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강화나들길 (1) 정족산 전등사, 고구려 소수림왕 때 창건된 가장 오래된 절

모산재 2011. 12. 16. 23:54

 

가을이 깊어 가는 날, 신촌에서 강화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등사를 가본 지도 10년이 더 되어 기억에도 가물거리고, 또 강화나들길이라는 걷기 길도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기도 한 터...

 

주말이라 길이 번잡하고 버스는 속도를 내지 못한다. 초지대교를 건너고 초지진을 지나 길상면 온수에 도착한다.

 

 

 

 

 

 

 

고려 원종왕비의 무덤 가릉까지 이어지는 강화나들길 3코스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규보 묘와 고려 왕실의 능묘들로 이어지는 이 길을 걸어보기로 한 것인데...

 

점심 때가 되어 일단 식사를 하고 전등사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온수에서 전등사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

 

호젓한 산모퉁이 길을 잠시 오르는가 했는데 금방 동문에 도착한다.

 

 

 

 

 

무지개문(홍예문)으로 되어 있는 동문삼랑성(三郞城)이라고도 부르는 정족산성의 동쪽 문이다.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라고 전하는데, 삼국시대에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鼎)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에 안겨 있는 절이다.

 

 

 

 

 

절 경내를 들어서는 것이 일주문이나 불이문이 아니라 산성의 홍예문이라는 점에서부터 전등사는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절이다. 

 

전등사에서는 호국의 상징인 삼랑성 동문과 남문이 일주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족산성에 안겨 있는 전등사는 역사상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자연 호국불교의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이어가게 된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서기 381년,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는데,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372년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이래 전등사는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에 이어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량이다.

고려 때 몽골의 침략의 받게 되자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1232년~1270년) 이 기간 고종은 임시 궁궐을 짓고,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한다. 1266에는 진종사는 크게 중창되고, 1282년에는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傳燈寺)'라 부르게 되었다.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1614년에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지만 1621년 옛 모습을 되찾았다.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 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1866년 프랑스군이 일으킨 병인양요를 거치며 1871년 대원군은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동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자그마한 비각을 만난다.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다.

 

 

 

 

 

병인양요 때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승전 이후 그는 어영대장·금위대장·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한다.

 

 

 

전등사에 오르는 길목에 화려한 원색으로 단장한 윤장대(輪藏臺)가 세워져 있다.

 

 

 

 

 

윤장대는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하는데, 글을 읽지 못하거나 불경을 읽을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윤장대는 국내 유일의 용문사 윤장대(보물 684)를 본뜬 것이다. 관촉사와 통도사에서도 윤장대가 조성되어 있다. 

 

 

 

전등사 동편에는 새로지은 건물 정행당이 자리잡고 있다. 템플스테이를 위한 시설인 듯하다.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던 건물 강설당을 지나면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대웅전 앞마당을 바라보며 뭔가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잠시 드는데, 잊고 있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여느 절에 당연히 있는 석탑이 없다는 것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왜 탑이 없는 것일까.

 

탑이 없다는 것은 탑이 가진 의미를 상쇄하고도 남을 어떤 기념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일 텐데... 탑은 원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전등사는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신 절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은 석가모니의 말씀을 담은 경전일 텐데, 바로 대웅전 안에 보관되고 있는 <법화경>목판 때문일까...?

 

 

대웅보전(보물 제178)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규모는 작지만 추녀가 넓고 지붕이 무겁게 느껴진다.

 

 

 

 

 

굵은 기둥을 같은 간격으로 배열하였는데 맨 바깥 기둥을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한 점이 특징적이다. 자연 처마의 곡선이 심한 지붕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많이 지어진 다른 절의 건물과 다른 점이다.

 

 

'대웅보전'이란 현판의 글씨는 누구의 것인지 확인되지 않는데, 얼핏 선운사 대웅보전 현판 이광사의 글씨와 많이 닮아 보인다. 선운사의 현판 글씨에 비하면 붓끝이 살짝 무딘 감은 있지만...

 

 

 

 

 

내부에는 목조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인천유형문화재 제42호로 1623년에 조성되었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125cm이고 원만한 얼굴에 유난히 큰 귀를 하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신체는 우견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가슴께에는 군의를 묶은 자락 위에 3개의 꽃잎 모양이 있다.

 

 

 

 

 

업경대(業鏡臺)가 불단 양쪽에 자리잡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업경대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죄업을 보이게 하는 거울이다.

 

 

불단 위에 꾸며진 닫집은 여러 가지 화려하고 정치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내부 모습을 담지 못해 아쉽다. 보마다 용틀임하는 모습이 새겨지고 용머리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는데,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용궁인 듯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았다.

 

 

전등사 대웅전 내부 기둥과 벽화에는 병인양요 당시 병사들이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데 살펴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국난을 당한 병사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라 한다.

 

 

전등사 대웅보전의 볼거리는 뭐니뭐니 해도 대웅보전의 네 귀퉁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이다.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이라니... 그래서 이 조각상이 나부가 아니라 불교의 수호상인 원숭이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광해군 때 대웅전을 지을 당시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울분을 참을 수 없었던 도편수는 그 여인을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고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추녀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는 나부상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나체로 두 손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습만이 아니라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는 모습도 있다. 표정도 조금씩 다르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대조루(對潮樓)라는 누각이 있다. '염하((鹽河)'라고도 부르는 강화해협의 조수를 마주 하며 한 눈에 볼 수 있는 누각이란 뜻이다.

 

대웅전 동쪽에는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던 강설당이란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한때 강설당은 전등사 승가대학 건물로 쓰였으나 지금은 복원되어 불교대학과정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절 마당에 서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가을빛이 깊어가고 있다.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 산사의 호젓한 분위기를 즐길 수 없음이 아쉽다.

 

 

 

 

 

 

 

※ 전등사 전각배치도(출처: http://www.jeondeungsa.org/)

 

1. 대웅보전  2. 약사전  3. 명부전  4. 삼성각  5. 무설전  6. 월송요  7. 대조루  8. 선불장/공양간  9. 적묵당(종무소)

10. 강설당  11. 정족사고  12. 취향당  13. 향로전  14. 극락암  15. 종루  16. 남문  17. 양헌수비  18. 동문  19. 화장실

20. 죽림다원  21. 삼랑성  22. 부도전  23. 고려가궐지  24. 전등각  25. 문화관광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