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안동 하회마을 (10) 옥연정사, 서애 류성룡 <징비록>의 산실

모산재 2012. 2. 11. 23:19

 

원지정사에서 내려와 강변 백사장으로 들어선다.

 

이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부용대 동쪽에 있는 옥연정사(玉淵靜舍)와 화천서원(花川書院)을 지나 부용대로 갈 참이다.

 

 

 

부용대는 켜켜이 쌓인 바위가 시루떡 모양의 지층을 이루며 형성된 절벽이다. 아래로 푸르게 휘돌아 흐르는 화천과 맞은편 넓은 백사장이 어울려 하회마을의 진풍경을 이룬다.

 

 서애 류성룡은 '옥연서당기'를 통해 이 풍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북쪽으로 소(沼)를 건너 돌벼랑 동쪽으로 기이한 터를 잡았는데, 앞으로는 호수의 풍광을 지녔고 뒤로는 높다란 언덕에 기대었으며 오른쪽에는 붉은 벼랑이 치솟고 왼쪽으로는 흰모래가 띠를 두른 듯했다.

 

이어서 정사 이름을 옥연(玉淵)이라 한 뜻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개 강물이 흐르다가 이 곳에 이르러서는 깊은 소가 되었고,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 옥과 같은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사람이 진실로 그 뜻을 본받고자 한다면 옥의 깨끗함과 소의 맑음, 이 모두가 군자가 귀하게 여길 도인 것이다.

 

 

 

얼음장 같은 강바람을 안고 검푸른 물결을 헤치며 배가 꽃내(花川)를 건넌다.

 

 

 

그리고 금방 부용대의 서쪽 끝 발치에 자리잡고 있는 옥연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이 원지정사에 이어 만년에 거주하며 임진왜란의 아픈 상처를 기록한 <징비록>(국보132호)을 저술한 곳이다.

 

원지정사를 두고 왜 또 옥연정사를 또 짓게 된 것일까? '옥연정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이미 원지정사를 지어 놓았으나, 마을이 멀지 않아 그윽한 맛을 누리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니까 서애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어 배를 타고야 도달할 수 있는 부용대 절벽 한 모퉁이에 거주지를 마련한 것이다.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는 부용대 절벽 위의 전망대

 

 

 

서애는 '옥연서당기'에서 "사슴, 고라니 같은 내 천성은 산야의 삶이 알맞지, 시정 간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 "고 하며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년에 망령되게도 벼슬길에 나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여 년이 되었다. 손발 움직일 때마다 걸핏하면 해괴한 일만 저질렀으니 그 당시에 크게 답답해하였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속을 그리워하며 즐거움을 삼았던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호조차 아마도 부용대를 가리키는 '서쪽 벼랑'이라는 뜻의 서애(西厓)로 짓고 고라니처럼 산야에 묻혀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당파 싸움에 시달린 노학자의 고뇌가 선하게 느껴진다.

 

배는 꽃내(화천)를 건너 모래톱에 닿았다. 깎아지른 듯한 부용대의 절벽을 바라보며 옥연정사로 향한다.

 

 

 

 

절벽이 끝나고 평지로 이어지는 지점에 옥연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옥연정사(玉淵精舍) 중요민속자료 88호

 

옥연정사는 서쪽으로 부용대를 끼고 남쪽으로 화천과 하회마을을 시원스레 바라보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백사장과 산 사이의 집터는 생각보다 넓고 평탄하다.

 

<옥연서당기>에 따르면, 1576년 집 짓기를 시작하여 10년만인 1586년 선생이 45세 되던 해 완공하였다. 가난하여 집 지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誕弘) 스님이 그 뜻을 알고 재력을 부담하고 집짓기를 맡아 완공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1605년(선조38년) 낙동강 대홍수로 하회의 살림집 삼간초옥을 잃고 이곳에 은거하며 임진란을 회고하여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하지만 이 집은 여느 종택처럼 살림집이 아니라 서애 자신만의 학문과 수양, 저술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징비록>이라는 저술의 공간으로서 영의정이자 병조판서로서 임진왜란을 감당해내야 했던 그의 삶과 고뇌가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건물 배치는 대문이 하회마을과 먼 쪽인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부터 대문채-안채-별당채-사랑채 차례로 되어 있는데, 안채가 대문채와 가깝고 사랑채가 가장 멀리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하회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와 사랑채 쪽으로 출입했기 때문이다.

