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17) 무량사 매월당 김시습 부도, 능허당 부도

모산재 2011. 12. 6. 20:37

 

 생육신 김시습의 생애를 떠올리며, 그의 이승의 마지막 거처였던 무량사 마당을 지나 천왕문을 나선다. 거기서 다시 작은 개울을 건너면 사람이 다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묵은 오솔길이 나 있다. 

 


1452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정예무인들을 모으는 한편 한명회, 권람 등의 모사들을 끌어들여 왕위찬탈을 모의한다.

 

그리고 1453년 가을 단종을 보필하며 실권을 쥐고 있던 김종서의 집을 급습하여 죽이고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 죽였으나 일이 갑자기 일어나 아뢸 겨를이 없었다."고 보고하고는 왕명을 빌어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의정부찬성 이양 등 중신들을 불러들여서 대궐 문에서 척살한다. 이어서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 조수량 등은 귀양을 보낸 뒤 목매 죽이고, 김종서의 목을 저자에 내걸고 그의 자손을 죽였으며, 안평대군은 강화에 귀양보낸 뒤 왕명으로 자결하게 한다.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를 맡아 문무 인사권을 장악하고 새로 내외병마도통사를 설치하고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군사권까지 독점했다. (아마도 전두환이 이 모델을 따라 12.12와 5.17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1455년 수양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들은 21세의 청년 김시습은 사흘을 울다 책을 불사르고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며 시를 쓰다가, 31세 되던 해 봄 경주 금오산(남산) 용장사에서 성리학과 불교를 공부하던 중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다.

 

37세에 서울 성동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하여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그 길로 들어서자마자 금방 매월당시비가 나타난다.

 



오석에는 '한가을 밤에 달을 보며 (中秋夜新月)'라는 매월당의 한시를 정한모 선생이 번역하고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써서 새겨 놓았다. 

 

 

半輪新月上林梢(반륜신월상림초)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山寺昏鍾第一鼓(산사혼종제일고)     산사의 저녁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淸影漸移風露下(청영참이풍로하)     달 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一庭凉氣透窓凹(일정량기투창요)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 틈으로 스미네.



이 시는 원래 2수로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이어진다.

 

白露溥溥秋月娟(백로부부추월연)     맑은 이슬 맺히고 가을 달빛 고운데

夜蟲喞喞近床前(야충즐즐근상전)     밤 벌래 우는소리 침상 앞까지 들려오네.

如何撼我閒田地(여하감아한전지)     어찌하자고 한가로운 마음을 흔들어 놓는가

起讀九辯詞一篇(기독구변사일편)     자려다 말고 일어나 구변 한편 읽어보네.

 


달빛 흐르는 고즈넉한 산사의 가을 밤, 저녁종이 울리고 찬이슬은 내리는데 풀벌레 소리는 매월당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섬세하고 맑은 감각적 언어 속에 매월당 자신의 실의가 깃들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궁정시인이자 굴원의 후계자라 불리는 송옥(宋玉)은 '초혼'과 '구변(九辯)'이라는 시를 남기는데, '구변'은 참언()으로 충성을 의심받아 쫓겨나게 된 굴원의 심정을 슬퍼하며 세상의 쇠망과 자신의 불우함을 탄식하고 가을의 쓸쓸함을  부()의 형식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매월당이 자신의 처지를 굴원의 처지와 동일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비석의 뒷면에는 1983년에  '전국 시가비 건립동호회'에서 성금을 내어 세운 것이라 기록해 놓았다. 받침돌에는 명단이 가득 새겨져 있다. 

 


 

시비를 지나 오솔길로 접어드니 숫제 나뭇가지 등이 널려 있어 길이 막혀 있는 듯한 모양이다. 매월당 부도의 위치는 오솔길로 이어져 있는 게 분명한데, 사람들이 이 길을 다니지 않는 모양이다.

 


묵은 길의 흔적을 따라 강행하니 너른 공간이 열리며 부도전이 나타난다.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비석이 먼저 눈에 띈다.

 

비석에는 '이조판서'라는 벼슬이 새겨져 있다. 생전에 미관말직도 맡아 본 적이 없는 매월당, 사후에 추증된 관직명을 새긴 비석이 부도보다 더 눈에 띄어 괜히 서글픈 맘이 든다. (그런데 비석조차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부도전 한가운데 매월당 부도가 자리잡고 있다. 

