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금강연 건너 전나무 숲속의 피안, 오대산 월정사

모산재 2011. 12. 23. 21:43

 

10월 말, 월정사를 찾았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의 깊은 계곡, 사철 푸른 전나무 숲속에 앉은 월정사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잠겼다. 

 

평일인데도 단풍철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 산사의 고요를 밀어낸다. 그러나 비가 올 듯 날씨가 흐린 탓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에서는 들뜸보다 차분함이 느껴진다. 

 

 

금강교(金剛橋)를 건너면서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계곡의 아래쪽 일주문을 통해 들어서야 하지만, 주차장이 일주문과 멀리 떨어진 관계로...)

 

 

 

 

 

일주문 안쪽에 세워지는 첫번째 전각이 금강문(金剛門, 또는 인왕문)인데, 월정사에는 금강문이 없으니 금강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듯하다. 금강문에는 인왕이라고도 부르는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어 들어오는 악귀를 막도 물리친다.

 

 

 

금강교 아래로는 거울처럼 맑은 오대천이 흐르고 있다.

 

 

 

 

 

 

호수처럼 맑은 물, 계곡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 물을  금강연(金剛淵)이라 하는데, 울창한 계곡이라 한여름에도 서늘한 물이 흘러 천연기념물인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계곡 위쪽으로 가람의 중심(용금루-적광전)으로 연결하는 새 다리가 보인다. 이름은 만월교(滿月矯), 2009년에 세웠다고 한다. 

 

 

 

 

 

금강교 아래쪽의 계곡 풍경, 자연석으로 보를 쌓아 금강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월정사의 일주문에서 계곡을 따라 들어오는 길이 계곡 왼쪽으로 보인다.

 

 

 

 

 

금강교를 건너서 돌아본 풍경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선덕여왕 12년(643년)에 통도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의 짓게 된 내력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보살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 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당시에는 초가로 지은 임시 암자였는데, 그 뒤 신효·신의 스님이 머물고 이어 유연 스님이 암자를 새로 지으면서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1377년)와 조선 순조 때(1833년) 큰 불이 나 소실되고 중창되기를 거듭했다.

 

6.25 전쟁 중 1.4후퇴 때 군사작전이라는 이유로 국군에 의해 칠불보전을 비롯하여 10여 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때 양양 선림원지에서 가져온 동종(804)도 함께 불타버렸다. 그나마 부속 암자인 상원사가 방한암 선사의 헌신으로 소실을 면하여 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1964년에 탄허 스님이 적광전을 중창한 이래로 중건하면서부터 월정사의 전각은 차례로 모습이 갖추어졌다.

 

월정사는 빼어난 문화재가 많다. 국보로는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 상원사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 등 모두 넷이 있고, 보물은 월정사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상원사 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출토유물 12점(보물 제1375호) 등이 있다.

 

 

천왕문으로 가는 길

 

 

 

 

 

핏빛보다 더 붉은 단풍. 가을이 깊었다.

 

 

 

 

 

금강교를 지나 제일 먼저 만나는 문이 천왕문(天王門)이다.

 

 

 

 

 

1974년에 중건했다고 하는 천왕문 사면 벽에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벽화에는 중국 선종의 2대조인 혜가, 부모은중경, 자장율사, 지장보살, 포대선인, 기인 한산의 설화가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전각에는 수미산에서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네 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동방 지국천왕은 왼손에 비파를 들었고, 남방 증장천왕은 오른손에 보검을 들었고,

 

 

 

 

서방 광목천왕은 오른손에 용을 왼손에 여의주를 들었고, 북방 다문천왕은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금강루(金剛樓)가 나타난다.

 

 

 

 

누각 이층 누마루 한가운데 윤장대(輪藏臺)가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흘림체로 쓴 현판 가운데 글자를 읽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그게 '굳셀 강(剛)'자였다.

 

 

 

 

윤장대(輪藏臺)는 불경 들을 넣어두고 돌리도록 만든 회전 책궤인데,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는다고 한다. 국내 유일의 용문사 윤장대(보물 제684호)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용문사는 경기도 양평이 아니라 경상북도 예천에 있는 절을 가리킨다.)

 

 

 

 

 

금강루 아래에서 바라본 경내. 민화 속의 웃음을 웃고 있는 호랑이 석상이 보인다. 호랑이 조각가 오채현의 작품이다.

 

 

 

 

 

절마당으로 올라서자 왼쪽으로 성보박물관인 보장각, 오른쪽으로 ㅁ자형의 종무소인 설선당, 맞은편으로는 서별당이 보인다.

