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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5) 천주교도 학살의 비극이 서려 있는 해미읍성

모산재 2012. 2. 20. 18:11

 

보원사지를 둘러본 다음 해미읍성으로 향합니다.

 

해미읍성 앞에 도착하니 이미 점심 때가 지나고 있습니다.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를 돌아보느라 추위에 떨었는데, 한기도 다스릴 겸 우선 점심부터 먹기로... 읍성 앞 식당에서 소머리국밥에 가볍게 소주 한잔씩 나눕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동쪽 성벽

 

 

 

동쪽에서 바라본 진남관 주위의 성벽 

 

 

 

고려 말부터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막기 위해 조선 초기 덕산에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을 이곳에 옮기면서 해미읍성이 축조됩니다. 

 

태종 때(1417)부터 세종 초(1421) 사이에 성을 만들었고 성종 22년(1491년)에 완성하였는데, 1652년에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까지 230여 년 동안 군사령부 역할을 하였답니다. 충무공 이순신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곳에서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하였다고 합니다.

 

 

 

성벽 위에는 군령기가 날리고 그 위 푸른 하늘에는 반달 모양의 낮달이 떠 있습니다.

 

 

 

해미읍성고창읍성(모양성)과 함께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성으로 꼽힙니다.

 

북동쪽 언덕 같은 야산에 기대고 있긴 하지만 평지성이나 다름없는 성인데, 대개의 성이 사각형의 형태이지만 해미읍성은 타원형에 가까운 자연스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성 둘레는 1.8km요 성벽의 높이는 4.9m. 성 윗부분의 너비는 2m 정도입니다.

 

동,서,남문은 격식을 갖추고 있지만 북문은 암문(暗門)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서쪽 성벽 밖에만  2m 깊이의 해자를 팠고, 성 밖에는 탱자 울타리를 둘러 헤미읍성은 탱자성(枳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그래서 지금도 서문은 '지성루(枳城樓)'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해미읍성의 남문인 진남문(鎭南門)으로 들어섭니다.

 

진남문은 해미읍성에서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동문과 서문은 구한말에 무너진 것을 1974년에 복원한 것)으로 홍예문(虹霓門: 무지개 모양의 문) 위에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문루를 세운 모습입니다.

 

 

 

홍예문 천장에는 주작을 그린 화려한 그림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너른 평지에 자리잡은 성 안의 풍경이 환하게 열립니다.

 

 

 

진남문을 들어서서 뒤돌아보면 문루 대석에 새겨진 붉은 글귀가 보입니다.

 

 

'황명홍치사년신해조(亥造)'라고 쓰인 글.

 

진남문을 '명황제 홍치 4년 신해년에 조성했다'라는 말입니다. '홍치(治)'는 명나라 효종의 치세 연호로  1488년부터 1505년까지입니다. 홍치 4년인 신해년은 1491년(성종 22)에 해당하니, 바로 이 해에 해미읍성이 완공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진남문을 들어서면 공원처럼 넓은 공터가 펼쳐지는 성내 풍경은 시원스러우면서도 사람사는 냄새가 빠진 휑한 느낌입니다.

 

 

 

일제시대에 들어서면서 해미현이 서산군에 통합되고 1914년 해미읍성은 폐지되었는데, 이 때부터 성 안에는 면사무소, 초등학교 등의 기관이 세워지고 160여 채에 이르는 민가가 들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방치되어 있던 해미읍성의 복원이 70년대에 이루어지면서 성안의 민가와 학교 등이 대거 철거됩니다. 그러자 오히려 성 안은 텅 비어 을씨년스런 풍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풍경이 좋다고도 하였습니다만, 민가를 멋지게 보존하고 있는 벌교의 낙안읍성을 생각해 본다면 크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1974년에 동문과 서문이 복원되었고, 동헌 서쪽에 객사와 내아, 그리고 옥사 등을 복원하면서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찾았다고는 해도 뭔가 휑한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진남문에서 이어지는 성내의 대로는 옥사를 지나 동헌으로 이어집니다. 멀리 길 끝에 동헌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돌담에 둘러싸인 옥사가 보입니다.

 

 

 

그 길 한켠에는 다연발 로켓인 신기전을 비롯하여 대포, 천자총통, 불랑기(佛郞機) 등의 화포를 전시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옥사(獄舍).

