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강화나들길(5) 길정저수지 지나 이규보묘까지

모산재 2011. 12. 20. 20:17

 

원래 계획은 전등사에서 출발하여 이규보 묘를 거쳐 고려 능묘인 곤릉, 석릉을 거쳐 가릉까지 걷는 것이었는데,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길정저수지를 지나면서 길을 놓치면서 헤매어야 했기 대문이다. 

 

 

어쨌든 멋진 한옥식 온수리성공회성당을 둘러보고 길정저수지를 향해 걸을 때만 해도 시간은 넉넉해 보였고 환한 햇살 아래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들판 풍경은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싶었다.

 

 

 

 

 

 

그림 같은 가을 들녘을 지나니 드디어 길정저수지가 나타난다.

 

 

 

 

 

 

강화도 최대의 저수지라는 길정저수지.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저수지라는데, 붕어 잉어 메기 가물치 등 어종이 다양하고 특히 겨울 배스 낚시로 유명하다 한다. 저수지 축조 시기도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나들길은 길정저수지를 왼쪽으로 끼고 들판의 구릉을 따라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길정저수지 북쪽으로 보이는 산이 진강산(441m)이다. 강화도에서 세번째로 큰 산이라고 하는데, 고려 능묘들이 모두 저 산 기슭에 있다.

 

저 산의 정상과 능선에서 남쪽의 마리산과 서쪽의 석모도를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멋지다고 한다.

 

 

주변의 붉은 황토 들판 때문에 쪽빛 호수는 하늘빛보다도 더 푸르고 길정저수지는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호숫가의 길은 또 이렇게 숲길이 되기도 한다.

 

 

 

 

 

숲길을 지나자 시설 건물들이 흔히 보이고...

 

 

뜻밖에 길가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마시멜로(Althaea officinalis | marshmallow)를 만난다. 마시멜로는 유럽, 서아시아 원산의 아욱과 허브식물로 뿌리가 기관지나 폐 등 호흡기 질환에 치료 효과가 좋다는 식물.  재배하는 것이 야생화한 것일까...

 

 

 

 

 

그리고 부근에는 비누풀이라고도 하는 거품장구채로 보이는 꽃도 만난다. 꽃대가 길어서 거품장구채가 아닐까 싶었으나 넓고 큰 잎과 잎맥이 아무래도 거품장구채가 맞는 듯하다.

 

 

 

 

 

그런데, 결국 무심하게 길을 따라 곧장 걷다가 이규보 묘를 향해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을 놓치고 만다. 1번 군도를 만난 지점에도 나들길을 표시한 리본이 있었지만, 그뿐 어디로 연결되는지 주변에는 어떤 다른 표지도 만나지 못한다.

 

민가에서 만난 아저씨께 물어도 나들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이규보 묘를 물었더니 다른 방향으로 되돌아가야되는 상황이다.

 

 

호국교육원을 지나 불온고개까지 헤매다 다시 되돌아와 까치골로 들어서기까지 많은 시간이 지나간다. 바로 앞 3거리에서도 표지가 없어 오른쪽 길로 접어든 것인데, 또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다.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마을 주민에게 확인하고 다시 산등성이 길로 올라서도 길을 찾지 못하고 위의 3거리로 돌아나오니 이미 해는 기고 있었다. 

 

 

▲ 마을에서 만난 쉬나무. 붉은 열매가 벌어져 있다.

 

 

 

삼거리에서 왼쪽길로 들어섰고 길은 곳곳에서 갈라지는데, 나들길 표지를 발견하지 못한다. 밭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엑게 이규보 묘의 위치를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참 막막한 심정인데, 무턱대고 느낌을 따라 가다보니 야산 숲속에 연등선원이 나온다. 사람들의 흔적도 없이 고요하다. (나중에야 이곳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템플스테이를 하며 공부하는 곳이라는 걸 알았다.)

 

연등선원 가까운 곳에 강화나들길 표지가 하나 있었지만 또 그뿐이다. 길은 곳곳에서 갈라지건만 아무런 표지도 없다.

 

 

이렇게 헤매다보니 벌써 날은 어두워지고 있다. 결국 나들길 안내 팸플릿에 적혀 있는 관광개발사업소에 전화를 해서야 겨우 이규보 묘로 향하는 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도 또 갈라지고 있어서 또 헤매야 했다. 

