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영주 부석사 (1) 소백산 연봉을 품은 대가람, 일주문에서 안양문까지

모산재 2012. 1. 31. 20:47

 

지난 세기말, 1998년 무렵으로 기억되니 벌써 십수 년이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부석사를 찾게 되니 참으로 가슴 설렙니다.

 

그 때도 겨울이었는데, 이번에도 연수라는 이름으로 한해가 다 저물어가는 날 직장 동료들과 함께 부석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절 입구 어느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부석사로 향합니다.

 

 

 

 

매표소를 지나 사과밭을 통과하는 비탈길에는 '태백산부석사'라고 씌어 있는 일주문이 우뚝 서 있습니다.

 

 

 

 

부석사 대가람이 안겨 있는 산은 봉황산(819m). 태백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째서 '태백산 부석사'라고 부를까요?

 

아마도 봉황산이 태백산에서 흘러내린 한 봉우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북동쪽의 태백산(1567m)에서 남서쪽의 소백산(1440m) 쪽으로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의 중간에 봉황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석사는 태백산을 등지고 소백산 연봉들을 바라보는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에 세워졌다는 일주문, 기둥 윗부분에는 인왕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지만 그냥 지나칩니다. 인왕문이 따로 없는 절이니 일주문에 인왕문의 의미까지 겸하게 한 듯합니다.

 

 

 

 

일주문 뒤쪽에는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부석사는 676년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명으로 창건한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지켜져 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곳 원융국사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흙비탈길은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도열하고 있습니다. 가을에 온다면 더욱 아름다운 길이겠지요. 

 

곁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그 너머는 사과 과수원이니 여느 산사 진입로와는 색다른 호젓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은행나무 길을 따라 천왕문이 가까워졌을 무렵 시원하게 솟은 영주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가 모습을 나타냅니다. 

 

대개의 절에서처럼 깃발(幢)을 달아두는 장대인 당간(幢竿)은 사라지고 장대를 지탱해 주는 당간지주만 남았습니다(칠장사나 법주사 등엔 남아 있지만...), 높이는 480㎝이랍니다. 장식이 별로 없어 간결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돌이끼가 낀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 무렵의 것이라는군요

 

 

당간지주 사이에는 연꽃 장식이 새겨진 당간 받침돌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리운 부석사'라는 시 한 수 감상하고 가지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그리운 부석사>

 

정호승이 이 당간지주 앞에서까지 이렇게 아픈 사랑의 시를 쓰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부석사는 사랑과 기다림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석사 오르는 길은 높고 낮은 대석단(大石壇)의 계단을 수차례 지나야 합니다. 바로 이 대석단이야말로 부석사라는 가람의 상승적인 미학을 구축하는 주요한 건축물입니다.

 

 

style="color: #cc723d;">천왕문(天王門)은 첫번째 대석단 가파른 계단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런데 옛기록에 따르면 이 자리가 원래 일주문이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일주문은 절 영역을 넓히면서 새로 터 잡은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천왕문은 일주문과 함께 1980년대에 지어진 것입니다. 비록 지은 지는 얼마되지 않아도 천왕문과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양식에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어두운 문 안에는 악귀를 밟은 채 눈을 부릅뜬 사천왕이 지키고 섰습니다. 불법의 수호신들이지요.

 

수미산의 중턱에서 도리천의 우두머리 신 제석천(帝釋天:힌두교의 인드라) 의 명을 받아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동작을 살펴 매월 보름날이면 보고한다고 합니다.

 

 

 

 

천왕문을 지나 너른 마당을 지나면 아주 높다란 둘째번 대석단이 나타납니다. 

 

대석단 위에는 예전에 없던 새 건물이 서 있습니다. 회전문(廻轉門)을 복원한 모양인데, 아직 공사중인지 오르는 계단은 봉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길은 동쪽으로 두르게 됩니다.

 

 

 

 

1849년에 발간된 <순흥읍지>에 따르면 아마도 지금의 천왕문 위치에 일주문이 있었던 모양이고 그 아래쪽에 '누각의 모습이 거꾸로 비치는' 영지(影池)가 있었다고 합니다.(지금은 그 영지가 사라지고 없어 참 아쉽네요) 그리고 대석단 위에는 회전문(또는 조계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돌고도는 회전문(廻轉門)이 없는데, 어째서 회전문일까요. 