 

 

 

 

 

설선당을 돌아서자 법당 마당이 환하게 열리고 주법당인 적광전과 국보인 팔각구층석탑이 나타난다.

 

 

 

 

 

'대적광전'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적광전(寂光殿)은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봉안하는 전각이다. 주불전이 아닐 때는 비로전이라고도 하고(해인사), <화엄경>에 근거한다는 뜻에서 화엄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송광사).

 

 

 

 

적광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매우 큰 법당으로, 외부 기둥 18개는 오대산 자생 소나무 16개와 괴목 2개,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 자생 전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이 자리엔 과거 7불을 모신 칠불보전(七佛寶殿)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중 작전이라는 이유로 국군에 의해 불태워졌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적광전'이라는 현판 글씨는 주련 글씨와 함께 현재의 월정사를 중창한 탄허 스님이 쓴 것이라 한다. '적광(寂光)'은  '진리의 빛이 가득하며 고요가 깃든 세계'라는 뜻을 가진 말이니...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거하는 세계를 가리킨다.

 

 

 

 

 

대적광전에는 원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보신불인 아미타불·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여 연화장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찰에서는 아미타불 대신 노사나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두어 5불을 안치하기도 한다.

 

그런데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적광전임에도, 이곳 적광전은 특이하게도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1964년 만화스님 법당 중창 당시에는 현판이 대웅전이었는데,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적광전으로 고쳐 현판을 달았다.

 

 

 

 

 

적광전 맞은편으로 성보박물관인 보장각(寶藏閣)용금루(湧金樓)가 보인다.

 

 

 

 

 

성보박물관에는 월정사의 국보와 보물 등의 귀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1977년 중건한 용금루(湧金樓)는 화강석 기둥 위에 누마루를 올렸다. 본래 팔각구층석탑 가까이 있던 것을 199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금강루와 함께 법당을 향하는 누각이 둘 있는 것도 월정사만이 가진 독특한 가람 배치라 할 수 있다.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의 건물은 갖가지 문양의 단청과 인물상이 어울려 매우 화려하다.

 

 

 

 

 

 

 

적광전 앞마당에는 고려 초기(10세기) 작품으로 국보 제 48호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팔각구층석탑은 연꽃무늬를 새긴 이층 기단과 팔각 구층의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세련된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높이 15.2m로 우리 나라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석탑이다.

 

몸돌은 모서리마다 귀기둥이 새겨지고, 옥개석은 밑은 수평을 이루고 있고 추녀 끝이 살짝 위로 들려 있는데 처마 끝에는 풍령(風鈴)이 달려 있다. 팔각은 불교의 실천수행에 기본이 되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을 입어 1970년 해체보수를 통하여 1층 2층 6층 9층을 새 돌로 갈았다. 당시에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구가 발견이 되었다. 은제의 불상 1구와 4점의 청동 거울, 금동 향합과 향주머니, 진신사리경 등 총 12점의 유물들은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그리고 탑 앞에 눈길을 끄는 석조보살좌상.

 

팔각구층석탑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향로를 들고 꿇어 앉아 공양하는 보살상이다. 입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는 이 보살은 약왕보살(藥王菩薩)이라고 한다.

 

 

 

 

 

약왕보살은 약을 베풀어 중생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구완하고 치료하는 보살이다. 형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머리칼은 보발과 수발(垂髮)을 갖추었으며, 천의를 걸치고 영락으로 장식한 몸은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다. 왼손은 주먹을 쥐어 무릎에 얹고 오른손으로는 구름 위의 태양을 가리킨다. 왼손은 '정(定)', 오른손은 '혜慧)'를 상징하는 것이다.

 

* 정혜쌍수(定慧雙修) : '정(定)'은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는 선정, '혜慧)'는 현상 및 본체를 관조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선정과 지혜를 따로 닦을 것이 아니라 병행해야 한다는 불교 수행법으로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넘어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약왕보살상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평창월정사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이란 이름으로 성보박물관(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좌상의 높이는 1.8m.