 

 

 

악전고투 끝에 이규보 묘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도 어두워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왼쪽 언덕에는 재실이 자리잡고 있고, 이규보의 묘는 언덕의 위쪽에 있다.

 

묘역은 비교적 넓게 조성되어 있지만, 이규보 묘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고 소박한 모습이다. 몇몇 석물을 제외한다면 이 시대 보통 사람들의 무덤을 연상시킨다.

 

 

 

 

 

묘는 아래쪽에 호석을 둘렀고,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서 있는데,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과 석양(石羊), 문인석과 무인석, 묘갈(墓碣 :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 죽은 사람의 성명 ·세계(世系) ·행적, 출생 ·사망 ·장례의 연월일, 자손의 개황 등을 새긴 무덤의 표지)이 배치되어 있다.

 

 

이규보 묘갈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석양(石羊)

 

 

 

 

 

이규보 묘에서 내려다본 풍경. 나들길은 앞으로 난 길을 통하여 길직리로 내려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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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보(1168∼1241)

 

아홉 살 때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으며 시를 짓는 신동으로 알려졌다. 소년시대 때부터 술을 좋아하였고 자유분방하였으며 딱딱한 과시 글에 마음에 두지 않아 과시에는 20대 초반까지 합격하지 못하였다. 무인정권에 염증을 느끼며 노장사상에 심취하던 강좌칠현(江左七賢 : 이인로·오세재·임춘·이담지·조통·황보항·함순)과 어울렸다. 그러나 동참의 권유에는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이런 글을 보냈다고 한다.

 

대나무 아래의 모임에 참여하는 영광을 차지하고서 술을 함께 마셔서 기쁘지만, 칠현 가운데 누가 씨앗에 구멍을 뚫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중국의 죽림칠현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집의 좋은 오얏 씨앗을 누가 가져다 심을까 염려해 모두 구멍을 뚫어 놓았다는 고사를 빗댄 말이었다. 속으로는 벼슬길을 바라면서 겉으로 초월한 듯 살아가는, 은거하면서 자기 잇속 챙기는 이에 대한 야유였던 것이다. 

1189년 네 번째 응시 끈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예부시에서 동진사로 급제하였지만 관직을 받지 못하자, 25세 때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시문을 짓는 등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어떠한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낙토)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었다. 1193년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빈궁에 몹시 시달리면서 무관자(無官者)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1199년 사록으로서 전주목에 부임하였으나 봉록 액수가 적었고 행정잡무가 번거로웠다. 상관과 부하는 태만하였으며 동료들이 중상을 하는 등 관직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결국 동료의 비방을 받아 1년 4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처음에는 자조하다가 다음은 체념하고 결국 타율적으로 규제받는 것을 숙명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202년 경주와 청도 운문산 일대의 농민폭동 진압군의 수제원(修製員)으로 자원하여 종군하였다. 현지에서 각종 재초제문(齋醮祭文)과 격문, 그리고 상관에의 건의문 등을 썼다. 1년 3개월 만에 귀경했을 때, 상이 내려질 것을 기대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문필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꼈다. 

무신정권은 최충헌에 이르러 방향을 잡고 있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실권을 잡은 것이 1196년, 이규보의 나이 28세 때였다. 

최충헌의 동향을 유심히 살피던 이규보는 최충헌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이 갈망은 40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이인로 이공로 등 당대 문장가와 겨루었던 '모정기(茅亭記)'가 최충헌의 마음에 들어 그의 뜻은 비로소 이루어져, 직한림(直翰林)으로 발탁되었다. 그리하여 문필을 통한 양명과 관위 상의 현달이 함께 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다시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1215년(고종 2) 드디어 우정언으로서 참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출세에 있어서 동료 문사들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쾌적한 문관생활을 만끽하였다. 금의(琴儀)를 우두머리로로 하여 이인로·진화·유충기·민광균 등과 문풍(文風)의 성황을 구가하였다. 1217년 우사간이 되었으나 부하의 무고를 받아 정직당하고,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에는 좌사간마저 면직되었다. 이 같은 사태로 자신의 사고와 태도를 바꾸어 보신에 특별히 마음을 두게 되었다. 

1220년 최충헌이 죽자 최이에 의해 귀경하게 되면서 최이와 절대적 공순관계를 맺게 되었다. 일체의 주견 없이 다만 문필기예의 소유자로서 최씨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뒤 10년간은 그가 고관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시간이었다. 1230년 팔관회 행사 사건에 휘말려 위도에 유배되었다 8개월 만에 풀려나와 산관(散官)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 작성을 전담하였다. 

