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13) 무왕의 설화가 서린 궁남지와 포룡정

모산재 2011. 12. 1. 22:29

 

부여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서동의 탄생 전설이 서린 궁남지(宮南池).

 

부여박물관에서 부여군청 쪽으로 가다가 보면 남쪽으로 빠지는 길을 만난다. 그 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시내를 벗어나 넓은 들로 들어선다. 거기에 궁남지가 있다.

 

 

커다란 인공호수 궁남지로 들어서는 길 주변은 온통 연꽃을 심어 놓은 습지로 조성되어 있다. 연꽃은 이미 지고 없지만 수련꽃은 아직도 환하게 피고 있다.

 

 

 

 

 

 

연꽃을 심었다고 연꽃만 자라는 게 아니다. 습지엔 온갖 물풀들이 깃들어 살며 갖가지 꽃을 피우고 있다.

 

자라풀은 점점이 흰 꽃을, 물달개비와 물옥잠은 보랏빛 꽃을 한창 피우고 있다. 물질경이도 때 늦은 흰 꽃을 피우는 모습이 보이고...

 

 

 

 

 

 

빅토리아연꽃은 이미 꽃철을 지났지만, 저 귀티나는 커다란 연잎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연꽃밭엔 쇠물닭이지 싶은 물새가 병아리 둘을 데리고 연대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먹이를 찾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 드넓은 습지는 많은 생명들에게 축복의 천국이지 싶다.

 

 

습지 사이로 난 길, 소나무 가로수 너머로 분수가 솟구치고 있는 궁남지가 보인다.

 

 

 

 

 

숲을 이룬 버들에 포근히 감싸인 호수에서 분수는 청명한 하늘 높이 물줄기를 시원스레 뿜어 올리고 있다. 아름답다! 그런데 이렇게 서구적 방식이 아닌 백제만의 아름다움을 살릴 방법은 없나... 아쉬운 마음.

 

 

 

 

 

 

 

부여 읍내를 벗어난 남쪽 들 가운데 있는 백제의 별궁 연못, 궁남지. 무왕 때 만들어진 우리 나라 최초의 이 인공 연못은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宮南池)'라 부른다.

 

 

 

 

<삼국사기>는 634년(무왕 35년) 3월에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로 물을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본떴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신산은 동해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세 개의 산이니 불로장생을 꿈꾸는 신선의 정원으로 꾸몄을 것이다.

 

지금 그 방장선산엔 포룡정(抱龍亭)이란 정자가 세워져 있고, 호수 위로 긴 나무다리를 놓아 연결하였다.

 

섬은 30여 년 전에도 못 가운데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어서 주민들이 '뜬섬'이라 불렀다고 하며, 그 주변에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의 출생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은 설화를 남기고 있다.

 

 

백제 제 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때 이름은 서동(薯童) 이다. 재기(才器)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늘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서동이라 이름 했다.

 

 

궁남지의 옛 이름은 '마래방죽'이었다고 하는데, 주변에 마밭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곳이 무왕의 출생지가 확실한 것일까. 그런데, 전라북도 익산의 마룡지에도 같은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어 무왕의 출생지도 흥미거리다. 마룡지와 그 부근의 오금산도 설화와 딱 맞아떨어진다고 하니...

 

 

 

 

 

포룡정에는 각기 다른 두 개의 '포룡정기' 현판이 걸려 있다.

 

 

 

 

 

 

어쨌거나 설화에 따르면 무왕은 적통이 아니다. 그런데 무왕의 아버지로 알려지고 있는 법왕에겐 적자가 없었고, 서자인 무왕이 결국 왕위를 잇게 된다.

 

앞의 설화에 이어 <삼국유사>에는 마를 캐던 서동이 서라벌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며 "선화공주님은 밤마다 몰래나와 서동이와 잠을 잔다."는 동요를 퍼뜨려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서동설화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중층되어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선화공주 설화를 무왕이 아닌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설화로 보기도 하는 것이 그런 실례다.

 

 

 

 

 

 

 

궁남지 동쪽에는 화지산이라는 낮은 산이 있는데, 궁남지 쪽 언덕에 대리석으로 팔각형으로 쌓아올린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일대에는 초석과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별궁의 건물터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로 보아 궁남지는 별궁의 궁원지(宮苑池)로 꾸며졌다고 본다.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한다는데, 궁남지는 최초의 인공호수일 뿐만 아니라 조경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도 적지 않은 듯하다.

 

원래의 궁남지는 지금보다 훨씬 컸던 모양이다. <삼국사기> 무왕 39년조에는 "3월에 왕이 왕궁의 처첩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근 노인들은 수십 년 전만 하여도 3만여 평이나 되는 드넓은 연못이었다고 이야기 한단다.

 

백제가 멸망한 뒤 연못이 메워지고 농지로 이용되어 지금은 1만 평도 안 되는 규모로 줄어들었다.

 

 

 

 

 

 

궁남지를 돌아보고 나니 하루 해가 이미 기울어가고 있다.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 조금만 더 시간이 허락된다면 능산리 고분도 돌아보고 싶은데... 아쉬움을 간직한 채 시외버스터미널로 걸음을 옮긴다.

 

 

※ 무왕(재위 600~641 )

이름은 부여장(扶餘璋)·서동(暑童). 제29대 법왕의 뒤를 이어 600년 즉위하였고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법왕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위덕왕의 서자라고도 한다. 남북조 시대 때 북조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에서는 '백제 위덕왕의 아들 무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북사>만 백제 위덕왕의 아들로 되어 있고 나머지 중국 사서는 법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

무왕은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혜왕과 법왕이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음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위해 신라 서쪽 변방을 빈번하게 침공하는 한편,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도움을 청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나자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에게 잃었던 땅을 되찾으려 했으나 당 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무왕은 강화된 왕권의 표징이자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를 단행했다. 629년 미륵사를 완공하고, 630년 사비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궁남지를 건설하였다.

토목공사를 자주 벌이고 신라와의 전쟁이 잦아 국력을 소모하는 등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탁월한 정치역량을 바탕으로 한 외교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였고 군사력을 크게 신장시킨 치적을 남긴 무왕은 무령왕, 성왕과 함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전성기 이후로 무너져가는 백제를 되살린 왕으로 평가받는다. 

 

 

 

 

※ 궁남지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