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7) 고란사 벽화에 담긴 이야기와 수수께끼

모산재 2011. 11. 22. 00:35

 

많은 사람들이 고란사를 찾는다.

 

부소산 북쪽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등지고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며 패망한 나라 백제와 낙화암에 몸을 던진 꽃 같은 삼천 궁녀의 비극을 떠올린다. 그리고 백제 왕들이 늘 마셨다는 고란 우물을 마시고 희귀하다는 고란초를 찾아 보며 고란사를 찾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 고란사 전경

 

 

 

 

여기서 끝나 버리면 아쉬울 거다.

 

조룡대가 보이는 선착장으로 내려가 황포돛대가 달린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 강바람을 맞으며 까마득한 낙화암을 올려다본다면 더욱 좋겠지.

 

 

법당 극락보전. 왼쪽으로 회고루, 오른쪽으로 영종루를 거느리고 있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집이다.

 

 

 

 

그런데 고란사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법당 뒷벽에 그려진 벽화다.

 

 

고란정 우물 맛을 보기 위해 법당과 영종루 사이를 지나면 법당 오른쪽 벽에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참된 나'를 찾는 것을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한 이 그림을 지나 법당 뒤로 돌아서면, 법당 벽에 익숙한 그림이 먼저 눈에 띌 것이다. 

 

 

궁궐이 불타는 가운데 당나라 군사들이 쫓아오고 낙화암 위로 몰려든 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 쓰고 피를 흘리며 몸을 던지는 끔찍한 장면... 

 

 

 

 

 

그렇다. 고란사 법당 뒷벽의 벽화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야기도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백제의 역사와 전설이 담겨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찬찬이 보고 있으면 그 스토리가 짐작이 되는 벽화가 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임금께 물을 떠다 바치는 궁녀의 모습.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의자왕(또는 백제의 왕)이 고란사의 약수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하도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 왕과 궁녀의 얼굴이 뭉개져 있어 안타깝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쉽게 알아보기 어려운 벽화가 둘 있다.

 

 

그 중에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아래 벽화이다.

 

 

 

 

 

세 여인이 배를 타고 고란사를 향해 다가서며 합장하고 있다. 한 여인은 무릎을 꿇고 앉았고, 두 여인은 선 채다. 고란사 나루터에는 두 여승이 합장하며 이들을 맞이하고 섰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가만히 다가서 보니 벽화 위쪽에는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적어 놓았으니 옮기면 대강 다음과 같다.

 

때는 서기 518년, 시마메· 도요메· 이시이라는 일본 소녀 셋이 불교를 알고 비구니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현해탄을 건너 유학의 길을 이곳 고란사로 택했다 한다.

 

 

 

 

 

불교를 배우러 왔다는 시마메· 도요메· 이시이라는 이 세 여인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여인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 검색하면서 홍윤기 교수의 글을 비롯하여 몇몇 자료들을 확인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여인들에 대한 기록은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와 <부상약기>에 기댄 것이었다. 이 세 여승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승으로 이 중 젠신노아마(善信尼)는 귀국한 후에 일본 불교 율학의 비조가 되었다.

 

 

<일본서기>와 <부상약기>에 따르면 세 여인은  백제로 유학을 떠나기 한 해 전(587년)에 일본 왕실의 최고 대신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개인 사찰 이시카와정사(石川精舍)에 초대된다. 세 사람 중에는 아스카의 왕실에서 불상을 만들던 백제계 고위직 기술 책임자 시바노 다치토(司馬達等)의 딸 시마(嶋)가 있었다. 시마는 젠신노아마(善信尼)라고 불렸으며, 나머지 두 소녀는 젠조노아마(禪藏尼)와 에젠노아마(惠善尼)로 불렸다.

 

소가노 우마코의 요청으로 세 여인은 위덕왕의 윤허를 받고 다시 건너온 사신 수신(首信) 등을 따라서 588년 모국 백제로 유학을 떠나 3년 후인 590년 3월에 귀국했다는 것이다. (위의 벽화와는 70년의 차이가 나는데, 벽화를 그리면서 오기한 것일가...?) 백제 유학을 마치고 돌아간 세 사람은 훗날 ‘스이코 여왕’으로 등극하는 가시키야히메 공주의 특별한 환대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저로 사용하는 사쿠라이노데라(櫻井寺)를 세 수행자의 처소로 내어주기도 했다.(일본 고대사의 태두라고 일컬어지는 우에다마사아키 교수는 이 세 수도승이 백제계 여성이며 스이코여왕도 백제 왕족이라 한다.)

 

일본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椎古, 재위 592∼628) 여왕은 용모가 단정했으며 매사에 어긋남 없는 야무진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등극하자마자 죽은 친오빠의 둘째 왕자를 태자로 책봉했는데, 그가 바로 여왕을 보필하며 아스카문화(飛鳥文化)의 황금시대를 열어간 쇼토쿠태자다.