 

부도 앞에는 '오세 김시습의 묘'라는 작은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오세'는 멋진 글을 지은 다섯 살배기 시습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세종 임금이 지어준 이름이다. 

 

 

 

높이가 3m 가까운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아래에 3단 기단 위에 탑신과 머리장식을 올린 모양인데, 모든 부재는 8각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위와 아래 받침돌에 연꽃을 새기고, 가운데 받침돌에는 구름 속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을 새겼다.

 

몸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연꽃덮개가 조각된 지붕돌은 꽃장식이 달린 여덟 귀퉁이가 높게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가운데 받침돌의 용 조각


 

 

조선시대의 부도로, 당시의 작품으로는 조각이 매우 우수하고 화려하다.

 

김시습이 입적하자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하였는데, 3년 후에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다비를 거행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부도를 세웠다 한다.

 

일제시대 때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부도가 함께 넘어졌는데, 그 때 사리 1점이 나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매월당 부도전 전경



 

 

 

※ 참고로 덕유산 구천동 계곡에는 김시습의 부도로 잘못 알려지고 있는 또 하나의 매월당 부도가 있는데, 이에 대한 글은 다음 글 참조 => http://blog.daum.net/kheenn/15854487

 

 





더보기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문학

 

 

▶ 생애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율곡은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절개를 지키며 유교와 불교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서울 노량진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생후 8개월에 글 뜻을 알았다 하며,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미 <중용><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글을 지어 감동한 세종대왕이 비단을 선물하자,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시습(時習)이란 이름은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논어>‘학이’편(學而篇)에서 따서 지어 주었다. 그는 당대의 학자인 이계전, 김반, 윤상 등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5세 때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 이계전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13세 때까지 성균관 대사성 김반에게서 <맹자> <시경> <서경>을 배웠고, 겸사성 윤상에게서 <주역> <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였다.

 

21세 되던 해(1455)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닫고 통곡하며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설잠(雪岑)이란 이름으로 북으로 안시향령,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등을 정리하였다. <매월당시사유록(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송도(개성)를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며 지은 글을 모아 엮은 <탕유관서록> 후지(後識)에서 방랑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28세이던 1463년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며, 2년 뒤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을 받고도 거절한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배신한 사위 김질의 밀고를 받고 사육신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주기도 하였다. 세조 정변 이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꺼리며 두려워하였으나 종실인 이정은과 남효온·안응세·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경멸하던 정창손이 영의정이고, 김수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 경주 금오산으로 간다. 남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당호를 매월당이라 하여 머물렀다. 금오산실에서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47세 때(1481년) 돌연 환속하여 안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였던 유자한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육경자사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고 홍산 무량사에서 머물다 1493년 5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죽을 때 화장하지 말 것을 유언하여 절 옆에 시신을 묻어 두었는데,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었다. 유해는 다비(茶毗)를 하여 부도에 안치하였다.

 

그는 살아생전에 젊은 모습과 젊은 모습을 담은 초상을 손수 그려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東峯自畵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그밖에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후세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단종이 복위된 1707년(숙종33)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1782년(정조6)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84년(정조 8)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사상

 

김시습의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황(李滉)은 그를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 비판하였다.

 

그는 <신귀설(神鬼說)>· <태극설(太極說)>· <천형(天形)> 등을 통하여 불교와 도교의 신비론을 부정하면서 적극적인 현실론을 펴고 있다. 이는 유교의 속성인 현실을 중심으로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면과 맥이 닿고 있다. 잡저(雜著)의 대부분은 불교에 관계된 논문들인데, 그는 부처의 자비정신을 통해 한 나라의 군주가 그 백성을 사랑하여, 패려(悖戾)·시역(弑逆 )의 부도덕한 정치를 제거하도록 하는 데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은 그의 <애민의(愛民議)>에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 혹자들은 그의 성리사상이 유기론(唯氣論)에 가까운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불교의 천태종에 대해 선적(禪的)인 요소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특히, ‘귀신론’은 귀신을 초자연적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철학적으로 인식하여, ‘‘만수지일본(萬殊之一本)’·‘일본지만수(一本之萬殊)’라 하여 기(氣)의 이합집산에 따른 변화물로 보았다.

 


▶ 문학

그의 문학세계를 알게 해주는 현존 자료로는 그의 시문집인 <매월당집>과 전기집인 <금오신화>가 있다.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 등 5편으로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를 제외한 작품들은 모두 감미로운 시적 분위기로 엮어진 괴기담이다. 이 전기의 틀을 빌려 그에게 있어서 가장 결핍되어 있던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나라 역대 시인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염정시(艶情詩)를 남긴 시인이 되었다.

