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10) 백제문화제, 성왕 사비 천도 행렬

모산재 2011. 11. 27. 12:11

 

부여 관광지도를 얻으려고 군청으로 간다. 군청은 부여 읍내의 남쪽 로터리에 있다. 로터리 중앙에는 말을 탄 계백장군 동상이 서 있다.


 

 

 


거기서 저녁 6시에 성왕 사비 천도 행렬이 있으니 성왕 동상이 서 있는 큰길로 나가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생각지도 못한 볼거리를 구경하게 되나 보다. 횡재한 듯한 기분...

 


저녁 공기가 서늘하여 바람막이 긴 팔 자켓을 걸치고 로터리로 가서 기다리니, 오래지 않아 취타대 행렬이 들어 서고 있다.

 


 

 

 

 


그리고 말을 탄 장수와 방패와 창을 든 병사들의 행렬이 뒤를 잇고...

 


 

 

 

 


그 뒤에는 왕의 행차에 길을 밝히는 횃불 행렬이 섰다,

 


 

 

 


취타대는 연세 지긋한 분들이, 그 뒤를 따르는 행렬은 아직 어린 학생들이 동원되었는데, 지엄한 천도행렬치고는 오합지졸처럼 어수룩해서 좀 아쉽다. 그래도 지역민들의 힘으로 이런 행사를 치러 내는 것이 어디냐 싶긴 하다. 

 

 

전지가 떨어져 바꾸는 사이 행렬은 로터리에 들어섰고, 왕이 탄 수레도 도착했다. 성왕 동상 앞에서 행렬은 멈추고 무슨 행사를 진행하는 듯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인파에 막혀 보지 못한다.

 


 

 

 


수레를 말이 아닌 소가 이끌고 있다. 뜻밖이다.

 


 

 


환영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주는 성왕과 왕후 전하...

 


 

 

 


자꾸 이 사람만 바라보지 마시고 긴 행차 노독도 푸실 겸 저기 시원한 함흥냉면 한 그릇 하시면 어떠시올지~.

 


 

 


궁녀들은 어가 뒤를 따르고...

 


 

 

 


부여여중고에서 출발한 천도 행렬은 성왕 동상이 있는 로터리에서 고유제를 지낸 다음 구드래 둔치로 향하고 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행렬을 지켜보며 성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비 천도 행렬의 주인공 성왕(재위 523∼554)은 백제 제26대 왕으로 무녕왕의 아들이다. 이름은 명농(明濃).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영민하고 비범하며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해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해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 약 1500여 년 전인 538, 성왕은 웅진(공주) 공산성에서 사비성(부여)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치며 백제다운 백제의 기틀을 다진 임금이다. 사비는 이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당할 때(660년)까지 122년간 백제 문화를 꽃 피우는 도읍지가 된다. 

 

동성왕·무령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 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해 538년(성왕 16)에 사비 천도를 단행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수세적으로 행해졌던 웅진 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사비 천도는 왕권과 국력 강화를 위한 작업이었다. 사비 천도에는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백제의 도읍은 모두 다섯 군데이다. 처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BC 5년 한산(경기도 광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고, 제13대 근초고왕 때인 371년에 북한성(경기도 양주)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제22대 문주왕이 즉위한 475년에 공주로 옮겨 63년을 지냈고 성왕이 538년 사비로 옮긴 것이다

 


고구려의 남침으로 야기된 웅진(공주) 천도기의 정치적 불안정이 동성왕과 무령왕대에 걸쳐 차츰 진정되자, 이를 바탕으로 천도를 단행하는 한편 강력한 왕권강화책을 추진했다.

 

중앙 관제로는 1품 좌평에서 16품 극우에 이르는 16관등제와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된 22부제의 중앙 관제가 정비되었다. 또 왕도의 통치 조직으로는 수도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5항제를 정비하였다. 지방 통치 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擔魯制)를 개편해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정비하였다.

 

국제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중국의 양나라 및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달솔 노리사치계를 통해 불교를 전파하는 등 일본의 불교문화 융성에 바탕을 마련하였으며,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전수해주었다.

 

성왕은 양나라와의 교류를 중시하였다. 즉위한 다음 해(524년), 양나라로부터 ‘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 받았다. 그러나 549년 가을 사신을 보냈을 때는 도읍 건강(建康)은 후경(侯景)의 반란으로 불타고 있었고, 불교에 심취하고 있던 양무제가 후경에게 사로잡혀 있다 죽는 사태가 일어나며 정신적 배경을 잃어 버린다.

 

그리고 신라와의 동맹관계도 강화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차단하고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회복을 도모했다. 551년 신라군과 가야군을 동원하여 한강유역 수복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성왕의 위세는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553년 신라의 진흥왕은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해 옴으로써 한강 하류 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성왕은 554년에 군사를 일으켰고, 관산성(옥천) 싸움 중 구천(狗川) 지역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함하고 백제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해 4명의 좌평이 전사하고 3만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로써 그동안 강력하게 추진되어온 왕권 강화와 이를 통한 백제의 중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백제는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는 귀족의 연합체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고, 다시 적대관계가 된 신라와의 전쟁에 국력을 낭비함으로써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백제문화제

 

백제문화제는 백제의 옛 도읍지 공주 공산성과 부여의 구드레 광장을 중심으로 매년 10월에 개최된다. 충청남도와 공주시·부여군이 주최하고 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하고 있는 문화 관광 축제로 전국 3대 축제의 하나이다.

 

제1회(1955년)~ 제11회(1965년)까지는 부여에서 백제대제(百濟大祭)라는 이름으로 단독 개최하였는데, 성충·흥수·계백의 충절을 추모하며 제향(祭享)한 삼충제와 백마강에 몸을 던진 궁인들의 넋을 위무하는 수륙제를 봉행하였다. 


당시 백제대제가 거행될 때는 전국에서 보기 드문 행사였기 때문에 부여읍민은 물론 군민들과 더불어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다. 해를 거듭하면서 제의적인 성격과 더불어 지역의 종합 문화 행사의 성격을 띠며 행사 종목도 늘어나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순수한 민간 주도의 행사에서 관 주도 행사로 전환되었다.


제12회(1966년)부터 제24회(1978년)까지는 공주·부여에서 동시 개최되었다. 백제문화제로 명칭이 바뀌고 70년대에 잠시 대전에서도 거행되고 문화 행사가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주·부여 두 지역에서 동시에 개최되던 백제문화제는 특성도 없이 서로 비슷한 형태로 개최되어 예산만 낭비되는 등 문제점이 발생하자 제25회(1979년) 때부터는 대전을 제외하고 공주에서는 백제문화제를 거행하고 부여에서는 소제(小祭)를 거행하였다. 부여에서의 소제는 삼충제·궁녀제·대왕제 등 순수 제전 행사만 치르게 되었다. 이후 공주와 부여에서 번갈아 가면서 윤번제로 실시하였다. 짝수 해에는 부여에서, 홀수 해는 공주에서 개최하는 식으로 제52회(2006년)까지 개최하였다. 


윤번제 실시는 보다 많은 준비 기간을 확보함으로써 행사의 양적·질적 측면에서 수준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백제문화제의 예산을 장기적인 측면에서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백제문화제가 발전하는 토대를 이루었다. 백제문화제의 행사 종목도 공주는 70~100여 종, 부여는 40여 종에 달하는 행사가 거행되면서 지역적 축제의 틀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축제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의 문화 상품으로 선정되어 행정적·재정적 지원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윤번제로 개최되던 백제문화제는 2007년부터 충청남도와 공주시·부여군이 다시 동시 개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