이규보는 입신출세주의자이며 보신주의자로 평가되고 있다. 평론가 김현은 이규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으로 비판한다.

 

이규보로 대표될 수 있는 무인정권하의 기능적 지식인은 권력에 대한 아부를 유교적 이념으로 호도하며, 그것을 유교적 교양으로 카무플라지한다. 가장 강력한 정권 밑에서 지식인들은 국수주의자가 되어 외적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여 속으로는 권력자에게 시를 써 바치고 입신출세의 길을 간다. 그가 입신출세하는 한, 세계는 여하튼 태평성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거세다. 조동일은 다음과 같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하는 것을 주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회가 오자 당당하게 나아가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최씨정권의 문인들 가운데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 점을 두고 이규보를 낮게 평가하려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벼슬을 해서 생계를 넉넉하게 하자는 것은 당시에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었다. 정권에 참여해 역사의 커다란 전환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 잘못일 수 없다. 무신란이 중세전기를 파괴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규보는 중세후기를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무인정권의 두 번째 실권자 이의민이 10년째 권력을 잡고 전횡을 부리던 시절, 이규보는 서사시 '동명왕편'을 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귀신이고 환상이라 생각했는데, 세 번 거푸 탐독하고 나니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어, 환상이 아니고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고 신(神)이었다.

 

김부식이 환상이라고 버린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이야기를 우리 민족사의 줄기로 살려내고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왕의 모습을 통해 후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자는 뜻을 품은 것이었다.

이규보의 문학론은 '기의(氣意)'와 '신의(新意)'에 이르러 하나의 봉우리를 이룬다. 기의는 기골(氣骨)와 의격(意格), 신의는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말한다.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 바람직한 문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의는 '동명왕편'으로 현실화했다. 더불어 용사(用事)로 가득한 기존의 시를 비판한 것이 신의이다. 용사는 과거의 사적이나 시구에서 따와 시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것이 지나쳐 인순과 답습에 지나지 않는 문학으로 도배되는 현실이었다.

이규보가 재미난 비유로 쓴 ‘시에서 마땅하지 않은 아홉 가지’라는 글이 있다. 그 가운데서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와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가 돋보인다. ‘재귀영거’는 귀신을 수레에 가득 싣고 다닌다는 말로, 죽은 이들의 이름을 한없이 나열하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옛날 것은 무조건 좋다 여기고,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은 표현을 슬쩍 훔쳐서 자기 것이라 말했다가 금방 들통 나는 어리석음에 대해 통렬히 비난한다. ‘졸도이금’이다. 이것은 바로 지나친 용사에 대한 비판이고, 여기에서 신의로 새로운 세기를 건설하는 방향이 잡혔다.

 

 

※ 이규보의 작품들

 

■ 국선생전(麴先生傳)

술을 의인화한 가전체 작품. 시대배경은 위 · 진. 주인공 국성(麴聖; 청주를 가리킴)의 조상은 원래 농사를 짓고 살았다. 아버지는 차, 어머니는 곡씨(穀氏)의 딸. 국선생은 총명하고 뜻이 커서 당시 도잠 · 유영과 사귀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 벼슬도 높아졌다. 그의 아들 삼형제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방자히 굴다가 모영(毛潁: 붓을 의인화한 것)의 탄핵을 받아 아들들은 자결하고 국선생은 탈직되어 서민으로 떨어진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도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고, 그 뒤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 폭병(暴病)으로 죽는다. 이 작품은 술과 인간과의 미묘한 관계와, 그리고 인간의 성쇠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 청강사자현부전(清江使者玄夫傳)

