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서산 (3) 보원사지 당간지주, 석조

모산재 2012. 2. 17. 21:42

 

서산마애삼존불을 지나 골짜기를 따라 1km쯤 가면 보원사지(普願寺址)가 나타납니다.

 

 

좁은 골짜기를 지나자 넓은 들이 환하게 열리더니 눈밭에 서 있는 당간지주가 먼저 보이고 개울 건너 들판에 오층석탑과 부도와 부도비가 한눈에 들어오며 이곳이 대가람 터였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들판을 가득채웠을 전각들이 불타 사라지고 승려들도 저자거리도 사라진 자리, 몇 되지 않는 석조 유물만 서 있으니 풍경은 휑하기 작이 없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보원마을이 있었다는데, 삼화목장이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떠나고 마을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맞은편에 보이는 산은 상왕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로 바로 너머엔 개심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보원사는 조선시대에는 '강당사(講堂寺)'라고도 불렸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이 골짜기는 '강댕이골'이라 불려왔습니다. 또 '고란사'라고 불리기도 했다는데, 근처에는 고란사란 작은 절이 있기도 합니다. 

 

백제시대 이래의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보원사는 그 역사와 유래를 알 수 있는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이렇게 땅속에 묻혀서 잊혀져 온 절입니다.  

 

다만 통일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가 화엄 10찰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 창건된 화엄사찰로 학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절터 입구에는 보원사터 발굴조사 현황과 유구 현황, 그리고 유물에 대한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보원사지는 지리적 위치나 부근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 등과 관련하여 창건 시기가 백제시대가 아닐까 추정하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해 2006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건물지의 규모나 가람배치 양식 등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기와붙이와 자기류 등 160여 점도 출토됐으나 이 역시 모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다만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금동여래래입상 한 점이 출토되었는데 6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백제시대 창건설의 가능성을 두고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발굴작업은 2017년까지 진행될 것이라 합니다.

 

 

 

가람 배치는아래 유구현황도에 보이는 것처럼 석교(石橋)를 지나 중문, 석등, 석탑, 금당, 강당과 승탑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금당과 강당 좌우로 회랑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드러난  건물터도 워낙 방대하지만, 건너편에 보이는 법인국사보승탑비에도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고려 전기의 보원사는 대단한 규모의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보원사가 사라진 시기는 조선 중기로 보입니다. 산 너머에 있는 개심사(654년,백제 의자왕 14년 창건)에는 보원사에서 1560 년께에 제작한 경판이 전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보원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로 보입니다. 

 

당간지주-오층석탑-법인국사부도탑과 탑비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층탑 뒷편으로 개심사로 이어지는 '서산아라메길'이 보인다. 

 

 

보원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당간 지주는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다는 당간이라는 깃대를 지탱해 주는 돌기둥.

 

화려한 장식은 없으나 바깥면 가장자리에 넓은 띠를 도톰하게 새겼습니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살짝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습니다.

 

 

 

양식과 조각 수법이 비교적 섬세하고 정교한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봅니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 보원사지 석조 보물 제102호

 

석조는 절에서 물을 담아 두던 돌그릇입니다. 이 석조는 화강암 통돌을 직사각형으로 파서 만들었는데,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큽니다.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으며 내부 한쪽에 원형 배수구를 뚫어 놓았습니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칠게 다듬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조각 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커주 커다란 것이 당시 사찰 규모가 어떠한지 짐작케 합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석조 형식을 따랐다고 합니다.

 

 

 

석조 곁에 서니 자연 개울 건너편으로 오층석탑과 법인국사 부도탑과 탑비가 눈에 들어옵니다.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 개울을 건너 오층석탑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