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6) 부소산 등지고 백마강 굽어보는 고란사

모산재 2011. 11. 21. 23:01

 

궁녀사 뒤 산길을 얼마간 오르니 급경사를 이룬 능선에 이른다. 바로 아래로 유유히 굽이쳐 흐르는 백마강(금강 물줄기가 보인다.

 

 

 

  

 

여기서 바로 내려가면 고란사로 이르는데, 먼저 조룡대(釣龍臺)를 보고 싶어진다. 조룡대는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바위다. 안내도를 보니 고란사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듯하여 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 보기로 한다.

 

 

 

 

 

그 길에서 종종 기와 조각이 발견된다. 백제 기와인지 아니면 고려나 조선의 기와인지 가려 볼 줄 아는 안목이 없으니...

 

 

 

 

 

동쪽 능선 아래로 내려 갔으나 백마강으로 이어지는 길은 없다.

 

발길을 되돌려 처음 오른 위치에서 오솔길로 내려가니 고란사(皐蘭寺)가 모습을 나타낸다.

 

 

 

 

 

백제문화제 기간이어선지 좁은 고란사 경내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부소산을 등지고 가파른 언덕에 터 잡고 백마강을 바라보는 고란사는 북향이라 햇살이 잘 들지 않는다. 절벽으로 에워 싸인 좁은 공간은 숲이 우거져 있고 강바람이 스쳐 지나가니 한여름이라도 시원할 것 같다.

 

 

 

 

 

절 집은 길게 늘어서 있다.

 

중앙의 법당은 정면 일곱 칸이나 되는 긴 건물인데, 오른쪽 다섯 칸은 우물마루를 깔고 부처님을 모셨지만 왼쪽 두 칸은 요사로 쓰고 있다.

 

 

 

 

 

법당 왼쪽으로 요사로 쓰는 건물이 이어져 있는데, '진공묘유(眞空妙有)','회고루(懷古樓)'라고 쓴 현판 글씨가 눈길을 끈다. 

 

 

 

사라져 간 백제를 돌아보며 쓸쓸함에 젖어들게 하는 고란사이니 '회고루(懷古樓)'라는 이름의 의미는 절로 다가오는데, '진공묘유(眞空妙有)'는 무얼까. '진실로 비어 있음에 묘함이 있다'로 풀이 되는 것이니, 반야심경의 '공즉시색(空卽是色)'과 통하는 것일 게다. 

 

 

 

이 글씨는 18세의 아이 신동호(申東浩)가 썼다고 적혀 있는데, 힘차고 묘한 필치가 은근 매력이 있다.

 

 

 

 

 

워낙 마당이 좁으니 법당 건물을 한눈에 바라보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일주문이나 천왕문 정도에 달아야 할 절 이름조차 법당에 달아 놓았다. '고란사(皐蘭寺)'라는 현판 글씨는 해강 김규진 선생의 솜씨다.(김규진 선생의 글씨는 가야산 해인사 현판과,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 현판에서도 볼 수 있고, 창덕궁 희정당 내벽의 금강산 벽화 두 편도 이 분의 작품이다.)

 

 

 

 

 

백마강으로 열린 전망이 뛰어나고 경치가 아름다우니 정자를 들이기에 알맞은데, 이곳에는 절집이 들어서기 전에는 정자가 있었다고도 하고 백제 왕실의 내불당이 있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고란사라는 이름은 절집 뒤 벼랑에 고란초가 자생한 데서 유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창건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백제 아신왕(?~405) 때 혜인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성왕 때의 '혜인법사'라고 추정하는 이도 있다. 또 낙화암에서 떨어져 내린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 현종 때 지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의 법당은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한 것이라 한다. 건물 중앙에 '극락보전'  현판이 걸려있다.

 

 

 

 

 

나무아미타불~, 법당에는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극락보전이라 중앙의 주불은 극락을 지키는 아미타불을 모셨고 왼쪽에는 세지보살, 오른쪽에는 백의관음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고란사에서 꼭 주목해 볼 거리 중의 하나는 벽화이다.

 

법당 오른쪽 벽에는 인간 본성을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고, 법당 뒤 바깥벽에는 이 절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법당 뒤의 바깥 벽에는 낙화암에서 몸을 던지는 궁녀들의 모습 등 네 개의 벽화가 있는데, 특히 주목해 볼 것은 다음 그림이다.

 

 

 

 

 

세 여인이 배를 타고 고란사를 향해 찾아오는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때는 서기 518년, 시마메· 도요메· 이시이라는 일본 소녀 셋이 불교를 알고 비구니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현해탄을 건너 유학의 길을 이곳 고란사로 택했다.

 

 

일본에서 불교를 배우기 위해서 세 여인이 유학을 왔다는 이 놀라운 이야기에  근거가 있는 것일까. 궁금하여 찾아보니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 (http://blog.daum.net/kheenn/15854962) 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법당의 오른쪽 강가 절벽 위에는 영종각(靈鐘閣)이라는 범종각이 있다. 삼천 궁녀의 넋을 달래 주는 범종이라던가...

 

 

 

 

 

'백마강'이라는 대중 가요 속의 고란사 종소리는 바로 이 범종 소리일 것이다.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 궁녀를.

 

 

 

법당 뒤 고란초가 자라는 절벽 아래에 샘물이 흐르는 고란정(皐蘭井)이란 우물이 있다.

 

예전에 없던 보호각을 씌워 놓으니 대낮인데도 우물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한데, 약수를 마시려는 인파가 밀려들어 발디딜 틈조차 없다.

 

 

 

 

 

한 잔 물을 마시면 삼 년이 젊어진다고 하였던가. 그것도 모르고 물을 너무 많이 마신 노인이 아기로 변해 우물가에서 울고 있었다는 전설에 백제 왕들이 궁녀로 하여금 고란초를 띄워 물을 떠오게 했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여 전해지고 있으니... 나도 접근해 한 바가지 마신다.

 

 

 

 

 

지금에야 고란초는 전국 곳곳에서 자생지가 확인되며 그리 귀한 존재가 아니지만, 예전에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풀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고란초도 겨우 명백만 잇고 있는 듯 바위 틈에 얼마되지 않는 개체수만 보이고 있다. (위쪽과 아래쪽의 짙은 녹색인 풀이 고란초다.) 

 

 

 

 

 

서쪽 절벽 끝에는 삼성각이 자리잡고 있다. 불교에 포섭되어 둥지를 튼 민간 신앙이다.

 

 

 

  

 

  

독성, 산신(환웅), 칠성을 모셨다.

 

 

 

 

 

되나오며 영종각 곁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니 유유히 흐르는 강의 상류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발 아래 선착장 앞에는 황포돛대를 단 유람선이 평화롭게 떠 있다.

 

 

 

 

 

선착장 쪽으로 내려서는데, 강가에 조룡대 바위가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용을 낚았다고 하여 조룡대(釣龍臺)라 부르는 바위. 소정방이 사비성을 공격할 때 교룡이 나타나 가로막자,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무왕의 화신인 교룡을 낚았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당나라에 멸망한 백제의 비극을 저 작은 바위에까지 전설로 새겨 두고자 했던 모양이다.

 

 

 

  

 

황포돛대를 단 유람선은 조룡대 앞을 돌아서 구드래 나루로 향한다.

 

 

 

 

 

유람선을 타고 구드래로 가는 것도 좋겠다 싶지만, 아직 낙화암과 사자루도 오르지 못한 터라 발길을 돌려 낙화암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