머리에는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으며 갸름하면서도 복스러운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가 어려 있다. 머리칼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고, 목에는 아주 뚜렷한 3줄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목걸이는 매우 섬세하고 곱게 조각하여 가슴에까지 늘어지게 장식하였다.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은 얇고 가벼워 몸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은 모두 희미하다. 오른쪽 팔꿈치는 동자상을 받침으로 고이고 있으며 동자상의 머리에 팔꿈치를 올려 놓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석조 보살좌상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같은 형식이지만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하여 조형상 다소 불균형스런 모습이다. 그러나 개태사와 신복사지 탑 공양상과 더불어 고려시대 화엄종 계통사원에서 만든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며, 당대 불교사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글, 사진 : 문화재청>

 

 

 

적광전 서쪽에는 삼성각(三聖閣)수광전(壽光殿)이 자리잡고 있다.

 

 

 

 

삼성각(三聖閣) 내부의 탱화. 독성 나반존자 탱화, 칠성 탱화, 산신 탱화가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수광전은 흔히 '극락전'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 부르기도 하는 전각으로 서방정토(극락)를 지키는 아미타불을 모신 곳이다. 그런데 수광전의 측면에는 지장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어, 이 전각이 극락전과 지장전을 겸하고 있어 사후세계를 위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정면 중앙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삼존상을 봉안하고, 뒤에는 극락의 법회 장면을 묘사한 목각탱화 극락회상도가 있다.

 

 

 

 

 

서쪽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뒤에는 지장시왕 목각탱화를 두었다.

 

 

 

 

그리고 동쪽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을 금선묘(金線描)의 탱화로 봉안하고 있다.

 

 

 

 

인로왕보살은 영가천도의식에 바탕을 두고 불화에 등장하여 지옥의 중생을 극락으로 이끄는 인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관음보살·지장보살과 함께 극락으로 인도하는 3대 보살로 자리잡고 있다.

 

 

 

적광전 뒤 축대 위에는 진영각(眞影閣)개산조각(開山祖閣)이 자리잡고 있다.

 

 

 

 

 

개산조각은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진영을 모신 전각으로,  1958년 중건했으니 월정사 당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월정사의 자장율사 진영은 최근에 제작한 것으로, 1804년에 제작된 통도사의 자장율사 진영이 가장 오래 되었다. 

 

진영각은 근현대의 스님들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월정사에 주석한 조계종 초대 종정이신 한암 스님, 현대불교학의 아버지이신 탄허 스님,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지암 스님, 6.25의 전란후 월정사를 중건하신 만화 스님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 자장율사 진영

 

 

 

종고루(鐘鼓樓)는 적광전 정면 법당 마닫 끝에 자리잡고 있는 2층누각이다. 종고루 아래 석경원(碩經院)은 불교 서적과 불교 용품을 판매하고 있다.

 

 

 

 

 

범종, 목어 운판, 법고 등의 불전사물을 봉안하여 새벽 예불과 저녁 예불 때 사용한다. 이 사물은 모두 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고, 해탈성불을 이루게 한다는 교화의 의미를 가진다. 즉 법고를 두드려 부처님의 법으로 축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목어는 잠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와 같이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의미를 지녔고, 물속 중생의 제도를 기원한다. 운판을 치는 것은 날짐승을 위한 기원이며, 범종을 치는 것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사람 등 일체 중생의 구제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종고루 오른쪽에는 오대산의 영기가 서린 샘물을 제공하는 불유각(佛乳閣)이 있다.

 

 

 

 

 

'부처님의 젖을 마시는 전각'은 월정사를 찾는 이에게 시원한 감로수를 제공하고 있다. '불유'는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끝없는 자비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천성산 내원사에 도 같은 이름의 전각이 있다.

 

 

 

절 마당 끝 담장 너머에는 백당나무 붉은 열매가 보석처럼 영롱하게 달렸다.

 

 

 

 

 

 

바쁘게 돌아나오는 길에 들여다본 전각 하나.

 

적광전 동쪽에는 종무소로 사용되는 ㅁ자 형의 당우 설선당(說禪堂)이 있는데, 그 동쪽에는 대법륜전(大法輪殿)이라는 전각이 있다. 

 

 

 

 

 

대법륜전은 '큰 법을 굴리는 집'이란 뜻으로 사찰 강당이다.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한 역사적 사실에서 당호를 지었다고 한다. 1층에는 강당이 지하에는 공양채가 있다. 2004년에 지은 건물이다.

 

 

 

 

 

 

아이들을 인솔하느라 성보박물관인 보장각을 돌아보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음이 너무도 아쉽게 느껴진다.

 

보장각은 국보인 상원사중창권선문을 비롯하여 월정사 팔각국층석탑 사리구 11점, 상원사 문수동자상 복장 유물 23점을 비롯하여 강원도유형문화재 20여 점, 말사에서 이운한 조선후기 불화와 불상, 전적, 근대 한암, 탄허 스님의 유품에 이르기까지 약 500여 점의 성보들을 소장하고 있다.