 

150여 년 전, 1천여 명의 산 목숨이 고문 받고 처형 당한 비극의 역사 현장입니다.

 

 

 

사람들이 '호야나무'라고 부르는 이 나무는 수령 300년쯤 되는 해미읍성 회화나무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 1868년 무진박해 때 이곳으로 끌려온 천주교인들은 바로 이 회화나무에 머리채를 철사줄에 묶여 매달린 채 포졸들이 활을 쏘거나 매질을 하는 고문 속에 고통스럽게 죽어갔다고 합니다. (서문 밖 돌다리 위에서 포졸들이 생사람 팔다리를 들어서 돌에 태질해서 죽이는 자리개질로 죽기도 하였고, 해미천 진흙 둠벙에서 생매장해서 죽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1천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지금도 나무 줄기에는 철삿줄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동쪽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폭풍으로 부러졌으며 이후 줄기가 썩어가자 외과 수술을 하였으며, 주변에는 후계목 네 그루를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로 제 17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대학살의 비극이 깃들여 있는 회화나무를 바라보며 나희덕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해질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돋힌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 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 나오며
단 한 번만 회화나무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회화나무를 한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회화나무 뒤에는 바로 비극의 주인공들이 감금되었던 옥사(獄舍)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담장 안에는 두 채의 기와지붕 옥사가 있습니다. 당시의 옥사도 이렇게 아담한 돌담에 정갈한 한옥으로 되어 있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마당에는 죄인을 곤장치던 형구, 장판(杖板)도 놓여 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지속적인 박해 동안에 이곳 두 채의 큰 감옥에는 내포지역에서 한티고개를 넘어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로 늘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에는 두 손목에수갑인을 찬 천주교인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1866년 병인양요,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후 더욱 심해진다.

 

감옥에 갇혀 있던 많은 천주학 죄인들은 서문 밖에 끌려 나가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자리개질 등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서문 밖은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 내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고 간편하게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들판에 큰 구덩이를 만들어 십수 명씩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버리거나 개울 둠벙에 꽁꽁 묶어 빠뜨려 죽였다. 사람들은 '예수 마리아"를 외며 죽어간 곳은 '여숫골'로 불리었고 그곳에는 현재 '여숫골 천주교 순교성지'가 들어서 있다.

 

숨진 천주교인들은 하나같이 이름을 남기지 못했는데, 이들은 변변치 못한 서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해미의 영장은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책 받을 우려가 있는 신분의 사람들은 홍주(지금의 홍성)나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시켰으며, 배후를 갖지 못한 서민층 신자들은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모두 여섯 군데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옥사 앞에 있습니다.

 

우물 뒤편으로 재현해 놓은 아전과 상인, 그리고 부농의 집이 보입니다.

 

 

 

아전인 서리의 집은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를 마당에 두고 서 있습니다.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의 아주 단촐한 전형적인 일(一)자 형 삼칸 초가입니다. 

 

 

 

방 안에는 책과 붓이  놓여 있고 검소한 의복과 이부자리가 눈에 띕니다.

 

 

 

가마솥, 부뚜막, 살강을 볼 수 있는 재래식 부엌도 퍽 정갈한 모습입니다.

 

 

 

상인의 집은 서리의 집과 마찬가지로 일자형 몸채를 가졌는데, 광과 외양간, 측간을 들인 부속채가 한 채 더 딸려 있는 점이 다릅니다.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광의 모습을 담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문 가까운 쪽에는 부농의 집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깨어서 쌓은 지나치게 커다란 돌이 눈에 거슬리는 점을 빼면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몸채는 ㄱ자형으로 집 칸수가 늘어나 있습니다.

 

 

 

요즘 보기 쉽지 않은 베틀을 담아 보았습니다. 여인들은 이 베틀에 앉아 북을 넣고 바디를 당기며 겨울 기나긴 밤을 보내었지요.

 

 

 

저렇게 장작을 가득 쌓아놓고 있으면 오늘 같은 한파가 몰려오는 겨울도 따뜻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민가를 복원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긴 해도 마네킹처럼 사람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으니 아쉬움이 큽니다. 이 자리에 있던 민가를 살리는 방법이 없었는지...

 

 

동헌과 객사로 발길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