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4) 부소산성 아름다운 산책길, 영일루· 군창지· 움집터· 반월루

모산재 2011. 11. 20. 18:51

 

삼충사를 지나 부소산성을 오른다. 

 

울창한 숲속으로 나 있는 산책길은 완만하게 산허리를 돌고 도는데 시원스럽고 운치가 있다. 그리 높지도 않고 평탄하지도 않은 이런 멋진 산책길의 혜택을 받는 부여 사람들이 부럽다.

 

 

 

길 아래로 몽촌토성처럼 흙을 쌓아 올린 산성이 보인다. 산 봉우리를 띠처럼 두르는 이런 모양의 산성을 테뫼형 산성이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백제형의 산성이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해발 106m의 낮은산인데, 동쪽과 북쪽 두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다. 부소산 남쪽은 완만한데 부여읍내가 자리하고 있고 북쪽은 급경사와 절벽을 이루며 금강이 흐르고 있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어 부소산성에서 만나게 되는 유적지와 볼거리를 알리고 있다.

 

 

  

안내 팸플릿에는 답사 코스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부소산문(매표소) → 삼충사 → 영일루 → 군창지(또는 태자골 숲속길) → 반월루 → 궁녀사 → 사자루 → 낙화암(백화정) → 고란사 → (유람선) → 구드래공원

 

 

 

동쪽으로 걷던 길이 북쪽으로 구부러지며 능선으로 오르면 부소산의 동쪽 봉우리. 그곳에 높다란 누각 영일루(迎日樓)가 나타난다.

 

 

  

영일루는 이름 그대로 백제의 왕과 귀족들이 계룡산 연천봉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일과를 계획했던 곳이라고 한다. 

 

백제의 흔적이 지워진 자리에 들어선 현재의 건물은 1964년 5월 홍산관아의 문루를 옮겨 놓은 것이니 조선의 것이다. 문루이어선지 아래층 기둥이 높아 누각도 껑충하니 높게 보인다.

 

 

 

영일루 현판은 부여의 서예가 원곡 김기승(1909~2000) 선생이 썼다 한다. '영(迎)'과 '루(樓)' 자를 크게 쓰고 '일(日)' 자를 작게 썼는데, 마치 산봉우리 사이에 해가 떠 있는 듯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누각 안에 '寅賓出日(인빈출일)'이라는 글씨의 현판이 또 하나 걸려 있는데, 글씨체가 마치 중국 운남성의 나시족 동파문자를 보는 듯하다. 이 전서는 청양의 한학자 정향 조병호(1914~2005) 선생이 썼는데, '삼가 공경하면서 뜨는 해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서경의 요전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 <書經 堯典>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서경 요전>

 

 

 

영일루에서 산책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넓고 평평한 터가 나타나는데 거기에 군창지(軍倉址)가 있다.

 

 

 

일제시대인 1915년 이곳에서 불에 탄 쌀·보리·콩 등이 발견되어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도 불에 탄 곡식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660년 사비성 함락과 함께 멸망하던 비극적 역사를 일깨워 준다.

 

 

건물 터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는데 길이 약 70m, 넓이 약 7m 정도이다.

 

 

 

 

군창지 앞에는 이 창고의 이름을 만리창이라 하여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풀들도 생기를 잃어가는 군창지에 좀가지꽃 한 송이가 불꽃처럼 피고 있다.

 

 

 

 

군창지를 지나면 부소산성 광장이다. 산 정상 주변이 이렇게 넓어 산성은 공원의 기능을 멋지게 해내고 있다.

 

 

 

 

남서쪽 성길을 따라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길이다.

 

 

 

 

부소산성의 둘레는 2,200m 정도라고 한다.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띠를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이 결합되어 있다. 옛 이름으로는 '사비성(泗沘城)' 또는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 성왕이 천도한 전후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안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소산성 광장에는 '수혈건물지'라는 어려운 이름을 붙여 놓은 움집터가 있다. 그냥 '움집터'라고 하면 좀 좋을까... 글 배운 자들의 먹물근성이란...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움집터가 있다.

 

 

 

 

움집터엔 움집을 복원해 놓았다. 앞쪽은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지붕과 벽 이엉을 걷어 놓았고 뒤쪽은 완성된 지붕을 올려 놓았다. 

 

 

 

 

군창지와 나란히 자라잡은 이 움집터는 주변에 방호목책이라던가 토성이 둘러싸고 있는 점 등으로 군사시설 일부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무기류 등이 출토되지 않아 민가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움집터는 부소산성 내에서 모두 19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대개 방형이거나 방형에 가까우며, 노지의 형태는 한쪽 벽면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터널식 노지와 주거지 모서리 또는 중앙벽면 등에 부뚜막식 노지가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부소산성은 성 안에 군창지와 건물터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평상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부소산과 백마강의 경관을 즐기는 비원으로서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움집터에서 서족으로 이동하면 반월루(半月樓)라는 전망이 좋은 누각이 나타난다.

 

 

  

반월루부소산성의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이 만나는 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다. 1972년 지은 2층 누각으로 그 위에 오르면 부여 시내와 부여를 감싸며 흐르는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여 읍내

 

 

 

 구드래나루

 

 

 

 

반월루를 지나면 길은 오른쪽 골짜기로 내려서며 삼천 궁녀들의 한을 달래주는 궁녀사(宮女祠)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