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8) 망국의 쓸쓸함, 부소산 백화정과 낙화암 그리고 사자루

모산재 2011. 11. 22. 13:02

 

고란사에서 서쪽 산길을 잠시 오르면, 솔숲 사이로 백마강을 향해 흐르는 짧고 높은 능선이 보인다. 그 능선의 가장 높은 곳, 바위 봉우리 위에 우뚝 솟은 정자 하나. 백화정(百花亭)이다.

 

 

지금 내 발길은 저 백화정을 지나 백마강과 벼랑으로 만나는 낙화암으로 향한다,

 

 

 

 

 

백화정 앞에는 낙화암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한 빗돌이 서 있다.

 

 

 

 

 

거기엔 이광수가 쓴 '낙화암'이란 시를 새겨 놓았다. 김대현이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려지기도 했던 시다.

 

사비수 나리는 물에 석양이 비낀 제

버들꽃 나리는데 낙화암 예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이 시를 보면 일제 말(1940년) 함세덕이 쓴 <낙화암>이란 역사극이 떠오른다. 백제 멸망의 슬픈 역사를 다룬...

 

승전에 교만하여 향락에 젖은 의자왕, 성충 흥수가 쫓겨나고 간신들이 사리를 도모하는 조정, 나당연합군에 포위되고 궁녀들이 사비수로 몸을 던질 때 바로 이 이광수의 시로 합창하며 막이 내린다.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고 강변했던 이광수의 시비에 착잡해지는 마음... 그러고보면 이곳에는 그런 착잡한 마음을 갖게 하는 기념물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바위 벼랑 꼭대기에 서서 유유히 흘러가는 푸른 강물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서 있는 백화정.

 

 

 

 

 

알고보니 이 육모지붕의 정자는 1929년 '부풍시사'라는 시사(시사)를 이끌던 부여군수 홍한표가 지었다고 한다. 정자에는 그가 쓴 '백화정기'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글 좀 쓰는 문필가였다고 할지라도 일제 하에서 군수를 지낸 이의 이름은 부끄러운 이름이다. 그런 이가 지은 정자와 현판이 백제혼을 기념하고 있는 현실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왜 하필 이름이 낙화정이 아니고 백화정일까?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가 혜주에 귀양 갔을 때 성밖의 풍호(豊湖)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射百花州)'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들 하는데, 런 시의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정작 이 정자를 세운 군수의 '백화정기'에는 "6각형 모양에 나무 약간, 기와 약간 돌과 쇠도 약간 써서 정자를 짓고는 들보에 '백화(百花)'라 했으니, 백제시대의 바위에서 따온 것"이라 적어 놓았다. 하지만 백제시대의 바위에 '백화'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백화는 많은 꽃을 이름이니 강으로 몸을 던진 여인들을 일컬은 이름이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겠다.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을 뿐 망국의 한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 그저 애틋한 감상에 젖어보고 싶어 찾는 관광객들의 전망대일 뿐... 정자라는 어쩔 수 없는 공간의 한계에 아쉬움이 인다.

 

 

 

 

 

백화정 동쪽에는 아름드리 노송 한 그루가 붉은 줄기를 꿈틀거리며 서 있는데, '천년송'(千年松)'이라 이름하고 글 한 편도 새겨 놓았다. 누구의 글인지는 알 길 없고... 

 

남부여국 사비성에 뿌리 내렸네.
칠백 년 백제 역사 오롯이 숨쉬는 곳
낙화암 절벽 위에 떨어져 움튼 생명
비바람 눈서리 다 머금고
백마강 너와 함께 천 년을 보냈구나.
세월도 잊은 그 빛깔 늘 푸르름은
님 향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이런가.
백화정 찾은 길손 천년송 그 마음

 

 

 

 

 

 

백화정을 지나 강가 쪽으로 살짝 내려 서면 거기에 낙화암 절벽이 나타난다.

 

 

 

 

 

드넓게 펼쳐지는 백마강 백사장과 푸른 물결이 아름답다.

 

 

 

 

 

그리고 떠오르는 환영...

