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안동 병산서원, 병산과 낙동강을 병풍으로 두른 최고의 건축미

모산재 2012. 2. 14. 13:33

7년 전 겨울,

 

하회마을을 찾았던 나는, 30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강길을 따라 병산서원으로 걸어서 간 적이 있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서 가는 길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서 출발한 것이다. 화산(花山) 중턱까지 넓은 임도로 가다가 이내 가파른 산허리로 접어드는 오솔길은 강을 바라보며 강과 함께 걷는 길이었다. 3~4km쯤 되니 걷기에 안성맞춤인 길...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까지의 그 아름다운 강길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기회가 있으면 걸어보리라 늘 마음에 두고 있지만, 그 뒤로도 두번이나 왔어도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다. 동행이 내 뜻과 같지 않음을 어찌하리오.

 

이번에도 바쁘게 다녀가는 단체 여행인지라 그러지 못하고 버스로 왔던 길을 돌아나가 병산서원으로 향하자니 아쉬움이 밀려온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의 진산인 아담한 화산(花山)에 기대어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낙동강 상류인 화천(花川)이 흐르고, 그 건너에는 병풍처럼 까마득한 절벽을 이루고 있는 병산(屛山)을 두고 있다.

 

 

 

병산을 굽어보는 병산서원의 최고 건축물인 만대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 5대 서원으로 손꼽히는 서원이다. 5대 서원은 병산서원을 비롯하여 김굉필을 모시는 현풍 도동서원, 이황을 모시는 도산서원, 안향을 모시는 풍기 소수서원, 이언적을 모시는 안강 옥산서원을 가리킨다. 

 

원래 풍산현에 있던 풍산 류씨의 풍악서당을 1572년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 지었고, 류성룡의 사후 지방 유림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여 존덕사를 세워 유성룡의 위패를 모셨는데, 나중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철종 1863년 철종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류성룡 선생의 문집 등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복례문 앞 뜰에는 부시가 기념식수했다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악의 축' 운운하며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전쟁광, 스스로 '악의 축'이 된 아들 부시가 선비 정신의 요람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게 썩 마뜩찮아 눈살을 찌푸린다.

 

 

 

복례문(復禮門)은 병산서원의 외삼문이다.

 

 

 

그런데 솟을삼문 형식으로 된 삼문은 가운데 칸만 널문으로 되어 있고, 양쪽은 문이 아닌 벽으로 막혀 있는 형식을 하고 있다. 마치 절의 천왕문처럼... 

 

'복례'는 <논어>의  "克己復禮爲仁"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이름.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는 자기 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

 

이 문은 원래 만대루 동쪽에 있었던 것을 나중에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애초에는 병산의 험한 형세를 피하고자 동쪽에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복례문을 지나면 언덕을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그 위에 시원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문루 만대루(晩對樓)가 자리하고 있다.

 

 

 

만대루를 지나 또 하나의 계단을 올라서면 비로소 강학 공간인 입교당(立敎堂)이 모습을 드러낸다.

 

 

 

입교당(立敎堂)은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으로, 유림의 모임 등 여러 행사와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이다.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다고 하는데, 향교처럼 명륜당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5칸 건물은 중앙 3칸은 마루로 된 강학당을 두고 양쪽에는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을 두고 있다. 

 

동쪽 방 앞에는 명성재(明誠齋)라는 현판이 서쪽 방 앞에는 경의재(敬義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명성재에는 서원의 원장이 기거했으며, 경의재는 교무실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고 한다.

 

 

 

 

협실 명성재와 경의재의 현판

 

 

 

입교당 앞 마당 양쪽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자리잡고 있다. 4칸 건물은 크기와 모양이 같은 대칭적 구성을 보이고 있다.

 

강당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 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로 사용되었으며,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고 한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에 따라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상급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하급생들의 기숙사인 서재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입교당 건너편에 마주보고 있는 만대루(晩對樓)유생들의 휴식과 강학을 위한 복합공간이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에 홑처마로 된 2층 팔작기와집으로 인공적인 서원 건축과 그 앞으로 펼쳐지는 낙동강과 병산이라는 아름다운 자연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만대(晩對)'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백제성루(白帝城樓)'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翠屛宜晩對(취병의만대)    푸른 병풍처럼 두른 풍경은 늦을 녘에 대할 만하고

      白谷會深遊(백곡회심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3년 전만 하여도 만대루는 개방되어 있어 병산과 낙동강을 바라보며 쉬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7칸의 단순한 건물이지만 병산서원의 집합적 질서의 묘미가 집약되어져 있다고 이야기된다.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를 바라보면,수많은 기둥들은 주변 경관을 수직적으로 나누고 있고 누각마루와 지붕선은 외부 경관을 수평적으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입교당, 동재, 서재 등과 함께 서원의 중앙마당을 감싸는 구실을 하면서도 동시에 외부로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만대루는 외부에서는 폐쇄적인 기능을, 내부에서는 개방적인 기능을 하는 서원 건축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누마루를 오르는 나무 계단이 눈길을 끄는데, 아름드리 통나무를 깎아내 계단으로 삼았다. 거침없는 자연미에 통쾌감이 절로 든다. 

 

2층 누마루는 통간 우물마루로 꾸미고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돌려 사방을 편안하게 조망할 수 있는 편안한 휴식 공간이 되었다. 

 

 

 

또 하나 만대루에서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누워서 보는 들보와 서까래의 물결이 아닐까 싶다.

 

 

 

강학 공간을 둘러 봤으니 이제 제향 공간인 입교당 뒤의 존덕재로 발길을 옮긴다.

 

 

잠시, 입교당의 측면을 돌아본다. (입교당 뒤 왼쪽에 살짝 보이는 건물은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

 

 

 

입교당 뒤 서원 내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존덕사(尊德祠)라는 사당이 있다. 서애 류성룡과 셋째 아들인 류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존덕사는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갈 수 없다.

 

존덕재로 들어서는 내삼문을 신문(神門)이라 하는데, 3칸의 솟을삼문으로 붉은 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향사를 지낼 때 집례를 맡은 임원들은 신문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일반 학생들은 이곳 신문 앞마당에서 참관하여야 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제례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이다.

 

 

 

봄가을에 제를 올리는 춘추향사(春秋享祀)로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과 음력 9월 초정일에 지내고 있다.  

 

전사청 앞에는 관리소로 사용되는 아담한 한옥이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동쪽 관리소 앞에는 '달팽이 뒷간'이라 부르는 재미있는 모양의 화장실이 자리잡고 있다.

 

 

 

흙돌담을 달팽이 모양으로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출입문이 없어도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지는 자연스런 구조로 되어 있다.

 

지붕도 없이 하늘로 열린 화장실, 이 뒷간은 양반 유생들이 사용한 화장실이 아니라 이들을 뒷바라지하던 머슴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400여년 전 서원 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 전해진다. 

 

 

 

병산서원은 앞으로 흐르는 강물이 빨리 흐르고 안산인 병산이 너무 높고 급하여 의 기운이 쌓일 틈이 없어 재물이 쌓이지 않으므로 살림집 터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빼어난 경관에다 인적이 드물어 학문과 수양에는 안성맞춤인 터... 

 

 

이제, 학업에 지쳤을 때 유생들이 산책을 하면서 머리를 식혔을 병산 아래로 흐르는 화천(花川)으로 나가 보기로 하자.

 

 

 

 

이 너른 백사장과 압도적인 절벽과 푸른 물결을 보면서 나는 배낭을 메고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까지 걸어와 이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야영하는 꿈을 지금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