중 하나였던 호서좌영을 설치하고, 반양리에 있던 해미동헌을 옮겨왔다고 합니다.

 

서산 관아문을 모방하여 복원한 2층 문루 형식으로 원래 읍해루()라 하였으나 1970년대에 복원한 후 호서좌영(西)이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합니다. 

 

 

 

 

■ 해미읍성 동헌()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 겸 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 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이 행하여지던 곳입니다. 이곳 영장은 12개 군현의 병무 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동헌 왼쪽 뒤편에는 관아의 물품을 관리하고 출납을 맡아보던 관리들(고자)의 집무실인 고자실(庫子室)이 있고,

 

동헌 바로 뒤에는 현감 겸 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자제를 가르치던 책실(冊室)이 보입니다. 

 

 

 

 

 

■ 해미읍성 내아(內衙)

 

내아는 관리와 가족들의 살림집으로 동헌() 서쪽 담장 안에 자리잡고있으며 협문을 통하여 들어섭니다. 

 

1981년 발굴조사를 하고, 2000년 11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옛 문헌에 따라 내아의 면적 12 평 가량이고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로 복원한 모습입니다. 가운데 세 칸은 마루를 둔 방을 들였고, 맨 왼쪽에는 부엌을 들였으며, 맨 오른쪽에는 통방을 두고 사분합문을 달아 사랑채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앞마당 끝에는 살림살이를 출납하는 부속채를 두었습니다.

 

서쪽 마당에서 바라본 내아와 동헌, 그리고 객사 건물 일부

 

 

객사 앞에는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달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대보름달이 동산 위에 떠오르면 불을 지르고 달을 향해 절을 하며 소원을 빌고 농악 한판을 벌였던 민속몰이가 바로 달집 태우기였습니다. 

 

 

 

달집도 지방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른 듯. 영남 지방에서는 가지와 잎을 단 대나무들을 달집 가운데에 세우고 그곳에 마을에서 날렸던 모든 연들을 매달았는데... 이곳의 달집은 퍽 단순한 모양입니다.

 

달집 태우기 행사 때 쓸 물품들을 망태기 속에 넣어 둔 모습입니다.

 

 

 

해미읍성을 나오기 전, 객사 앞 마당에 서서 해미읍성의 서문을 담아 봅니다.

 

 

 

동문과 함께 1974년 복원된 서문의 이름은 지성루(枳城樓)입니다. 해미읍성의 별칭인 '탱자나무성'의 누각이란 뜻이지요. 바로 저 서문 밖은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자리개질을 당하며 죽어간 장소입니다.

 

 

복원한 동헌과 객사, 그리고 민가들을 돌아보아도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현상일 것입니다. 해미읍성을 돌아보고도 끝까지 뇌리에 남아 있는 영상은 호야나무, 비극의 역사가 남긴 상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