 

회전문이란 양쪽에 긴 날개채를 가진 솟을 대문 형식의 문을 일컫습니다. 회전문이라면 청평사의 회전문(보물 제164호)이 유명한데, 극락전을 들어서는 중문으로 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문이 움직이거나 회전하는 장치가 없는데도 회전문이란 독특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중생들에게 윤회 전생을 깨우치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청평사 극락전처럼 아미타불을 모신 부석사 무량수전에도 윤회의 업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회전문을 두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높다란 대석단을지나며 부석사의 건축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옛날 부석사를 처음 찾았던 겨울날 부석사의 이 대석축과 계단, 그에 따라 위계를 이루며 늘어선 전각이 주었던 압도적인 인상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라는 저서를 낸 김봉렬은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건물을 짓는 것"이라며 "건축은 시대의 모습을 담은 그릇이요, 깨달음과 생활이 만든 환경이며, 인간의 정신이 대지 위에 새겨 놓은 구축물이다."라고 하였지요.

 

바로 부석사야말로 그런 건축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왕문에서부터 크게 세단씩 나눠진 모두 아홉 단의 돌계단(그러나 지금은 12개의 석단인데, 작은 비탈을 막아 계단을 더 만들었기 때문이다.)은 바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무량수전에 이르는 상징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석사는 불교 교리의 상징체계를 건축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절이라고 말합니다. 유홍준은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중생을 선행의 정도에 따라 아홉 단계로 나누는 아미타 신앙의 3품3배관(三品三輩觀)을 9품 만다라 형상화하였다고 하였던가요.

 

부석사는 첫째번 대석단에서 일주문이, 둘째번 대석단에서 회전문이, 그리고 셋째번 대석단에서 안양문이 세워져 극락정토를 향하는 공간이 분할되어 있습니다. 대석단은 비탈을 이루고 있는 법당과 주법당(무량수전) 영역을 평지로 만들기 위한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유홍준은 "부석사의 참맛은 아래로부터 차근차근 걸어올라가면서 절집이 들어앉은 모양을 하나하나 음미할 때 깊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석단을 오르는 길은 극락정토로 오르는 길입니다. 강영조 교수는 "석단에 의한 시야의 개방과 폐쇄의 율동적인 변이는 비탈면을 연속적으로 상승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과 기대감, 그리고 안으로 깊숙이 진입하고 있다는 공간감각을 동반한다. 가장 깊숙하고 높은 곳에 있는 정토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한다. 의상이 의도한 공간 의장(意匠)이다." 라고 평하였습니다.(대석단을 조성한 것은 훨씬 후대에 의상대사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만...)

 

김봉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십여 개 석단의 높이들은 서로 다르고, 석단이 위치하는 간격도 다르다. 높은 단 하나를 오르면 다시 낮은 단들이 나타나고 다시 높아지는 등, 매우 리드미컬하게 걸음을 조절한다. 가람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산술적 거리는 매우 길고 고저차도 심하지만, 부석사를 방문하는 그 누구도 힘들어하지 않는다. 율동적으로 배치되고 세워진 석단들 때문이다. 석단들은 바로 자연 지형의 생김새에 따라 세워진 땅의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십여 개의 석단의 정점에는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놓여진다.

 

그리하여 그는 "소백산맥의 수많은 산줄기와 능선들이 무량수전을 향해 경배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말했듯이 부석사는 가장 커다란 정원을 가진 가람이 됐다. "고 글을 맺습니다.

 

 

이쯤에서 부석사 가람배치도를 확인하기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회전문이 있는 대석단 위로 올라서자 비로소 전각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전각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경역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범종루, 그리고 맨 위에 보이는 안양문무량수전입니다.

 

두 전각을 중심에 두고 다른 전각들은 모두 동서로 도열해 있는 형국입니다.

 

 

 

 

그래도 차례대로 볼 것은 봐야겠지요.

 

맨 먼저 맞이하는 것은 동서로 쌍탑을 이루고 있는 삼층석탑입니다.

 

이 쌍탑은 부석사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으로,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있는 영주부석사삼층석탑(보물 제249호)와 다른 것인데, 인터넷에선 혼동되어 소개된 것들로 넘쳐 납니다.

 

↓동탑 

 

 

 

두 탑은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골짜기의 옛 절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66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합니다. 탑을 옮길 때 세워 놓은 비석에 의하면 서쪽의 탑은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에서 나누어 온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 서탑 

 

 

두 탑은 같은 형식에 크기가 좀 다른 모습인데,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지붕돌의 밑면 층급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어 있는데,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회전문을 지나서 가람의 중심축을 형성하는범종루(梵鐘樓)입니다. 회전문과 안양문 사이, 부석사에서는 가장 평탄한 땅 위에 서 있는 가장 안정감 있는 건물로 조선 후기(18세기)의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이 범종루는 앞쪽은 팔작지붕인데, 뒤쪽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는 점.

