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서산 (2) 천년 세월 너머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 이야기

모산재 2012. 2. 16. 00:34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 계곡,

 

서산마애불 앞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뼈를 쑤시는 듯한 한기가 자켓 속으로 파고듭니다. 조금 걷자 손가락이 얼어버렸는지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지독한 한파입니다.

 

10년도 훌쩍 지나 또다시 '백제의 미소'를 만난다는 설레임은 55년만의 한파도 거뜬히 이깁니다. 다리를 동동 구르며 종종걸음으로 '보원사지 1km'라는 안내판을 보며 계곡을 건너는 다리로 접어듭니다.

 

마애불은 다리 건너 왼쪽 산 층암절벽의 큰 바위에 숨어 있다 속세의 인간들이 찾아오면 바위 밖으로 살짝 몸을 내밀고 알듯말듯 신비로운 미소로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다리를 건너니 관리소로 오르는 가파른 돌층계가 한동안 이어집니다.

 

이 추운 날씨에 무슨 여행객이 있을까 싶은데, 꼬마들과 함께온 가족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관리소 건물

 

 

 

그리고 그 곁의 불이문을 지나

 

 

 

바위 벼랑을 돌아서면 바로 마애불이 거하는 인바위(印岩)가 나타납니다. 사람이 나타난 줄 알고 벌써 부처님이 바위 밖으로 살짝 몸을 내민 모습이 멀리서도 보입니다.

 

마애불 아래에는 튼튼하게 3단 석축을 쌓아올려 마당을 만들었고, 불상 위로는 바위가 처마처럼 튀어나와 있어 부처님이 비바람을 흠뻑 맞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오전 반나절 정도 지난 시간, 햇살 속에 모습을 드러난 세 부처님 앞에 서는 순간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경주 남산에서 만난 부처님 이후 이처럼 전율을 느끼기는 처음입니다. 

 

 

 

"잘 왔어요~"라는 말 대신에 부처님의 부드러운 얼굴에는 싱글벙글 유쾌하면서도 자비로운 미소가 번집니다. 

 

마애불의 미소는 아침 저녁으로 그 모습이 다르다고 합니다. 아침햇살에 드러나는 미소는 밝고 평화로우며, 황혼에 보이는 미소는 은은하고 자비롭다고 합니다.

 

1천 4백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결같이 보내는 밝고 온화한 미소, 그것이 바로 고해를 건너는 중생들을 위한 부처님의 자비일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가슴에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으로 들고 있는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대고 싶어집니다. 부처님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질 듯합니다.  

 

 

 

 

이 바위에 부처님이 처음 거하게 된 시기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쯤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무왕 재위 초기인 602년을 전후한 시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 원만하고 통통한 얼굴 윤곽선, 세련된 옷주름, 쾌활한 인상 등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온화한 미소는 동북 아시아 불상의 뚜렷한 특징이었습니다. 미소는 절대자(또는 왕)의 친절성과 자비의 상징인데, 그러나 7세기가 지나면서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절대자의 근엄성이 강조된 불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부처님들은 삼세불(三世佛)로 가운데에 석가여래가, 양쪽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현세불이고, 미륵보살은 미래불이며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입니다. (제화갈라보살은 연등불이 부처가 되기 전의 이름으로 석가가 과거세에 선혜라는 이름으로 수행할 때 머리카락을 풀어 진흙을 밟지 않도록 했으며 석가가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내려준 보살입니다.)  

 

 

 

 

이제 삼존불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 위에 서 있는 석가여래 입상은 중후한 체구에

둥글고 풍만한 얼굴을 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다. 눈썹은 반원형이고 눈은 살구씨 모양으로 뜨고 있는데 싱글벙글 웃음이 넘치는 눈빛이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을 표현한 삼도(三道)가 없는 점이 눈에 띈다. 법의는 발등까지 내려와 있으며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수인은 통인(通印)이다. 오른손을 들어 '두려워말라'는 뜻의 시무외인(施無畏印), 오른손은 내려 '소원을 들어 주리라'는 여원인(與願印)이 짝을 이루고 있다.