 

그의 역사사상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문제를 풀어 가는 소재로 인식하였으며,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한국 최초의 역사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도 단군조선으로부터 당대인 세종대까지의 역사를 문화사, 사상적으로 파악하여 발전적 역사관을 보였으며, <금오신화> 중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금오신화>에 집중되어왔으며, 그의 시문에 대한 연구는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왔을 뿐이다. <매월당집>은 원집(原集) 23권 중에 15권이 시로써 채워져 있으며,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도 시이다. 김시습의 시는 현재까지 그의 시문집에 전하는 것만 하더라도 2,200여 수나 되지만 실제로 그가 지은 시편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장 흔하게 보이는 주제적 소재는 ‘자연’과 ‘한(閑)’이다. 몸을 산수에 내맡기고 일생을 그 속에서 노닐다가 간 그에게 자연은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평소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한 그는 특히 자연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현실에 대한 실의가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자연의 불변하는 영속성 때문에 특별한 심각성을 부여하고 비극적인 감정이 깃들이게 하였다.

 

그의 시 가운데서 역대 시선집에 뽑히고 있는 것은 20여 수에 이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산행즉사(山行卽事)’(7절)·‘위천어조도(渭川漁釣圖)’(7절)·‘도중(途中)’(5율)·‘등루(登樓)’(5율)·‘소양정(昭陽亭)’(5율)·‘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5율)·‘고목(古木)’(7율)·‘사청사우(乍晴乍雨)’(7율)·‘독목교(獨木橋)’(7율)·‘무제(無題)’(7율)·‘유객(有客)’(5율)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도중’·‘등루’·‘독목교’·‘유객’ 등은 모두 <관동일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관동지방으로 떠났을 때의 작품이며, 대체로 만년의 작품 가운데에서 수작(秀作)이 많다.

 

 

 

김시습 부도전 앞 길 건너편 작은 언덕에는 독특한 양식의 부도 하나가 있어 눈길을 끈다. 

 

 

 

부도의 높이는 2m를 넘는다. 기단은 지대석처럼 낮아지고 탑신은 팔각원당형으로 조선시대의 석종형과 많이 닮아진 모습으로 보이는데, 그 위에 사각형으로 단순화된 양식으로 표현된 지붕돌이 얹혀져 있다. 혹시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부도일까 싶기도 한데...

 

석비는 길과는 반대쪽인 개천 쪽을 향하고 있어 마치 돌아서 있는 듯하다.

 

 

 

몸돌 가운데에는 띠처럼 음각하고 연꽃무늬를 새겨넣고, 위쪽에는 구름무늬와 연꽃무늬를 아로새겼다.

 

부도의 주인공과 조성시기 등을 알아보기 위해 석비에 다가서 본다.

 

 

 

세 줄로 쓰인 비문은 '逍遙泊遵嫡飼 凌虛當大師靈塔 ○處英字妙光(소요박준적사 능허당대사령탑 ○처영자묘광)'이라고 새겨져 있다.

 

능허당이라는 스님의 부도 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능허당이 어떤 분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가 없지 뭔가.

 

 


그리고 부도전 옆에 새로 조성된 무진암이란 절집을 구경한 다음 무량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아침에 택시를 타고 왔던 길을 외산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무량마을로 들어서는 도로 가운데 연리지처럼 뿌리가 하나로 연결된 두 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어 눈길을 끈다. 

 

 

 

 

 

 

탐관오리의 증거물일까, 길 옆에 공덕비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건 무시하고 외산 가는 길을 걷는다. 

 

차량 통행이 별로 없어 맑은 바람 상쾌하고 가을빛 넘치는 길은 한가롭고 평화롭기만 하다. 길가에는 키가 큰 뚱딴지 커다란 꽃도 피었고 키 작은 꽃범의꼬리 앙증스런 꽃도 피었다.  

 


↓ 뚱딴지


 

 

 

↓ 꽃범의꼬리


 

 


20분 정도 걸었을까... 외산에 금방 도착한다.

 

어느 호프집, 저리 가꿀 수도 있구나 싶게 기른 등나무가 재미 있어 담아 보았다. 지나온 길거리도 확인할 겸...

 

 

 


버스를 타고 다시 부여로 돌아가 정림사지오층석탑과 부여박물관, 그리고 궁남지를 돌아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