 

맨 앞에 보이는 사랑채와 가장 왼쪽으로 보이는 별당채는 남향으로 , 멀리 보이는 안채와 행랑채는 동향으로 지었다. 

 

 

 

사랑채로 들어서는 사주문의 이름은 간죽문(看竹門). 문을 나서면 대숲을 바라본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간죽문을 두고 선생이 지은 시가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老翁罷午睡     늙은이가 낮잠에서 깨어나
負手行曲庭     뒷짐 지고 뜨락을 거닐도다.
行處意易蘭     거닐다가 기분이 더욱 상쾌해지면
出門看修竹     문을 나서 긴 대숲을 바라보네.
適與江風會     강바람이라도 불어 나부끼면
淸音散氷玉     투명한 구슬이 부숴지는 맑은 소리.
時有叩門人     더러 문 두드리며 찾는 이 있는데
忘形誰主客     누가 주인이고 나그넨지 알 수 없네.

 

그야말로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던 옛 선비들의 편안한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다.

 

 

 

간죽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사랑채 세심재(洗心齋)가, 맞은편으로 안채인 완적재(玩寂齋) 나타난다. 

 

세심재는 '마음을 깨끗이 닦는 집'이니 서애는 <주역> '계사'편 중 "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루에는 '감록헌(瞰綠軒)'이란 현판을 두었으니 이는 왕희지의 "仰眺碧天際 俯瞰綠水(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 물굽이 바라보네.)"'라는 시구에서 온 것이라 한다. 

 

 

또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송나라의 시인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매우 고결하고 가슴속이 맑아서 맑은날의 바람과 비 개인 날의 달과 같다."고 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이곳은 영화 '스캔들'(배용준, 전도연 주연)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세심재를 지나면 뒷편으로 살짝 물러서 있는 별당채 원락재(遠樂齋)가 보인다.

 

 

 

원락재는 옥연정사의 중심 건물로, 큰방 1개와 애오헌 마루로 이루어진 독채며 서애 선생이 주로 기거하며 <징비록>을 쓴 곳이라 한다.

 

'원락재'라는 이름은 <논어>의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글에서 따온 것으로 멀리서 벗이 온 것을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2칸 마루는 '애오헌(愛吾軒)'이라 하였는데 "吾亦愛吾廬(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라는 도연명의 시구를 따 온 것이라 한다.

 

원락재 옆으로 마주보이는 건물이 안채 완적재(玩寂齋)이다.

 

완적재 옆으로는 담장을 두고 별당 공간과 분할하였는데, 일각문(一角門)을 세워 통하도록 하였다.

 

 

완적재는 서애를 위해 건물을 지어준 탄홍 스님이 기거하며 공부했던 공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건물은 가운데에 부엌을 두고 양쪽에 방을 둔 점이 독특한데, 이는 안동 지역 민가에서 일반적인 도토마리집 형식의 집이라는 데서 눈길을 끈다.

 

 

동쪽 끝에 대문채가 저라잡고 있는데, 6칸 규모의 'ㅡ'자형으로 되어 있다. 대문을 나서면 화천서원을 지나 광덕마을로 길이 이어진다.

 

대문 밖 장작으로 울을 이룬 멋진 원두막에는 음료수 캔 자판기를 모셔 놓았다. 이게 무슨 모습인지...? 

 

 

 

마지막으로 고라니처럼 산야에서 살고 싶어했던 서애 선생의 유유자적하는 삶의 모습을 잘 나타낸 시를 한 수 더 감상하고 끝맺기로 하자.

 

제목은 '山中無事與兒輩拾橡偶吟爲戱',

뜻을 풀이하면 "산속에서 일없이 아이들과 도토리 주우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읊는 놀음". 제목이 길기도 하여라!

 

朝出拾橡東山巓 아침엔 동산 마루턱에서 상수리 줍고

暮出拾橡東山足 저녁옌 동산 기슭에서 상수리 줍네.

朝朝暮暮拾橡去 아침 저녁으로 상수리 주으러 가니

衣裳穿結脚不襪 옷 다 헤어지고 다리는 맨발이네.

今年橡林多結子 올해는 상수리 열매 많게도 열어

風飄滿地金丸落 바람 불면 땅 가득 금알이 떨어지네.