 

이런 구조로 안양루에 서서 내려다보면 범종각 지붕은 멀리 펼쳐진 소백산맥 연봉들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강렬한 시각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마치 극락 세계를 하계를 향해 널리 전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팔작지붕인 전면. 후면은 과연...?

 

 

 

 

범종루에서 살짝 비켜 서서 보면 뒤편으로 대석축단 위에 안양문과 무량수전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범종루 서쪽으로는 범종을 달고 있는 범종각이 있습니다.

 

범종루가 있는데, 웬 범종각이 또 있을까요... 의문은 잠시 놓아두고...

 

 

 

 

범종에는 '태백산' 아닌 '봉황산'으로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종에 새겨진 공양상

 

 

 

 

범종루를 지나 돌계단을 통하여 뒷마당으로 올라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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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뒷마당 안쪽에는 법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부석사는 화엄종 종찰이었으므로 이곳에 있었던 법당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적광전(寂光殿)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돌아본 범종루. 맞배지붕으로 된 후면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전후 지붕형식이 다른 것은 각각 다른 이유가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남쪽이 팔작지붕인 것은 높게 노출된 남쪽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을 듯하고, 뒷면이 맞배지붕인 것은 바로 2층 누각이 법당과 이어지는 문루로서의 필요성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법당에서 바라볼 때 마주보는 곳에 처마가 내려진 팔작지붕이 있었다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범종루' 2층 대들보에는 법고와 목어만 달려 있습니다. 종을 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 범종각을 따로 둔 이유를 이제야 알 만합니다.

 

 

 

 

다시 돌아서 주법당인 무량수전으로 향하니 우뚝 솟은 안양문(安養門)이 위엄에 찬 모습으로 호령하듯 내려보고 있습니다.

 

회전문에서 범종루를 지나 일직선으로 축을 형성하며 들어서던 길이 안양문 앞에서 갑자기 꺾입니다. 안양루에서 보면 범종루는 서쪽으로  비켜서 있는 조심스런 모습이 됩니다.

 

 

 

 

안양(安養)은 '극락'을 가리키는 말이니, 윤회가 없는 진정한 극락 세계로 진입하는 안양문 앞에서 몸가짐을 삼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길이 꺾여진 지점에서 안양루를 한번 올려본 다음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극락세계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올려 놓습니다. 

 

 

 

 

안양문의 앞에는 '부석사(浮石寺)'란 편액은 걸려 있는데 1956년 이승만이 이 곳을 방문할 때 쓴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볼거리 하나.

 

안양문 지붕 밑 공포를 들여다 보면 공포 사이로 열리는 공간이 여섯 개의 부처상처럼 보이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아침 햇살이 비칠 때엔 금동미륵불이 앉은 듯 빛이 만드는 신비로운 형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안양루에는 부석사의 현판 기문이 걸려 있는데, 사명당이 쓴 <안양루중창기>와 함께 방랑시인 김삿갓의 <부석사>란 시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끕니다. 번역된 글과 함께 새겨져 있어 소개해 보기로 합니다.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처)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    흰머리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    천지는 부평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風塵萬事忽忽馬(풍진만사홀홀마)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    백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안양루 누마루 밑으로 들어서자 캄캄하게 앞을 막고선 돌계단.

그 돌계단 위 누마루 천정 마루 바닥 사이 좁은 공간이 열리며 환한 빛 속에 극락세계 무량수전이 그 모습을 보입니다. 실재가 아니라 꿈인 듯 환영인듯...

 

 

 

<계 속>

 

 

 

 

 

 

 

 

■ 부석사의 가람배치와 건축

-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화엄의 통합사상 반영 / 소백산맥 능선마다 / 무량수전에 경배하듯

국립 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 선생은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명수필로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극찬한 바 있다. 건축 전문가들에게도 가장 뛰어난 사찰건축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영주의 부석사를 추천한다. 부석사에는 고려시대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오래된 국보급 문화재며, 빼어난 형태적 비례와 정교한 축조기술로도 대단한 가치를 갖는 건물이다. 그러나 건축가들의 찬사는 무량수전 때문 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무량수전 보다 더 거대한 건축이 있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수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대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건물로는 천왕문과 범종루, 안양루와 무량수전, 그리고 뒷산 숲속의 조사당과 응진전이 숨겨져 있을 뿐이다. 최근 요사채들과 성보전들이 신축되었지만 규모도 작고 한쪽에 자리잡아 그다지 주목할 대상은 못된다.

