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안동 하회마을 (11) 화천서원, 겸암정사

모산재 2012. 2. 12. 09:35

 

옥천서원을 지나면 광덕마을로 나가는 길이 느릿한 고갯마루로 오르게 된다. 바로 그 고갯마루에 화천서원(花川書院) 자리잡고 있다.

 

 

■ 화천서원(花川書院)

 

석축과 흙담장, 건물의 벽체 등의 상태를 보면 화천서원의 건축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아쉽게도 서원으로 들어서는 유도문(由道門)문이 꼭 닫혀 있다.

 

밖에서 껑충하게 높이 솟아 있는 지산루(志山樓)만 살펴보는 수밖에...

 

 

 

화천서원은 1786년(정조 10)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류운룡,성룡의 손자인 유원지, 류성룡의 문인인 김윤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었는데 1996년에야 모금을 하며 복원사업을 하였다고 한다.

 

경내의 건물로는 지산루(志山樓), 강당인 숭교당(崇敎堂), 동서재 전학재(典學齋)와 심원재(尋遠齋), 사당 경덕사(景德祠), 장판각(藏板閣) 등이 있다.

 

 

 

지산루 안쪽 '화천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건물이 강당인 숭교당(崇敎堂)이다. 양쪽으로 서재인 전학재와 심원재가 있다.

 

 

 

화천서원은 문이 잠겨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데, 양반가옥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내놓고 있는 모양이다. 숙박시설로 내놓고 있기는 옥연정사도 마찬가지인데, 출입을 금하고는 있지 않건만... 훨씬 큰 아쉬운 대목이다.  

 

 

화천서원 뒤에서 바라본 전경. 앞으로 낙동강 상류 화천(花川)의 강물과 백사장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출처 : http://www.hwacheonseowon.com

 

하회마을 입구에서 건너다본 화천서원. 옥연정사와 멀지 않다. 

 

 

 

  

여기서 잠시, 비록 시간에 쫓기어 들르지 못한 곳이지만 겸암정사를 소개하기로 하자.

 

옥연정사의 서쪽 간죽문(看竹門)을 나서면 바위 벼랑 위로 비교적 넓은 터가 나타나고 거기서 부용대 벼랑쪽으로 이어진 길이 나타난다.

 

 

 

시루떡처럼 층층이 포개진 지층을 따라 줄곧 이어진 이 길은, 아찔한 절벽 아래로 시퍼렇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지금은 길이 위험하여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서애와 겸암 선생은 이 길을 따라 형과 아우가 머무는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를 오갔으리라.   

 

 

■ 겸암정사(謙嵓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

 

겸암정사는 서애의 맏형인 겸암 류운룡 선생이 명종 22년(1567년)에 세우고 후에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곳이다.

 

부용대 서쪽 기슭, 화천 상류에 자리잡고 있어서 하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하만 숲에 가려 마을에서는 낙엽이 진 겨울철에만 볼 수 있다.

 

하회마을에서 건너다본 겸암정사

 

 

 

겸암정사는  안채와 사랑채가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채는 홑집으로 ‘ㄱ’자형이며 사랑채인 정사는 겹집 형태의 일(一)자형으로 앞 퇴를 다락집형으로 한 것이 특색이다.

 

겸암정사 현판은 둘 있는데, 앞면의 '겸암정(謙巖亭)' 현판은 퇴계 이황(1501~1570)이 썼고, 뒷면의 '겸암정사' 현판은 원진해가 9세 때 쓴 글씨라고 전한다.

 

원진해는 조선 효종 때의 학자로 5~6세에 글씨로 이름을 날렸으며 관아와 궁중의 문액을 쓴 것이 많았는데 모두 명필이라 칭하였다. (원진해를 엉뚱하게 명나라의 시인이라고 소개해 놓은 글들이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 출처 :  http://www.hahoe.or.kr/

 

 

출처 : 문화재청

 

 

※ 겸암 류운룡(1539~1601)

 

류성룡의 형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과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향리에 겸암정사를 세워 학문에 열중하였다. 겸암이라고 호를 지은 것은, 겸허한 자세로 내적 수양에 정진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겸(謙)’자의 의미는 퇴계의 ‘퇴(退)’자와 그 듯이 부합되니, 그는 스승의 삶을 본받고자 했던 것이다.

 

겸암은 성품이 강건하였지만 겸허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겸암의 묘갈에는 “겸허하고 겸허한 군자여! 본체는 강건하고 쓰임은 부드러웠네.”라는 택당 이식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부친의 명에 따라 음직(蔭職 : 선조의 음덕으로 하는 벼슬)으로 마지못해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한성부 판관과 풍기군수, 원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오르기도 했다. 풍기의 우곡서원‚ 하회의 화천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