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영주 부석사 (3) 조사당과 벽화, 자인당의 석불좌상, 단하각과 단하소불

모산재 2012. 2. 5. 14:33

 

조사당으로 오르는 오솔길로 접어들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바로 부석사라는 절이 주는 매력입니다.

 

무량수전 아래로 흘러내리는 전각들의 모습은 보고 또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다만 늦은 오후의 햇살 속에 소백의 연봉들이 흐릿한 내에 잠겨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조사당으로 오르는 숲속 오솔길입니다.

 

 

 

완만한 오솔길을 오르다보면 급경사를 이룬 언덕 아래에서 갈림길이 나 있습니다. 바로 오른쪽 비스듬히 나 있는 계단길을 오르면 조사당이 나타납니다.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융국사가 세운 것이며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친 것이라고 합니다.

 

 

 

671년, 당 고종이 신라를 침공한다는 첩보에 급거 귀국한 의상대사는 낙산사를 창건하고 화엄사상을 펼칠 가람터를 찾아 다니다 바로 이곳에 터를 잡고 부석사를 창건하게 됩니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집은 작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지붕을 받치는 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무량수전에 비해 아주 간결한 양식입니다.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 칸에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커다란 광창을 설치해 놓은 것이 눈길을 끕니다.

 

 

 

건물 안에는 의상대사의 초상이 가운데 모셔져 있고 뒷벽면에는 일대기를 그린 탱화가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벽에는 선묘의 초상도 있는데, 이들 그림들은 모두 조성된 지 얼마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원래 이 내부 벽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사천왕상과 범천과 제석천 등 천계의 신인 천부상(天部像)을 그린 벽화가 있었습니다.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의 채색 벽화로 지금은 동쪽 언덕에 있는 부석사박물관에 따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럼 박물관에 보관중인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를 먼저 볼까요. 보존 상태도 좋지 않은 데다 보호 유리에 반사되는 조명 때문에 제대로 담기지 않아 아쉽네요...

 

이 벽화는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 등 천부상을 6폭으로 나누어 그렸습니다. 

 

 

 

벽화의 크기는 각각 길이 205㎝, 폭 75㎝ 가량이며,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습니다. 법천과 제석천 등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입니다.

 

제석천, 서방광목천왕, 남방증장천왕

 

 

동방지국천왕, 북방다문천왕, 범천

 

 

범천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벽화를 그린 연대는 건물을 세운 시기와 비슷할 것으로 보이며, 현존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조사당 오른쪽 처마 밑에는 철망에 갇혀 보호되고 있는 관목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이 나무가 아기를 낳는데 효험이 있다는 속신으로 수난을 당하자 저렇게 처마까지 쇠그물을 쳐서 보호하게 된 것이라 합니다. 전국의 석불상의 코들이 수난을 당한 것과 같은 맥락이니 아이를 얻기 위한 조상들의 필사적인 분투, 이제는 그리운 전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나무를 '선비화(禪扉花)'라고 하는데, 원래의 나무 이름은 중국 원산의 콩과 관목인 골담초입니다. 금작화(金雀花)라고도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지팡이로 열반에 드실 때, "이 지팡이를 비와 이슬에 맞지 않는 곳에 꽂아라. 지팡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면 국운이 흥왕할 것이다."고 하여 조사당 축대에 꽂았더니 잎이 나고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과연 나라가 태평할 때는꽃이 피었으나 일제 때는 꽃이 피지 않았는데 8.15해방과 함께 30여 년만에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가 의상대사 시절에 심어진 나무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수령이 500년은 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조사당을 둘러본 뒤 다시 계단을 내려와 서쪽의 자인당과 응진전으로 향합니다.

 

산모롱이를 돌아 걷는 호젓한 길, 부석사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두 개의 작은 능선을 돌아들면 자인당(왼쪽)응진전(오른쪽) 전각이 나타납니다.

 

 

 

자인당(慈忍堂)은 원래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인데, 내부에는 1957년 부석사 동쪽 1.5km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조 삼존여래 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삼존불은 다른 이름으로 보물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여래는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1636호)이라고 불리며, 좌우의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은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이라 불립니다.

 

 

 

삼존 중 비로자나불 2구만 1963년에 먼저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2010년 뒤늦게 가운데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보물로 지정된 것입니다. 이들 여래상은 크기와 양식이 비슷하며 특히 대좌 가운데 8면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조각한 공통점으로 보아 삼존불로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운데 석가여래좌상은 광배가 없어진 모습입니다. 동그란 얼굴,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7사자, 합장 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대좌 뒷면에 지장보살상이 새겨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는데, 볼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동쪽의 비로자나불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모습인데, 두 손이 없어진 것을 감쪽같이 복원해 놓았습니다. 두 팔이 가슴 쪽으로 올라가 있는 것에서 지권인의 수인을 한 비로자나불로 추정한 것입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당시 유행하던 얇게 빚은 듯한 촘촘한 평행 옷주름이 표현되었습니다. 광배에 새겨진 화불들도 눈길을 끕니다.