소백산 지맥의 한면을 차지할 만큼 광활한 대지에 불과 4동의 건물만이 서있다면, 마치 큰 호수에 가랑배 두세척이 떠 있는 것 같이, 보통의 솜씨로는 휑하고 스산한 가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절에 올라가면 모든 외부공간들은 꽉차 있다고 느끼고 만다. 왜일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대사는 소백산 깊숙한 곳에 부석사의 기틀을 닦고 화엄학을 전교하기 시작했다. 삼국으로 정립되어 600여년을 지속해왔던 한반도의 나라들이 드디어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 나라의 백성들은 문화적 차이와 적대감으로 완전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의상이 전교한 화엄학은 분열됐던 사회의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의상의 현실적 사상은 부석사의 가람구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가람은 깊고 급한 경사지를 십여개의 거대한 계단식 석단들로 바꾸고 그 위에 건물들을 앉혔다. 전문가가 아니면 지나치기 쉽지만, 그 석단들의 적절한 높이와 웅장함이 부석사 가람의 주인 역할을 한다. 건축적 공간은 내부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사지를 깍아서 석축을 쌓으면 바닥의 수평면과 석축의 수직면이 생긴다. 수평면과 수직면이 일정한 비례로 조화를 이루면 일정한 공간적 느낌이 생기고, 이를 건축적으로는 외부공간이라 부른다.

특히 한국건축은 좁은 내부공간보다는 시원한 외부공간을 중요한 요소로 여겨왔다. 흔히 우리가 마당이라고 부르는 뜰이 대표적인 외부공간이다. 마당은 건물들의 벽면 사이로 만들어지는 외부공간이지만, 부석사의 경우는 웅장한 석단들로 만들어지는 특별한 외부공간들이다.

소수의 건물들 밖에는 없지만 가람 전체가 꽉찬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석단들이 만드는 외부공간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부석사 건축의 주인공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석단들이다.

그러나 무작정 석단들을 쌓았다면 지금과 같은 공간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신개발지의 택지 개발 현장과 같이 오히려 더욱 삭막한 장소를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람의 건축가들은 석단의 위치와 높이를 철저하게 원래의 지형에 맞추어 쌓고 다듬었다.

십여개 석단의 높이들은 서로 다르고, 석단이 위치하는 간격도 다르다. 높은 단 하나를 오르면 다시 낮은 단들이 나타나고 다시 높아지는 등, 매우 리드미컬하게 걸음을 조절한다. 가람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산술적 거리는 매우 길고 고저차도 심하지만, 부석사를 방문하는 그 누구도 힘들어하지 않는다. 율동적으로 배치되고 세워진 석단들 때문이다. 석단들은 바로 자연 지형의 생김새에 따라 세워진 땅의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십여 개의 석단의 정점에는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놓여진다. 하나의 장엄한 소나타와 같이 율동적인 오름의 정점에 위치한 두 건물의 아름다움도 대단하지만, 일단 안양루에 오르던지 무량수전의 기둥에 기대서 지나온 행로를 돌아봐야 한다. 이 장면이 바로 의상이 무량수전을 바로 이 자리에 앉힌 궁극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는 눈 앞에는 구름 아래로 첩첩한 산들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곡선들을 겹쳐가며 대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이쩌면 이처럼 장대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대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자연의 풍경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그처럼 수많은 석단을 쌓아가며 이 위치까지 올라오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대자연의 선물을 품에 안기 위함일 것이다.

소백산맥의 수많은 산줄기와 능선들이 무량수전을 향해 경배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말했듯이 부석사는 가장 커다란 정원을 가진 가람이 됐다. 땅의 생김새에 충실하게 건축을 할 줄 알았고, 자연을 앞 뜰과 같이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던 의상스님과 그 후예 스님들께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출처 : http://hbmc.buddhapia.com/_Service/_ContentView/HB_CONTENT.ASP?bg_color=7A6B20&clss_cd=0000002262&image_folder=color_10&line_color=887925&menu_cd=0000000750&menu_code=0000000750&menu_type=&pk=0000137607&sub_pk=&top_menu_cd=0000000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