老夫衰病不出門 늙은몸 쇠약하여 문밖에 나가지 않다가

尙爲資生謀口業 그래도 살려고 먹을 것을 도모하네.

辛勤日日不知疲 날마다 부지런히 피로도 모르고

坐對筠籠時一噱 대바구니 마주대고 앉아 때로는 껄껄걸.

呼童束薪西澗底 아이 불러 시냇가에 나무 주워다가

石당煮熟甘如密 돌솥에 구우니 그 맛이 꿀과 같네.

食飽負手下庭行 부르면 뒷짐지고 뜰로 내려 가니

自笑前時五鼎食 난 정승 시절 오정식이 절로 우습네.

 

학가산 기슭 서미동 석벽 아래 삼간 초옥에 살 때인지 아니면 옥연정사에 거할 때인지 알 수가 없는데, 아이들과 숲에서 도토리를 줍는 서애의 소탈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옥연정사 전경. 오른쪽은 화천서원

 

※ 옥연서당기(玉淵書堂記 )

 

余旣作遠志精舍 猶恨基村墟近 未燁幽期,渡北潭 於石崖東,得異處焉 前읍湖光 後負高阜 丹壁峙其右 白沙榮其左 南望,則群峯錯立 拱읍如畵 漁村數鮎 隱映烟樹間 花山自北而南 隔江相對 每月出東峯 寒影倒垂 半浸湖水 纖波不起 金壁相涵 殊可玩也 地去人烟,不甚遠 而前阻深潭 人欲至者 非舟莫通 舟艤北岸 則客來坐沙中 招呼無應者 良久乃去 亦遁世幽루之一助也 於是,余心樂之 欲作小宇 爲靜居終老之所 願家貧無計 有山僧誕弘者 自薦幹其役 資以粟帛 自丙子始越十年丙戌租成 可루息 其制,爲堂者二間 名曰瞰綠 取王羲之 仰眺碧天際,俯瞰綠水隈之語也 堂之東,爲燕居之室二間 名曰洗心 洗心齋 取易繫辭中語 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 又齋在北者三間 以舍守僧,取禪家說 名曰玩寂 玩寂齋 東爲齋二間 以待朋友之來訪者 名遠樂 取'自遠樂乎之語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由齋西出爲小軒二間 與洗心齋相比,名曰愛吾 取淵明 吾亦愛吾廬之語 合而扁之 曰玉淵書堂 盖江水至此匯爲深潭 其色潔淨 如玉故名 人苟體其意 則玉之潔, 淵之澄 皆君子之所貴乎道者也. 余嘗觀古人之言曰 人生貴適意 富貴何爲 余以鄙拙 素無行世之願 譬如미鹿之性 山野其適 非城市間物 而中年妄出宦途 汨沒聲利地場 二十餘年矣. 擧足搖手 動成駭觸 當其時 大悶無聊 未嘗不창然思茂林豊草之爲樂也 今幸蒙恩 解綬南歸 軒曼之榮過耳 鳥音而日丘一壑 樂意方深. 是時 而吾堂適成 將杜門却掃 潛深伏奧 仰乎一室之內 放浪乎山谿之間 圖書足以供玩索之樂 疏려足以芻환之미 佳辰美景 精朋偶集 則輿之 窮回溪 坐巖石 望靑天 歌白雲 蕩押魚鳥 皆足以自樂而忘憂 嗚呼 斯亦人生適意之大者 外慕何爲 懼斯言之不固 聊書壁而自警 丙戌季夏 丙戌年 主人西厓居士記

 

나는 이미 원지정사를 지어 놓았으나, 마을이 멀지 않아 그윽한 맛을 누리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북쪽으로 소(沼)를 건너 돌벼랑 동쪽으로 기이한 터를 잡았는데, 앞으로는 호수의 풍광을 지녔고 뒤로는 높다란 언덕에 기대었으며 오른쪽에는 붉은 벼랑이 치솟고 왼쪽으로는 흰모래가 띠를 두른 듯했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뭇 봉우리들이 들쑥날쑥 섞여 서서 마치 두 손을 맞잡고 읍하는 형상이 한 폭의 그림이요. 어촌 두어 집이 나무숲 사이 강물에 어리어 아른거린다.