 

사비성을 무너뜨리고 밀려드는 당나라 도적들, 혼비백산 부소산을 넘어 쫓겨온 백제궁의 여인들은 이 까마득한 절벽으로 밀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망의 벽 앞에서 치마를 뒤집어 쓰고 몸을 날린다...

 

 

절벽 끝에서 낭떠러지를 내려다본다. 잡초가 덮고 있는 낭떠러지 아래로 1400여 년 전 백제 여인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간옹 이헌경(1719~179)은 이 처절한 죽음에 <금강사(錦江詞)>에서 "금강의 물을 어찌 마실 수 있겠는가. 사비수의 물고기도 먹지 않는다.(寧飮錦江水 不食泗河魚)"고 하였다.

 

 

이곳 낙화암에서 뛰어내린 것이 사실일까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하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전하고,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여러 비빈들(諸姬)이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의 비, 은고(恩古)의 모습이 떠오른다. 드라마 <계백>에서는 왕의 마음과 권력을 거머쥐며 전횡을 휘둘렀던 은고가 이곳에서 몸을 던진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그러나 은고는 소정방에게 잡혀 의자왕과 1만 3000여 백성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 3천 궁녀설의 진실은 무엇일까?

신복룡 교수는 낙화암에 3천 명의 여자가 통곡하며 줄을 서서 뛰어내릴 만한 공간이 있는가, 라는 원초적인 질문부터 제기한다.

백제가 패망할 당시 수도 부여는 총 1만 가구로 인구는 4만 5천 명 정도였으며, 2천5백 명의 군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규모의 도시에서 3천 궁녀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당시의 농업 생산력이나 주거 공간을 감안할 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결국 의자왕의 황음무도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백제 패망의 비극적 의미를 더하기 위해, 3천이란 상징적 숫자가 동원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자로 책봉되고 왕으로 즉위하여 선정을 베풀며 한때 지극한 효성과 형제애로 '해동증자'라 불리었던 사람, 그러나 신라 30여 성을 차지한 지 불과 5년만에 나당 연합군을 불러 들여 망국의 왕이 되고 마는 비운의 사내, 의자왕!

 

자식과 사위의 죽음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이뤄진 나당연합군의 정복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다.

가족을 베고 황산벌에서 옥쇄한 5천 결사의 계백과 백마강으로 몸을 던진 낙화암의 3천 궁녀의 처절한 전설만 남긴 채 그는 역사로부터 퇴출되었다. 1만 2천의 백제인과 함께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바로 그 해에 병사해 망국의 제후들이 묻히는 망산에 원혼으로 묻힌 것은 역사 밖의 후일담일 뿐...

 

 

 

구드레나루 쪽에는 유람선 한 척이 한가로이 떠 있다. 역사야 어찌되었건 그 역사를 딛고 먹고 사는 인간의 삶은 계속된다.

 

 

 

 

 

낙화암에 한동안 머물며 생각에 잠기다가 발길을 돌린다. 이제 부소산의 정상에 올라 사자루를 구경하고 구드레나루로 가 볼까 한다. 

 

 

 

사자루 가기 위해 오르는 길에 연리지(連理枝)를 이룬 소나무를 만난다.

 

 

 

 

 

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의 가지와 맞붙어서 한 몸을 이룬 것을 연리지라 하는데, 이 소나무는 한 줄기가 다른 줄기와 가지로 연결되어 다시 한 몸이 되었다. 

 

연리지는 부부나 연인이 한 몸처럼 깊이 사랑하고 화목함을 상징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노래한 서사적인 장시 <장한가(長恨歌)>를 남기고 있는데, 이 시는 바로 '연리지'와 '비익조'의 비유로 끝맺음하고 있다.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으련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비익조(比翼鳥)는 암수가 각각 눈 하나에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지어야만 날 수 있는 상상의 새, 따라서 연리지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이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늘어선 성길이 아름다워 눈길 한번 건네고 사자루로 오른다.

 

 

 

 

 

해발 106m의 부소산, 작고 나지막하면서도 크고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니 걷는 내내 여러 상념에 잠기게 한다.