 

왼손 끝 두 손가락을 살며시 구부리고 있어 더욱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오른쪽 제화갈라보살 입상은 연꽃대좌 위에 서서 머리에 삼산관(三山冠)을 썼으며 살짝 긴 얼굴에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가운데 연꽃이 새겨져 있고 불꽃무늬는 없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법의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늘어져 있다.

 

두 손은 앞으로 모아 보주를 잡고 있는데, 두 팔에 걸친 천의(天衣)가 길게 늘어져 앞면에서 U자형의 주름을 이루고 있다.

 

보주를 든 보살입상은 중국 남조 지역의 불상과 비슷한 형태로 백제와 중국 남조 사이에 문화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은 삼산관을 쓴 미륵반가상으로 둥글고 통통한 얼굴이 아기처럼 귀엽다. 눈과  입가에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득 번지고 있다. 연꽃 대좌 위에 앉았고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왼쪽 무릎 위에 올린 오른쪽 다리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쪽 무픞 위에 팔꿈치를 고이고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상반신은 벗고 목에는 간단한 목걸이 장식이 있다. 옷주름은 간략하게 표현되었는데, 옆으로 넓게 퍼져서 발등까지 내려와 있다.

 

 

 

 

 

 

 

 

 

 

 

 

 

 

 

 

 

 

 

 

 

 

 

 

 

 

서산미륵마애불은 우리나라의 마애불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뛰어난 작품이지만 1959년에야 발견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가야산 용현계곡 깊숙한 산속, 인바위(印岩)에 새겨져 있던 마애불을 세상에 알린 것은 홍사준 선생입니다. 1959년 4월 부여박물관장이던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지 유물 조사를 왔다 그 존재를 확인하였고, 이후 국보고적보존위원회에 보고되어 마침내 '서산 마애석불'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김원룡 선생의 제창으로 서산마애불은 '백제의 미소'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산 마애삼존불의 발견과 관련하여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전하고 있습니다.

 

서산 일대에 9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 스님이 100개을 채운다고 백암사(百暗寺)를 세웠다가 나머지 암자가 모두 불에 타버렸다는 전설이 있어,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 터를 조사하러 올 때마다 이 전설을 상기하여 주민들에게 산에 부처님이나 탑을 본 적이 없는가를 묻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59년 4월, 인바위 아래 골짜기에서 만난 한 노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계시는데유.. 양 옆에 본 마누라하고 작은 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 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을 볼따구에 찌르면서로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겄지 하고 약올리니까 본마누라 화가 나서리 장돌을 쥐고 쥐어 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 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주민들에게는 마애삼존불상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이 문화재로서 인식이 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마애불 맞은편 산 위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던 주민들은 건너편 봉우리에서 쉬면서 돌맹이를 던져 가운데 있는 대장(석가여래불) 맞히기로 막걸리 사는 내기를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조차 전합니다. 미륵반가사유상의 두 팔이 훼손된 것도 아마 그런 무지 속에서 일어난 불상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 서산 마애불 크게 보기 

 

 

 

 

 

 

 

 

 

 

 

 

 

 

  

 

 

※ 서산마애삼존불에 대하여

 

백제시대의 국보 제84호 불상. 본존여래상 높이 2.8m, 보살입상 높이 1.7m, 반가상 높이 1.66m. 동쪽을 향해 있는 거대한 화강암벽에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협시불 1구씩이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북조 말기인 제(齊). 주(周)나라 양식이 반영된 삼국시대 최고의 마애불로 꼽힌다.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당시는 중국사서에 수덕사의 회현이라는 스님이 평생 법화경을 독송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태안, 서산 일대에 법화 신앙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석불이 만들어진 6세기에서 7세기 초에는 여래건 보살이건 그 존명(尊名)보다도 상징적으로 간결한 도상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라 관음보살이 미륵 보살과 함께 협시를 이루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관음은 현세를 관장하는 보살로서 내세를 돌봐주는 미륵과 함께 짝을 이룬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곳 서산시 운산면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옛길의 어귀가 되는 서산마애불이 있는 지점은 산세가 유수하고 천하의 경승지여서 600년 당시 중국 불교 문화의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그 단적인 예가 서산마애삼존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