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3)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신 부소산 삼충사

모산재 2011. 11. 18. 13:36

 

폐허처럼 쓸쓸한 부여 동헌을 돌아본 다음 백제의 옛 도읍지 사비성의 흔적을 찾아 부소산성으로 향한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와 보고서 30년의 세월이 더 지나 지금 두번째로 찾게 되는 감회가 새롭다. 내 맘 속에도 백제는 그리 살갑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지 싶다.

 

작년 늦가을 신라 고도 경주 남산을 찾으며 느꼈던 감동을 이곳 백제 고도 부여 부소산에서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매표소가 있는 부소산문으로 발길을 옮긴다.  

 

 

 

 

매표소에서 받은 부소산성 안내 팸플릿 표지

 

 

 

 

 

산문을 지나 숲속길을 조금만 걸으면 금방 아늑한 공간에 자리잡은 삼충사(三忠祠)가 나타난다. 백제의 운명이 다하던 순간에 목숨을 바친 의자왕의 세 충신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은 외문인 의열문(義烈門)과 내문인 충의문(忠義門)을 통하여 들어서도록 돼 있다. 세 충신에 대한 격을 갖추었다.

 

 

외문 의열문

 

 

↓ 내문 충의문 

 

 

 

외문과 내문 사이의 뜰이 넓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예의의 넓이로 느껴진다.

 

 

 

 

 

그리고 백제의 세 충신,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 울울한 숲을 배경으로 편안히 앉은 모습이 보인다.

 

 

 

 

 

너른 참배공간에는 이 흐려진 의자왕(재위 기간 641∼660)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으려 옥중에서 단식하다 죽은 좌평 성충, 귀양지에서 나당연합군을 막아낼 방도를 충간한 흥수, 5,000 결사대로 황산벌 전투에서 옥쇄한 계백의 영정이 나란히 걸려 있다.

 

 

1957년에 처음 사당을 지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81년에 다시 지었다.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제를 거행하며 이곳에서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한낮의 환한 햇살이 흘러들어 반사되는 빛에 영정의 모습이 잘 잡히지 않는다.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성충(成忠) : 656년 좌평으로 있을 때 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극간하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 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때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660년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수도 사비(泗沘)로 쳐들어오고, 당나라 군대도 기벌포를 지나 사비성으로 쳐들어와 백제는 멸망하였다. 왕은 그때서야 성충의 충언을 따르지 아니한 것을 후회하였다. (* 지금 mbc드라마에서는 의자왕의 계비 은고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사실왜곡이라는 논란이 있다.)

 

흥수(興首) :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있다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으로 귀양갔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왕이 의직(義直), 달솔 상영(常永) 등의 신하와 회의를 열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 흥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앞뒤로 서로 호응하는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넓은 들판에 진을 치고 싸우면 승패를 알 수가 없다. 당나라 군대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대왕께서는 굳게 성문을 닫아 지키고 있다가 적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사졸(士卒)들이 피로해질 때를 기다려 이를 치게 한다면, 반드시 적병을 깨뜨릴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가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들어줄 수 없다. 당병은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이 때에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새장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 고 하니, 왕이 그럴싸하게 여겼다. 이 때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나서 진격해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의자왕은 성충과 흥수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지경이 된 것을 후회하며 웅진성(공주)으로 피난하고, 둘째 아들 태(泰)가 자립하여 왕이 되어 저항했으나 사비성은 함락되었다. 이에 의자왕이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했다.

 

 

계백(階伯) : 벼슬이 달솔(:제2품)에 이르렀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하여나제동맹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고립에 빠진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다. 660년 7월 10일, 계백은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처자를 모두 죽이고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한다. 황산()벌에 이르러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부여의 부산서원()과 충곡서원()에 배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초상화(차례대로 성충, 흥수, 계백)

 

 

 

선생님이 인솔하고 온 한 떼의 초등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세 사람의 충신에 대해 설명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 설명을 들은 다음 너도나도 영정 앞으로 다가서더니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한다.

 

참 순박하고 신통한 녀석들이다. 아직도 시골 아이들은 가르치는 재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선생님이 부러워진다.

 

 

 

 

삼충사 옆 물이 빠진 연못에는 예븐 노랑어리연꽃이 꽃을 피우고 있다.

 

 

 

 

 

※ 부여 시가지 일원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