 

 

↑스이코여왕

 

 

쇼토쿠태자는 백제에서 왜 왕실로 건너온 학승 혜총과 고구려 학승 혜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경을 공부해온 돈독한 불자였다. 그는 고모 스이코 여왕을 크게 보필하며 구다라 불교 문화 창달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백제는 불교문화가 대단히 융성하였는데, 특히 일본에의 전교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일본인들에게 불교를 처음으로 전래하여 준 이는 백제의 성왕이었다. 성왕 30년(552년) 달솔(達率) 노리사치계가 불상과 경론(經論) 등을 가지고 일본 왕 흠명(欽明)에 전함으로써 일본의 불교는 비롯되었다. 

 

 

 

고란사 벽화 중 마지막 하나는 바로 불교를 전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해진 불상과 경론을 일본의 군신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고, 다만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대신만이 이를 존숭하여 이시카와가(石川家)에 불전을 만들고 안치하였으나 불경과 불구들의 의미는 알지 못하였다.

 

그때 고구려의 승려 혜편에 의해 발견되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고 세 사람의 비구니가 출현하였으며, 소가노 우마코와 시바노다치토 등의 불교 신자가 생기게 되었다. 혜편은 584년에 소가노 우마코의 요청으로 시바다쓰의 딸인 선신(善信)과 선장(禪藏)· 혜선(慧善)을 가르쳐 출가시킴으로써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그가 일본 최초의 비구니를 탄생시킨 것이다.

 

 

     ※ 일본 불교와 고구려, 백제 승려의 역할  


일본 포교에 힘쓴 고구려 승려들로서는 혜편(惠便)·혜자(惠慈)·승륭(僧隆)·담징(曇徵)·혜관(慧灌)·도등(道登)·도현(道顯) 등이 있다. 혜자는 595년 고구려의 승려로서 일본에 귀화하여 불교를 크게 진흥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종과 더불어 호코사(法興寺)를 창건하였다. 이 절은 나중 고구려와 백제 승려들의 거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을 불교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성왕은 554년에 담혜(曇惠)·도심(道深) 등 16명의 승려들을 일본에 보내어 교화활동을 하게 하였다. 557년(위덕왕 4)에는 또다시 경론과 율사(律師)·선사(禪師)·비구니·주금랑(呪禁朗)·불공(佛工)·사장(寺匠) 등을 일본으로 보냈다.

당시 일본은 쇼토쿠태자가 불교를 크게 숭상하여 각처에 큰 가람을 세우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토목·와공(瓦工) 등의 많은 공인이 필요하였다. 이들 백제인들은 난바(難波)의 대별왕사(大別王寺)에 머물면서 불교 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588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사공(寺工)·화공(怜工)·와장(瓦匠) 등을 일본에 보냈으며, 일본에서는 선신니(善信尼) 등의 승려들이 백제로 건너와서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갔다. 이 때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승은 혜총(惠聰)·영근(令斤)·혜식(惠寔)·영조(聆照)·영위(令威)·혜숙(惠宿) 등이다. 이 백제의 승려들은 일본인 신도들에게 직접 수계의식을 집행하여 일본 승려의 탄생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들이 유학한 곳이 고란사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백제의 왕도인 사비를 찾았을 개연성은 충분하며, 3년간 머물며 이곳 고란사를 들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고란사에서 수학했을까에 대해선 근거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오로지 일본의 문헌에만 나타나는 이런 벽화가 그려지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최석영이 쓴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의 부여 고적에 대한 재해석과 관광명소화>(2003년)라는 논문은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910년대를 전후로 하여 조선사회엔 일본과 조선의 친연성을 밝히는 이른바 동화(同化) 담론이 생산되고 유포되기 시작한다. 두 나라 사이의 친연성을 강조하며 타율적인 역사로서 조선사를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식민지 모국인들이 식민지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권력과 통치방식에 대해 순종심을 내면화 할 수 있도록 ‘과거’가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식민지의 역사는 단순히 재해석 되는 것을 넘어 조작되기도 하고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실재하였던 ‘사실(史實)’로 회자된다.

동화 담론은 1930년대에 이르러 ‘내선일체(內鮮一體)’로 수렴되고 표상되었다. 다각도로 추진된 정책과 전략들의 최종 목적이 식민통치를 정당화 하고 합리화하는 데 있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일본인 니승(尼僧)의 최초 유학지 고란사설'이 1932년 12월 부여객사에 있던 박물관 '백제관(百濟館)' 관장으로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라는 사람이 부임해 오면서부터 항간에 유포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오사카 긴타로는 세 유학승이 백제에 와서 기거한 곳이 고란사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구체적인 추정의 근거는 알 수 없다. 고란사가 이전에는 여승들이 거주하는 사찰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 그러나 고란사에 대한 긴타로의 새로운 해석은 이 무렵부터 일본인 지식인층 사이에 폭넓게 ‘사실(史實)’로 수용된다.

그러다가 친일 소설가 김동인이 1941년 <매일신보>에 <백마강>이란 장편 역사소설을 연재하면서 고란사를 일본인 여성들이 유학 와서 수학한 곳으로 묘사함으로써, 급기야 고란사에 얽힌 이 가상의 역사는 대중 사이에 기정 사실로 굳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는 고란사를 양국의 선린관계를 상징하는 호재로 보고 건축물이 협소하고 훼손이 심하다는 이유로 개수하여 관광 명소의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란사 법당 뒷벽에 이 벽화가 그려지게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