 

화산은 북쪽에서 달려오다가 남쪽의 강을 대하고 멈추어 섰다. 달이 동쪽의 산봉우리에서 떠오를 때, 차가운 산 그림자는 반쯤 거꾸로 호수에 드리워지는데, 물결 한 점 일지 않는 잔잔한 강물에 금빛 달그림자까지 담겨진 듯한 광경이야말로 매우 볼 만한 것이었다.

 

이곳이 인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나 앞에 깊은 소(沼)가 있어, 사람이 오고자 해도 배가 없으면 올 수가 없다. 그래서 배를 북쪽 기슭에 매어두면 사람들이 와서 모래사장에 앉아 이쪽을 향해 소리쳐 부르다가 오래도록 대답이 없으면 스스로 돌아가곤 하였으니, 이 또한 세상을 피해 그윽이 들어앉아 사는 일에 한 가지 도움이 된다.

 

나는 이것을 마음속으로 좋아하여 조그마한 집 을 지어서 늙도록 조용히 거처할 곳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살피건대 집이 가난하여 도무지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마침 산승 탄홍이란 사람이 그 건축을 주관하고 곡식과 베를 내어놓으니, 일을 시작한 병자년(선조9년, 1576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병술년(선조19년, 1586년)에 겨우 깃들고 쉴 만하게 되었다.

 

집 구조는 당 2칸은 감록헌(瞰綠軒)이라 부르고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 물굽이 바라보네." 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고. 이 당에 붙어있는 편히 쉴 수 있는 방 2칸 이름을 세심재(洗心齋)라 지었으니 주역 계사편 중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북쪽집 3칸은 이 집을 지키는 중을 위해 선가의 말을 따서 완적재(玩寂齋)라 하였다. 동향 집 2칸은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원락재(遠樂齋)라 하였는데, 이 명칭은 논어 중의 이른바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재의 서쪽으로 낸 조그마한 마루 2칸은 세심재와 이웃하고 있기에, 애오헌(愛吾軒)이라 하였다. 이 명칭은 도연명의 시에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라고 한 시어에서 따온 것이다. 이 모두를 합하여 편액하기를,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하였다.

 

대개 강물이 흐르다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깊은 소가 되었고,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 옥과 같은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사람이 진실로 그 뜻을 본받고자 한다면, 옥의 깨끗함과 소의 맑음이란 이 모두가 군자가 귀하게 여길 도인 것이다.

 

내가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살펴 보건대, “인생이란 스스로 뜻에 맞는 것이 귀한 것이지 부귀가 무슨 귀한 것이 되리오.” 하였거니와, 내가 옹졸하고 부족하여서 평소 행세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사슴, 고라니 같은 내 천성은 산야의 삶이 알맞지, 시정 간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

 

중년에 망령되게도 벼슬길에 나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여 년이 되었다. 손발 움직일 때마다 걸핏하면 해괴한 일만 저질렀으니 그 당시에 크게 답답해하였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속을 그리워하며 즐거움을 삼았던 것이다. 지금은 임금의 은혜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수 있었으니, 정말 벼슬 따위와 같은 영화란 이미 지난 일이었다.

 

새소리 들리는 언덕과 골짜기의 즐거움이 깊어가는 이 때에 마침 나의 집이 완성되었다. 문을 닫고 찾아 오는 이도 사양한 채 방안에 깊이 들어박혀 지내며 산과 계곡을 이리저리 거닐기도 하며 때론 서적들로 취미를 붙여 그 의미를 궁구하기도 하고 성긴 밥이나 맛있는 음식의 기름짐을 잊기에 족하니 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에 정겨운 벗들이 우연히 모여들면 그들과 더불어 굽이진 계곡을 거닐기도 하며 바위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흰 구름을 읊기도 하면서 물고기 새들과 함께 어울려 호탕이 지내노라면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즐겁게 하여 근심을 잊는다.

 

아! 이것 또한 “인생이 스스로의 뜻에 맞는 큰 것인즉 밖으로 달리 그 무엇을 그리워할 것인가.” 내 이 말을 굳게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벽에다가 글로 써 붙여 놓고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고자 하노라.

 

병술년(1586) 늦여름 주인 서애거사 적다.

 

갑신년 2004년 3월 7일 河庭齋에서 십삼대손 柳永一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