거북을 의인화한 가전체 소설. 현부(玄夫 즉 거북)의 선대는 신인(神人)이었고 대대로 국가에 공적이 있었다. 그는 은둔한 선비로 점을 잘 쳤고, 임금이 불러도 자연세계가 좋다고 나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때 세상에 나와서 송(宋) 원왕(元王)에게 크게 존경을 받고 진신(縉紳)간에도 숭배를 받아 그의 형상을 금으로 새겨 걸고 다니는 자들까지 있었다 한다. 그의 아들중에 한 아들은 오월(吳越)간에 은거하여 동현선생(洞玄先生)이라 자호(自號)했고, 두 아들은 사람에게 잡혀 삶아 먹힌바 되었다. 무(巫) · 불(佛) 혼합의 저급한 신앙이 그 내면 생활을 규제하고 있던 고려시대 사상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노무편(老巫篇)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된 장편(長篇) 고시(古詩). 작자가 개성에서 살 때, 그의 이웃에 무당이 살았는데, 요사스럽고 괴롭게 느껴 오던 중 마침 관에서 이들을 성외(城外)로 내쫓았다. 이것을 시원스럽게 여기면서 그들이 태고의 순박한 풍속을 지키지 못하고 음무(淫巫)로 타락해버린 것을 아쉬워하며 지은 시다. 그가 보고 들은 무당의 의식을 서술하고 있어 무속연구에 자료적인 가치가 있다.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아들 함(涵)이 편집 간행한 책이다. 고종 38년(1251)에 다시 증보 개간, 조선시대에도 수차 간행되었다. 전집(前集) 41권, 후집(後集) 12권의 자못 방대한 문헌으로 국문학사상 중요한 개인 작품집일 뿐 아니라 귀중한 사료다. 예컨대 〈동명왕편병서(東明王篇倂序)〉에서 〈구삼국사〉가 있었다는 것, 〈대장경각판기고문〉에 의해 팔만대장경 판각의 연혁,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에 의해 금속활자의 사용 등, 역사상 중요한 사실이 이 책으로 인해 밝혀지게 되었다.

 

■ 동명왕편(東明王篇)

구전해 오던 고구려 건국 시조인 동명왕의 설화를 도합 4천자에 가까운 5언 장편 한시로 엮은 서사시이다. 서문에, "나는 처음 동명왕의 설화를 귀(鬼)와 환(幻)으로 여겼으나, 연구를 거듭한 결과 귀(鬼)가 아니라 신(神)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것을 시로 엮어 천하에 펴서 우리 나라가 본래 성인지도(聖人之都)임을 널리 알리고자……"라고 하였다. 민족의 역사를 소재로 한 서술체의 장시가 이때에 쓰여진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고려 때 연이은 외국의 침략에 부딪친 민족적 저항의식이 문학면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

작자 이규보가 백운거사로 자호(自號)하고, 그 호를 가지게 된 내력과 이 시기의 그의 인생관 내지 사상을 쓴 소품적인 글. 원래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자호했는데, 이것은 그 스스로 거문고와 시와 술을 지독히 좋아한다는 뜻이었으나, 이것을 감당할 수 없어 백운거사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구름처럼 얽매이지 않고 한가로우면서 변화무쌍한 뜬구름의 정신을 본받아 무하유향(無何有鄕)에 들어가 자락(自樂)하겠다는 뜻에서 백운거사를 취했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세계와 비세속적인 세계 사이를 방황하는 작가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일단 비세속적인 세계를 지향했으나, 그 이면에는 현실 세계로 향할 수 있는 변모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다.

 

■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

청년 이규보가 천마산에 은거했을 시기에, 그의 심경을 서술한 자서전적 전기. 현실을 버리고 자연세계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정신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확고한 인생관으로서 현실도피 사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오히려 이 시기에 현실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기간으로서 자기 수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 이규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백운소설(白雲小說)

삼국시대 이후 고려 때까지의 여러 시 작품 대해 해설한 책으로 '소설(小說)'이란 명칭을 처음 썼으나, 오늘의 소설과는 그 뜻이 다르고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까운 시평집(詩評集)이다. 홍만종이 지은 <시화총림(詩話叢林)> 속에 28편이 전하고 있다.

 

 

 

 

걸어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일단 길직리 마을회관 쪽으로 걸어간다.

 

산길을 돌아 길직리 마을회관으로 바쁘게 걷던 길, 어둠에 잠기는 들판 너머로 흔적처럼 남은 황혼에 이끌려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어둠이 묻히고 있는 길을 더듬어 걸어서 돌아가기에는 무리. 택시를 불러 온수리로 돌아간다.

 

강화나들길 제3코스를 예정대로 걷지 못하고 중도에 되돌아오게 된 상황이 많이 아쉽다. 아직 기본적인 표지도 갖추지 못한 채 서둘러 나들길을 공개한 강화군 관광개발사업소는 큰 분발이 있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