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12) 국립부여박물관 앞뜰의 두 보물 비석, 당유인원기공비· 보광선서비

모산재 2011. 11. 29. 23:45

 

정림사 옛터의 장중한 석탑을 돌아본 다음 동쪽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니 국립부여박물관이 나타난다.

 

 

 

 

 

 

박물관은 계백장군 동상이 있는 부여군청 로터리의 동쪽 금성산 기슭에 기대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뒷산에는 계백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올해 개관한 공연장인 사비마루가 먼저 눈에 띈다

 

 

 

 

 

사비마루를 돌아 넓은 마당을 지나면 박물관 본관이 나타난다.

 

 

 

 

 

국립부여박물관은 그 뿌리가 1929년에 발족된 부여고적보존회로부터 시작된다. 부여객사 건물에 '백제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박물관이 개관되고 1939년 일제 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이 된다. 해방 뒤에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으로 되었다가 부소산 언덕에 건물을 짓고 1975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승격하였다가 1993년에 지금의 건물로 이전하였다.

 

상설 전시실로 선사실· 역사실· 불교미술실과 야외전시실을 배치하였는데, 3개의 전시실과 박만식 교수 기증실에는 10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비백제 이전까지의 유물을 볼 수 있다. 반달돌칼·간돌검 등의 석기, 송국리형토기·붉은간토기 등의 토기, 한국식동검·동경·동과 등의 각종 청동기를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사비시대 백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주거, 음식, 잡용과 토기, 복식과 장신구등이 진열되어 있다. 또한 위덕왕 대의 정치와 문화를 짐작케 하는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와 국보 제288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무왕 대의 익산 왕궁리 기와와 공방 유물, 의장왕 대의 사택지적비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백제의 불상들을 만나볼 수 있다.

 

 

박물관 앞 양쪽 뜰은 야외 전시장으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중 보물로 지정된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보광사지대보광선사비, 석조(石槽) 등이 눈에 띈다.

 

 

 

 

■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 보물 제 21호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당유인원기공비'는 보호각으로 씌워져 보호되고 있다.

 

 

 

 

 

수치스런 역사의 유물이지만 이 비석은 당당히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원래 부소산 중턱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현재 비석 앞에 서 있는 안내문조차 심하게 긁혀 있는 것을 보면 시대를 넘어 이 비석을 대하는 이 땅 사람들의 민족적 수치심이 어떠한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비석은 벽회색의 반점이 있는 대리석을 사용하였는데,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이수)는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으로, 당나라 초기의 웅려한 수법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비 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문은 *저수량체의 해서로 새겨졌는데, 유인원의 가문과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당 태종의 고구려 공격 때 공을 세우고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복신과 도침, 부여풍 등의 백제 부흥운동을 평정한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소정방이 평제기공문을 새긴  3년 뒤인 663년이다.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태종무열왕릉비도 이 비와 같은 계통의 형식을 보여주는데, 통일신라 초기 당식(唐式) 석비의 좋은 보기로 의의가 있다.

 

 

※ 저수량(褚遂良, 596~658)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항저우 출생. 우세남(虞世南)·구양순(歐陽詢)과 아울러 초당(初唐) 3대가로 불린다.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수집사업에서는 태종의 측근으로 그 감정을 맡아 보면서 그 진위(眞僞)를 판별하는 데 착오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처음에 우세남의 서풍(書風)을 배웠으나, 뒤에 왕희지의 서풍을 터득하여 마침내 대성하였다. 아름답고 화려한 가운데에도 용필(用筆)에 힘찬 기세와 변화를 간직하였다.  <네이버백과사전>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보물 제 107호

 

보광선사비는 당유인원비와 나란히 보호각에 보호되고 있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청룡사지의 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보물 658호)나 대지국사비(보뮬 제 16호)처럼 비신 양 끝 부분의 모서리를 깍은 귀접이 양식을 취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머릿돌인 이수가 사라진 고려 말기 비석의 간소한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이 새겨져 있는 비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1265년(고려 원종 6)에 보광사로 왔고 공민왕 원년(1351) 65세로 입적하였다. 죽으면서 문도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 있다.

현재 비몸만 남아있다. 비의 높이는 약 2.6m로 비몸의 가장자리는 당초문을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비의 앞면 제일 윗부분에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라는 10자의 전액(篆額)이 있다.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 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원래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비문은 원나라의 위소(危素)가 짓고 양지(楊池)가 썼으며, 주백기(周伯琦)가 액(額)에 전(篆)하였다.

 

 

 

 

※ 위소(危素, 1303~1372)

중국 원말 명초(元末明初, 1303~1372)의 서가. 자는 태박(太樸), 호는 운림(雲林). 장시성 금계 사람. 원대 지정 연간(1341~1368)에 경연검토(經筵檢討)의 관직에 있으면서 송∙요∙금(宋∙選∙金)의 삼사(三史)를 편수하는데 참여함. 명초에 한림시강학사가 되어 그의 문하생인 송렴과 <원사(元史)> 편수에 참여했으며, 홍문관학사를 겸직했다. 서는 모든 체에서 뛰어났으며 특히 해서에는 지영(智水), 우세남의 전칙(典則)이 갖추어졌다는 칭찬을 받았다. 정계(政界)의 명신이나 불사도관(佛寺道觀)등의 많은 비문이 그에 의해 씌어졌다고 전함. <네이버 지식사전>

 

※ 주백기(周伯琦, 1298~1369)

중국, 원대의 서예가. 자는 백온(伯温), 호는 옥설파진일(玉雪坡眞逸). 파양(鄱陽, 장시성) 사람. 관직은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병부시랑, 중대감찰어사에 이르렀다. 전 ∙ 예 ∙ 진 ∙ 초서로 유명하고, 고전(古篆)의 체(體)는 조맹부의 유풍을 계승했다. 지정(至正) 원년(1341) 규장각을 선문각(宣文閣)으로 개칭할 때 선문각보(宣文閣寶)라는 전액(篆額)과 수장인(收藏印)을 새겼고 난정서(蘭亭序)나 지영(智永)의 <천자문> 모본(模本)을 돌에 새겨 상자 안에 두었다. 만년 소주의 장사성(張士誠)에게 초청되어 여러 문사와 사귀었으나, 사성이 주원장(朱元璋, 홍무제)에게 패한 뒤 향리로 돌아왔고 거기서 사망했다. 저서에 <육서정위(六書正譌)>,  <설문자원(說文字原)>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