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안동 하회마을 (9) 삼일만세의 현장 화수정 노송, 서애 유성룡의 원지정사

모산재 2012. 2. 10. 21:58

 

작천댁(류시주 가옥)에서 강변으로 나와 부용대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강변에 만송정(萬松亭)이라 부르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어 하회마을을 더욱 기품 있는 분위기로 만들고 있다.

 

높은 절벽을 이룬 부용대 서쪽으로 지세가 낮아지면서 마을이 북서풍이 노출되는 지형적인 약점을 가리기 위해 류성룡의 형 겸암 류운룡이 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유래된 이름이다. 몇 년 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하회마을의 명소이다.

 

 

솔숲 앞에는 그네가 매어져 있는 넓은 놀이마당이 있는데, 하회별신굿놀이가 벌어지는 장소이다. 놀이 마당 뒷편에 빈연정사와 원지정사가 자리잡고 있다.

 

놀이마당 뒤 언덕으로 올라서면 넓은 마당이 나타난다. 운동장이다 싶은데 과연 입구에는 '교적비'라는 비석이 있어 예전 풍남초등학교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고 있다. 학교 건물은 철거했는지 휑한 운동장과 커다란 소나무 하나만 남았다.

 

삼일운동 직후인 1919년 9월 1일 개교하였다고 하는데, 얄궂게도 1991년 3월 1일 삼일절이 폐교일로 기록되어 있다. 72년 동안 하회마을의 2,226명을 길러낸 학교임에도 최고의 양반마을도 아이들을 지켜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 '화수당 노송(花樹堂老松)' 또는 만세송(萬歲松)

 

멀리서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에 끌려 가까이 다가서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형상을 한 명품 소나무이다.

 

 

 

 

 

소나무 아래에는 비석을 세워 소나무의 내력을 새겨 놓았다.

 

나무의 이름은 '화수당 노송(花樹堂老松)'.

 

'화수당(花樹堂)'은 집안 친목 모임을 위해 만든 집이니 풍산류씨 문중의 재실 비슷한 건물이었을 것이다.

 

3.1 독립운동이 있던 때에 화수당과 사립 동화학교가 있던 이 소나무 앞에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동화학교는 폐지되고 그 해 가을 풍남초등학교가 개교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이 소나무는 '만세송(萬歲松)'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단다.

 

 

 

 

 

만세송의 수령은 400년 정도라고 한다. 

 

 

 

 

 

 

하회마을은 강가의 천연기념물 만송정과 함께 화경당의 한반도 소나무, 이곳의 만세송까지 소나무만으로도 볼거리를 자랑하고 있다.

 

예로부터 안동솔은 춘양목보다 더 쳐 준다 했을 정도로 이름 높았다는데, '성주풀이'에서도 "성주로다 성주로다 성주의 본향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이 본이러라 제비원이 본이러라.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에 솔씨받아 이산 저산 뿌렸더니..." 라고 했을 정도로 안동은 소나무의 본향이었는데, 하회마을의 소나무도 이름값을 하는 듯하다.

 

 

 

 

■ 원지정사(遠志精舍) / 중요민속자료 제85호

 

원지정사는 전 풍남초등학교 운동장 뒤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운동장 동쪽 비탈길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르면 아담한 흙돌담장을 거느린 작은 사주문(四柱門)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주문(四柱門)은 1979년에 원지정사를 보수하면서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마당 왼쪽에 원지정사(遠志精舍)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2층 누각 연좌루(燕座樓)가 자리잡고 있다.

 

 

 

 

 

서애 류성룡이 선조 9년 (1576년) 34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낙향하여 만송정이 한 눈에 들어오는 마을 북쪽에 짓고 학문을 했던 곳으로 은퇴한 후에는 정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화천(花川) 건너 서쪽의 원지산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원지정사라 하였다.

 

원지산에는 한약재로 쓰는 원지(遠志)라는 풀이 자생하는데, 류성룡의 '원지정사기'에 따르면 "심기(心氣)를 다스려 정신의 혼탁과 번민을 풀어"주는 원지의 뜻을 살리고자 한 것이다.

 

 

 

 

 

원지정사는 막돌 허튼층쌓기를 한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 정사는 맨 왼쪽 칸에 마루를 두고 오른쪽 두 칸은 온돌방을 놓았다. 3칸 정면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두었다. 작은 건물이지만 양쪽에 풍판(風板)을 설치하였다.

 

 

연좌루(燕座樓)는 팔작지붕과 추녀 끝의 곡선이 제비를 연상하게 하여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으로 장대석을 기단부로 하여 막돌 초석을 놓고 1층은 다각기둥, 2층은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사방을 개방하고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돌린 마루 앞으로는 부용대와 양쪽의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를 조망할 수 있고, 뒤로는 하회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2층 누각에는 서애가 쓴 '원지정사기(遠志靜舍記)' 현판이 걸려 있다.

 

 

사주문으로 바라본 부용대

 

 

 

 

 

원지정사 흙돌담 담장과 부용대

 

 

 

 

 

서애는 '원지정사기'에서 원대한 뜻을 지니지 않으면 세상에 나아가 소초(小草) 노릇 밖에 할 수 없음을 동진(東晉)의 정치가 사안(謝安)과 무인 환온(桓溫)에 얽힌 다음의 고사를 들 말하고 있다.

