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강화나들길 (3) 정족산 사고, 장사각과 선원보각 그리고 취향당

모산재 2011. 12. 18. 01:30

 

강화도 길상면 정족산성 전등사, 삼성강을 지나 산길을 잠시 오르노라면 정족산사고를 만나게 된다.

 

사고 건물은 일제시대에 사라졌고, 현재의 건물(장사각 및 선원보각)은 1997년에 6억원을 투입하여 복원한 것이다.

 

 

문이 닫혀 있어서 담장 너머로 살펴보아야 했다.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역사를 꼼꼼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했던 우리의 기록문화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감탄스러운 것이다. 전란이 잦았던 땅에서 많은 유형문화재들이 다 불타버리는 상황 속에서 역사가 소실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기록문화의 덕택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문화재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기까지는 참으로 아슬아슬하고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자 고종은 1227년(고종 14)에 <명종실록>을 완성하여 한 질은 개경의 사관(史館)에 두고 다른 한 질은 해인사에 보관하였다. 실록이 처음으로 사찰에 보관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춘추관과 충주사고를 유지하다 1439년(세종 21) 성주와 전주에 사고를 더 지어 충주·전주·성주의 4사고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성주의 사고가 불타 버리고 전주사고본만 병화를 면하였다.

 

 

▲ 안쪽에서 본 삼문

 

▲ 왼쪽 주건물이 실록을 보관하던 장사각(藏史閣), 오른쪽 작은 건물이 왕실 족보와 문서를 보관하던 선원보각(璿源譜閣)이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유생인 안의·손홍록 등의 노력으로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바닷길로 해주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영변객사로 옮겨 두었던 것을 1603년(선조 36) 다시 강화도로 옮기고 1606년까지 엄청난 비용과 인력을 들여 다시 인쇄하였다. 재인본 3질과 교정본 1질 등 모두 5질을 춘추관을 비롯하여 강화·묘향산·태백산·오대산의 5사고에 보관하였다.

 

 

정족산사고가 설치된 계기는 마니산사고가 1653년(효종 4) 11월에 불타면서 새로이 정족산성 안에 사고를 짓고 1660년(현종 1) 12월에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전등사 주지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져 사고를 지키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 황흠은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1726년에는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를 일시 점거한 프랑스의 해병들에 의해 정족산사고의 서적들이 일부 약탈되기도 하였다. 이 사고에 봉안되었던 역대 실록 및 서적들은 서울로 가져가기도 하고, 일부는 약탈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춘추관의 관장 하에 관리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에는 의정부에서 관원이 파견되어 강화군수와 협력하여 관리하고 포쇄(曝曬: 바람을 쐬고 볕에 말림)를 실시하며 보존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뒤부터 정족산 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들 및 규장각의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移藏)되었다. 이 후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뒤, 광복으로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개편, 발전되면서 서울대학교에 옮겨 보존, 관리되고 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 실록들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사고 건너편에는 최근에 복원된 취향당(翠香堂)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사고의 별관으로 영조 임금이 내린 '취향당(翠香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정갈한 기품이 느껴지는 멋진 한옥 건물이다. 미처 사진을 찍지 못해 사진 자료를 인용한다.

 

 

 

 

 

이렇게 해서 전등사를 모두 둘러본 다음, 북문을 통하여 다시 길상면 소재지 온수로 향한다.

 

 

 

 

 

 

 

강화나들길 3코스를 향해 내려서는 정족산, 야산이지만 북동사면은 제법 가파르다. 어째서 정족산성인지 이유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