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안동 하회마을 (7) 12칸 긴 행랑채, 충효당 또는 서애종택

모산재 2012. 2. 8. 00:52

 

 

 

충효당은 양진당 앞 길 건너편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밖에서 바라보는 행랑채(대문간채)는 모두 12칸으로 길게 늘어서서 안채와 사랑채를 가리고 있다.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 8칸 오른쪽 3칸이다.

 

 

 

■ 충효당(忠孝堂) = 서애종택   / 보물 제414호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 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 유원지(1598∼1674)를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유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유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 사대부 집으로 52칸이 남아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인 충효당 건물이 바로 나타난다. 대개의 사랑채들이 기단을 높이 쌓거나 누마루를 둔 것과는 달리 충효당은 기단이 낮아 편안하게 느껴진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는 현판은 명필가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서애가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써 준 글씨라고 한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왼쪽 2칸은 온돌이고, 가운데 2칸은 트인 마루이며, 나머지 오른쪽 2칸은 판벽을 쳤다.

계자난간을 두른 가운데 정면으로 출입구가 나 있다. 마루 저편은 훤히 뚫려 있어 뒤뜰이 바라다보이는 개방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붙어 있는데 방이나 마루로 연결되지 않아 신을 신고 후원 문을 통해 드나들게 되어 있다.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ㅁ자 모양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채 내부는 문화재청 자진 자료로 대신한다. (아래 2장)

 

충효당 안채 

 

 

 

사랑채에서본 안채

 

▲ 출처 : 문화재청

 

 

 

사당채는 몸채와는 방향을 달리하여 남향을 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면에는 높은 분을 모신 사당에만 쓸 수 있는 삼문이 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일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이 있으며, 그밖에 당시 여러 문서들을 수록한 <진사록>, 의술에 관한 <침구요결>, 만년의 시를 모은 <관화록> 등 문서 19권이 보물 제160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또 류성룡이 생시에 쓰던 갑주, 가죽신, 갓끈 등도 보물 제460호로 지정되어 전시되어 있다.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 기념 식수가 있다.

 

 

충효당 행랑채 담장

 

 

 

 

 

내려다본 충효당 전경

 

▲ 출처 : http://www.haho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