 

 

 

서쪽의 여래상은 동쪽의 여래상보다 좀 더 당당하며 불신의 선들도 부드러운 편입니다. 이 불상도 손 부분을 보수 복원해 놓은 모습입니다.

 

 

 

이 불상들은 단아한 모습, 평행의 옷주름선 등에서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동쪽의 응진전(應眞殿)석가모니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내부에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십육나한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 16나한

 

16나한은 이승에 거하며 부처의 정법을 지키는 석가모니의 제자를 상징한다. 16나한은 핀돌라 브하라드 바아쟈, 카나카밧사, 카나카브하라드바아쟈, 수빈다, 나쿨라, 브하드라, 카리카, 바즈라푸트라, 지바카, 판타카, 라후라, 나가세나, 앙가쟈, 바라나밧시, 아리타, 쿠다판타카이다.

 

16나한은 당나라 때 현장법사에 의해 중국에 전해지면서 숭앙의 대상이 되었고, 이 신앙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지면서 크게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후반 말세신앙과 함께 성행하였으며, 신라의 사불산(四佛山)에 16나한의 상이 봉안된 이후 많은 불화나 탱화로 그려졌다.

 

 

 

 

응진전 뒤쪽에는 최근세에 지은 한 칸짜리의 작은 건물 단하각(丹霞閣)이 자리잡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단하(丹霞)라면 '붉은 노을'인데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국어사전에는 '단하'를 '햇빛에 비치는 붉은빛의 구름 기운(雲氣)'이라 풀이하고 있을 뿐, 이 전각의 의미와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이 땅에는 단하각이라는 이름의 전각을 둔 절들이 적잖이 존재하는데, 대개는 산신각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건물 안을 들여다보니 아주 작은 나한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왼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쥐라고 합니다. 

 

그래서 봉황이 알을 품는 봉황산에 봉황의 알을 노리는 쥐가 들끓어 쥐를 쫓는 의미로 이 나한상을 모셔 놓았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나한상이 봉황산을 지키는 산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단하(丹霞)'라는 전각 이름에서 목불을 쪼개 땠다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이라는 고사의 주인공 단하천연(丹霞天然 ; 739-824)를 모신 곳으로 보고 선종과 연관이 있는 전각이라는 생각입니다.  

 

단하천연 스님은 당대(唐代)의 선승으로 장안에 관리가 되려고 갔다가 한 선승을 만나 승려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단하소불'의 고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하천연 스님이 낙양의 혜림사에 머물 때 너무 추웠다. 그러자 스님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木佛)을 들고 나와 도끼로 쪼개어 불을 지폈다. 주지 스님이 이 사실을 알고서 "무슨 이유로 부처님을 태우는 거요?" 하고 단하 스님을 꾸짖었다. 그러자 스님은 "나는 부처님을 다비해서 사리를 얻으려고 합니다." 주지 스님이 "나무토막에 무슨 사리가 나오겠습니까?"라고 하자 단하 스님은 "그렇다면 왜 나를 꾸짖습니까?"라 대답하였다. 이에 주지 스님은 그 자리에서 눈썹이 몽땅 빠져 버렸다. 

 

말년에 그는 덩저우(鄧州) 단하산(丹霞山)에 살다가 86세에 목욕하고 갓쓰고 지팡이를 들고 나앉으며, "자 나는 간다. 신을 신겨 다오."하고 신 한 짝을 발에 걸친 채 땅에 내려서는 순간 입적하였다.

 

중국의 속설에는 거짓말을 하면 눈썹이 다 빠져 버린다고 합니다. 사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부처님이 아니라 나무토막일 뿐인데 그 나무토막을 태운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일이냐는 반문, 단하 스님의 이 물음에는 부처가 아니라 우상을 믿는 어리석음에 대한 준열한 풍자가 들어 있습니다.  

 

단하각을 끝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 하산합니다. 

 

 

오솔길에서 벗어나 무량수전으로 접어드는 곳에서 아까는 보지 못했던 부석사 최고의 탑을 만납니다.

 

 

 

그 어떤 크고 높은 탑보다도 더 따스하게 느껴지는 탑,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쌓은 돌탑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들이 들어 있을까요. 선묘의 사랑보다도 더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석사 여행은 이렇게 끝내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