 

 

옛날 중국의 진(晋)나라 사람 환온(桓溫)이 사안(謝安 字는 安石)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한 물건인데 어찌 두 이름을 쓰는가? 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들어앉아 있을 때는 원지요. 밖에 나가서는 소초가 된다 하니,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산야에 살 때에 본래 원지가 없었으니, 시정 간에 나아가 소초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원지(遠志)란 무엇인가? 서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먼 것은 가까운 것이 쌓여져 나아간 것이요. 뜻(志)은 마음이 방향을 잡은 것이다. 상하사방의 끝없는 공간으로 보나 아득한 옛날로부터 흘러온 지금까지의 시간으로 보나, 우주란 참으로 멀고도 먼 것이다. 내 마음이 방향을 얻었고, 방향을 얻은 까닭에 기뻐하는 것이며, 기뻐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었고, 즐거워함으로써 자연 잊은 것이 있으니 잊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집의 협소한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집의 협소함을 잊고 마음이 방향을 잡고 가까운 것이 쌓여져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원지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원지정사는 바로 그러한 수양의 공간인 것이다.

 

 

 

 

 

 

※ 遠志精舍記

築精舍 干北林 凡五間 東爲堂, 西爲齋 由齋北出 又轉而西 高爲摟 以俯江水 旣成, 扁其額曰, 遠志 湖山登望之美, 不識言 客疑其義, 余告之曰, 遠志 本藥名, 一名小草 昔 晋人, 問謝 安曰 “遠志, 小草, 一物” 而何 爲二名 或曰, 處爲遠志, 出爲小草 安有愧色 余在山, 固無 遠志, 出 而爲小草, 則固也 是有相類者 又醫家 以遠志, 專治心氣, 能撥昏鷁煩 余年來, 患心氣, 每餌藥 輒用遠志 其功不敢望, 因推類, 而引其義 治心之說, 亦儒者商談, 如此數義 皆可爲齋號 而舍後西山, 適産遠志 每山雨時至, 靑翠秀佳, 助爲精舍幽趣 隨命精舍, 曰遠志, 取其實也 嗚呼, 遠者, 近之積也 志者, 心之玩焉 故有所樂所之也 上下四方之宇, 古往今來之宙, 可謂遠矣 而吾之心, 皆得之焉 之焉 故有所玩 樂焉 故有所望 望者何 忘其室之小也. 淵明詩曰 “心遠之自偏” 微斯人, 五誰與歸, 是爲記 戊寅 四月 望前一日 主人 西厓居士 書


※ 원지정사기

북쪽 숲속에 정사를 지으니, 모두 다섯 칸이다. 동쪽은 마루요, 서쪽은 서재이다. 서재에서 북쪽으로 나가다가, 서쪽으로 돌아서, 높게 루를 지었는데, 강물을 내려다 보기 위함이다. 집을 다 짓고서, 편액하기를 원지라 하고, 산수의 아름다움은 말하지 않았다.

어떤 나그네가 그 뜻을 이상히 여기므로 내가 그에게 일러주기를 원지는 원래 약초 이름으로서 일명 小草(소초)라고 한다. 옛날 중국의 진(晋)나라 사람 환온(桓溫)이 사안(謝安 字는 安石)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한 물건인데 어찌 두 이름을 쓰는가? 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들어앉아 있을 때는 원지요. 밖에 나가서는 소초가 된다하니,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산야에 살 때에 본래 원지가 없었으니, 시정 간에 나아가 소초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서로가 비슷한 점이다. 또한 의가(醫家)에서는 원지로서, 오로지 심기(心氣)를 다스려, 혼탁한 정신과 번민을 풀어 헤칠 수 있다. 내가 여러해 전부터, 심기가 맑지 못함을 걱정하여 늘 약을 쓸 때마다 원지를 사용하니, 그 공을 내 감히 잊고 돌아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뜻을 미루어 보면 마음을 다스린다는 설(說)은 우리 선비들이 늘 하는 말이다. “이 두가지 뜻만 하더라도 서재 이름으로 할 만하다.” 하였다.

정사 뒤 서산에 마침 원지가 저절로 자라나 늘 산비에 흠씬 푸른빛을 머금고, 빼어난 모습이 정사의 그윽한 정취를 더욱 돋우어 주고 있음에랴! 드디어 원지정사라고 이름 한 것이니, 모두 사실을 취해온 것이다.

아! 먼 것은 가까운 것이 쌓여져 나아간 것이요. 뜻(志)은 마음이 방향을 잡은 것이다. 상하사방의 끝없는 공간으로 보나 아득한 옛날로부터 흘러온 지금까지의 시간으로 보나, 우주란 참으로 멀고도 먼 것이다. 내 마음이 방향을 얻었고, 방향을 얻은 까닭에 기뻐하는 것이며, 기뻐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었고, 즐거워함으로써 자연 잊은 것이 있으니 잊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집의 협소한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마음이 세속과 머니 사는 것이 절로 한가롭도다 하였으니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 누구와 더불어 취향(趣向)을 같이 할 것이었던가! 이로서 기(記)하노라.

무인년(1578년 선조11년) 4월 보름 하루전날 주인 서애거사 쓰다.
갑신년 2004. 2. 河庭齋에서 십삼대손 柳永一 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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