 

 

 

 

더보기
※ 월정사의 국보들

 

■ 목조문수동자상 (국보 제 221호)

 

나무로 조성된 불상으로 높이 98센티미터. 이 불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1984년 7월 문수동자상에서 조성발원문 등 23점의 복장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불상이 조선 세조 12년(1466)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보관이 없는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가렸으며 얼굴은 양 볼을 도톰하게 하여 천진해 보인다. 이목구비는 온화하고 적당히 가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인다. 가슴에는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치고 오른편 가슴 쪽으로 치우쳐 드러난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가슴 밑으로 띠를 매었는데 옷주름이 명확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약지를 맞댈 듯 한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고려시대 불상에서 조선 전기 불상으로 전개되는 불상 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 발원문과 함께 나온 조선시대 초기의 의상과 다수의 불경은 조선 복식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수동자상은 조선 세조 대왕이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렸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등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병이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낫기를 발원하였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가 목욕하고 있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승(童僧)에게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승이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등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조가 당시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렸으나 잘 그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했다. 세조가 이러저러한 모습을 설명해 주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 그리겠다고 설명도 듣지 않았다. 이윽고 그려온 문수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고 기쁜 마음에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하자 노스님은 "나는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 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결국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 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23점의 복장유물은 불상에도 사리를 보장하고 복장을 만들어 넣는 매우 드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유물로는 의숙공주발원문, 문수상등중수발원문, 백지묵서진언집(白紙墨書眞言集) 두루마리 대방광불 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대방강원 각수다라요의경 , 육경합부, 명주적삼, 생명주적삼, 금동제 사리함, 사리, 수정구슬, 백색수정 사리병, 세조의 어의御衣를 싼 노랑색 명주 보자기 등이 있으며 전시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하고 있다.

 

 

■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 데 없는 이 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다. 조선 태종 때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다시 옮겨진 것으로,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 범종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용뉴(龍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종신(鐘身)에 있는 상대, 하대, 4유곽(乳廓)의 문양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2 ~ 4인의 작은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卷紋)이 새겨졌고, 종복(鐘復)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연화문(八瓣蓮花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채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 년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종 끝부분이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鐘身形), 상대와 하대 및 4유곽 등의 주조적인 특징은 한국 종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어 이후의 모든 종이 계승되었다.

 

이 종의 소재 사명(寺名)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경북 안동 본부(本府) 문류(門樓)에 걸려 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종은 안동 근처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가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 때 안동 문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 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 곳의 유곽 안에 1곽(廓)의 종유가 하나 없다. 이러한 고사는 대종 운반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지만 민속신앙의 한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 상원사 중창 권선문 (국보 제 292호)

 

 

혜각존자 신미(信眉)스님이 학열(學悅), 학조(學祖)스님과 함께 상원사를 중수하려 하자 조선 세조가 이 이야기를 듣고 쌀, 무명, 베, 채색 등을 보내면서 그 취지를 함께 적은 글이다. 권선문은 두 책으로 되어 있는데 한 책은 상원사 중창권선문이며, 한 책은 세조가 상원사 중창 취지를 적은 어첩이다. 어첩에는 세조와 왕세자의 수결과 인기가 있고, 효령대군을 비롯하여 여러 종실과 신하들의 이름과 수결이 있다. 다른 한 책인 권선문은 한문으로 쓴 다음에 바로 옆에 한글로 번역했으며 자성왕비윤씨慈聖王妃尹氏라고 쓰고 인기를 찍고 왕세자, 세자빈, 한 씨 이하 궁인들의 인기를 찍고 뒤에 신미 등의 수결이 있다.

 

훈민정음 제정 이후 제작된 판각이나 활자본 책자는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직접 붓으로 쓴 것으로는 이 한글 권선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의 한글 서체를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왕가에서 직접 사찰에 보낸 귀중한 문서일 뿐 아니라 세조와 신미 등 고승들과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겉표지는 붉은색 바탕에 당초문이 들어 있는 비단으로 되어 있다. 크기는 세로 45.5센티미터, 가로 29.5센티미터로 접혀 있는데 펼친 총 너비는 810.5평방 센티미터이다. 월정사 성보박물관(보장각寶藏閣)에 소장되어 있다. - 출처  : 월정사 홈페이지>

 

 

 

 

 

※ 월정사 전각 배치도(출처: 다음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