 

그러고 보면 부소산은 백제의 역사를 닮았다. 야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구비구비 돌아 오르노라면 어느 사이에 우뚝 능선에 오르고 산세는 표변하며 백마강으로 낭떠러지가 되어 떨어져 내린다.

 

 

 

낙화암 뒤쪽 제법 너른 언덕, 소나무들이 울을 두른 속에 사자루(泗泚樓)는 자리잡고 있다.

 

 

 

 

 

부소산의 정상인 이곳은 본디 송월대(送月臺)로 불려졌던 모양이다. 백마강 동쪽에서 두둥실 떠오르는 달이 서쪽으로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런가. 백마강의 달밤이 더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이 건물은 원래 임천 관아 정문을 1919년에 옮겨지어 개산루(皆山樓)라 부르다가 사자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일루가 그러했듯 부소산의 누각이 대개 조선시대의 관아 문루를 옮겨 놓은 셈이 된다. 역사 복원을 위해서라도 이 문루들은 원래의 자리로 옮기고 백제시대의 양식으로 복원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건물 정면에 고종의 5남으로 배일 정신이 투철했던 의친왕 이강이 쓴 <泗泚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얼핏 '사비루'로 읽기 쉬운데, 잘 보면 '사자루'이다. '비(沘)'가 아니라 '자(泚)'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사비'가 아니고 굳이 '사자'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부여의 옛이름이 '사비'와 함께 '사자'로, 백마강은 '사비수'와 더불어 '사자수'로도 불렸던 모양이다.(*'물 이름 사(泗)'라고 하는 이 글자는 오로지 부여를 뜻하는 '사비'에만 사용되고 있고, '泚'는 '강 이름자, 맑을 체'로 풀이되고 있다.)

 

백마강 쪽으로는 해강 김규진이 쓴 <백마장강(白馬長江)>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자루에 올라보면 사비수 백마강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툭 트인 전망이 과연 달을 맞이하여 서쪽으로 환송할 만하여 송월대란 옛 이름이 그럴 듯하다 생각된다. 

 

 

 

 

 

이 송월대 언덕의 터를 고를 때 보물 186호로 지정된 금동석가여래입상 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물론 백제시대 작품이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라는 시조로 기울어진 고려 왕조를 한탄했던 목은 이색, 그의 아버지인 이곡은 '부여 회고(夫餘懷古)'라는 율시를 남겼는데, 이 시로서 백마강과 낙화암에 서린 백제의 비극을 정리하기로 하자. 

 

백제 왕조 7백 년,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의 쓸쓸함을 이보다 잘 전하는 시가 없는 듯하다. 

 

靑丘孕秀應黃河     청구의 빼어난 기운 황하와 응하여
溫王生自東明家     온조왕이 동명의 집에 태어났네.
扶蘇山下徙立國     부소산 아래 옮겨와 나라를 세우니
奇祥異蹟何其多     기이하고 상서로운 자취 그 얼마나 많았는고.
衣冠濟濟文物盛     의관 갖춘 인물이 많고 문물이 융성해
潛圖伺隙幷新羅     기회를 엿보아 신라를 병합하려 했는데
在後孱孫不嗣德     잔약한 후손 그 덕을 잇지 못해
雕墻峻宇紛奢華     담장과 높은 건물 사치하고 화려하더니
一旦金城如解瓦     하루아침에 견고한 성이 기왓장처럼 무너지니
千尺翠岩名落花     천 길 푸른 바위 낙화암이라 불리는구나.
野人耕種公侯園     공후의 정원에는 농부가 밭 갈고
殘碑側畔埋銅駞     버려진 비석 곁에 구리 낙타가 묻혔네.*
我來訪古輒拭淚     내가 와서 옛 흔적 찾다 문득 눈물 뿌리니
古事盡入漁樵歌     옛 일은 어부와 초동의 노래에 들어있구나.
千年佳氣掃地盡     천 년 아름다운 기운은 땅을 쓸어버린 듯 사라지고
釣龍臺下江自波     조룡대 아래 강물결만 출렁이네.

 

* 진(晋)나라 장한(張韓)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낙양(洛陽) 궁문에 있는 구리쇠로 만든 낙타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장차 네가 가시덤불 속에 누워 있는 모양을 보리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