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2) 폐허처럼 쓸쓸한 부여객사와 부여동헌, 그리고 도강영당

모산재 2011. 11. 16. 16:18

 

 

신동엽 생가 부근 어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부소산성으로 가기로 한다.

 

가는 길에 성왕 동상이 서 있는 로터리를 지난다.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한 도읍지 부여를 있게 한 성왕을 부소산성 가까운 큰길에 모신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백제 제26대 왕(523~554 재위)으로 이곳 부여(당시 사비성)로 도읍지를 옮기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한 왕이다.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지만 신라의 배반으로 신라에 빼앗기고, 신라 정벌에 나섰다가 관산성(지금의 옥천) 싸움에서 전사를 당한 비운의 왕이기도 하다.  

 

 

 

 

 

 

부소산성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제57회 백제문화제'를 알리는 광고탑이 서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기대하지 않은 축제 기간에 부여를 찾은 것이다.

 

 

 

 

 

 

부소산성 입구, 언덕 위에는 독특한 형상의 옛 부여박물관 건물이 보인다. 1976년 수학여행을 왔을 때 지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던 건물이었지...

 

그 앞 잔디를 심어 놓은 너른 평지는 백제 사비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거기에 작은 연지 하나가 복원되어 있다.

 

 

 

 

 

아직도 백제왕궁터가 제대로 확인되지도 발굴되지 못한 채 작은 연못 하나만 복원되어 있을 뿐이니 패배자 백제의 역사가 안쓰럽기만 하다.

 

 

 

 

 

 

부여박물관 건물은 부여 객사 뒤에 자리잡고 있다.

 

부여박물관은 동남리 새 건물로 이전하였고, 이곳은 부여문화재연구소로 쓰이다가 현재는 부여군 고도 문화 사업소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이 지었는데, 왜색이 가득하다 하여 크게 비난을 받았다. 맞배지붕 한옥 기와집을 형상화하였다고 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덟팔(八)자 모양의 지붕선과 칼날처럼 서 있는 구조물에서 일본 신사를 떠올렸다. 어찌보면 사무라이들이 썼던 투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부여 객사

 

구 부여박물관 바로 아래에 부여 객사가 있다.  

 

 

 

 

 

지은 때를 1869년이라고도 1704년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는데 건물 상태로 봐서는 아무래도 전자가 맞는 듯하다. 

 

이 객사의 당호는 원래 '부풍관(扶風館)'이었는데, 일제시대에 '백제관'으로 바뀌어 달려 있었다고 한다. 한말 이후 객사는 학교, 박물관, 진열관 등으로 쓰였다고 한다.

 

'백제관'이란 이름은 1932년 12월, 부여박물관의 시초가 되는 '백제관(百濟館)' 관장으로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라는 일본인이 부임해 오면서부터 사용된 듯하다. 이 때부터 부여는 일제의 식민지 동화정책의 문화적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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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http://www.history21.org/zb41/zboard.php?id=databank&no=201>에서 인용

 

1898년 대한제국 초청으로 함경북도 회령보통학교 교감이 되었고 1915년 경주공립보통학교로 전근했다. 1930년 정년 퇴직한 뒤에는 경주고적보존회, 조선총독부고적조사회, 부여사적현창회 등지의 기관에서 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다. 그러니 총 39년 동안이나 식민지 조선에 체류한 것이다.

그 자신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1935년 신라제의 전신을 만들었고, 신라의 발상과※ 관련된 전설을 중심으로 신라 6성의 건국 현영을 축복했으니, 제전이 끝난 뒤에는 신라 선덕여왕을 추모하는 여성행렬, 신라 화랑의 행렬, 김유신 장군의 출신 행렬, 그 외 12지신상의 행렬 행사도 재현했다. 또 경주가 동학교주인 최제우의 출신지임을 주목해 동학교조 위령제도 기획했으나 전쟁 패전으로 무산됐다.

1932년 12월에는 백제관 관장이 되어 부여에 부임했으며 1935년 4월 경주로 떠나기까지 부여에 머물면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得爾辛城을 비정하는데 주력했다. 득이신성은 백제역사에서 일본이 백제를 원조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대백제와 일본과의 친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문화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부여고적보존회의 사무 인수인계뿐만 아니라 백제관 정리도 미루고 매일 성지를 찾아나선 끝에 靑馬산성 서쪽 입구 마을 이름이 篤亭이며 이전 이름이 得辛, 獨辛, 篤莘임에 착안해 득이신을 이 일대였던 것으로 보았다. 현재 이 마을은 독쟁이라 일컫고 있다. 이에 청마산성을 득이신성으로 확신하게 된다.

- 최석영, '일제하 在朝 일본인의 조선문화 조사 및 해석 - 한국문화 제자리 찾기를 위한 제언- 민속식 제90호, 2003.2

 

 

 

정당(正堂)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동서 익실(翼室)이 배치된 건물 구조는 여느 객사와 다름없다. 중앙에 한층 높게 세운 정당은 앞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고, 동서익실은 앞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세 칸짜리 익랑은 바깥쪽 두 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안쪽 칸은 방을 들여 놓았다.

 

 

 

 

 

 

<객사 안내판>

 

 

 

 

 

 

 

■ 부여 동헌

 

객사 오른편에는 동헌이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 정비되어 있지 않아 어수선한 가운데 앉아 있는 건물은 수령(부여현감)이 호령하는 동헌의 위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보았을 때 동헌이 아닌 다른 건물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그도 그럴 것이 대개의 동헌은 높은 기단 석축을 쌓아 건물을 올리고 대청 마루도 높이어서 위엄을 보이는데, 이 건물의 기단은 마당의 높이의 거의 비슷할 정도로 낮을 뿐만 아니라 대청마루도 여염집보다 낮아 보이지 않는가. 

 

 

 

 

 

 

동헌의 당호(堂號) '초연당(超然堂)'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제민헌(齊民軒)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팔작지붕에 민도리집으로 1869년에 지어졌다 한다.

 

 

 

 

 

둘러 보니 동헌에 딸린 건물이라고는 객사와 내아 건물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원래  관내에는 객사 22칸, 아사(衙舍) 5칸, 군기고(軍器庫) 10칸, 향청(鄕廳) 10칸, 작청(作廳) 14칸, 현사(縣舍) 4칸 등이 있었다고 한다.

 

 

 

 

■ 보수 공사중인 내동헌

 

동헌 동쪽으로는 잡초가 우거진 뜰 가운데 건물 한 채가 가림막을 설치하고 한창 보수중이다. 그 뒤쪽 언덕 위에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 처음에는 향교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위쪽에 있는 건물은 홍가신, 허목, 채제공을 모신 '도강영당(道江影堂)'이라는 사당이고, 보수중인 건물은 동헌에 딸린 내아(내동헌) 건물이다.

 

 

 

 

 

아마도 내동헌이 원형을 잃고 퇴락하여 다시 정비공사를 벌이게 된 모양이다.

 

부여 현감의 살림집 구조는 5칸짜리 팔작지붕집인데, 양쪽 끝 두 칸은 온돌방을 들였고 가운데 세 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주춧돌과 기단석 일부은 백제시대 건물의 주춧돌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많은 기단석은 정질을 한 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생뚱한 것들도 많이 보여 눈에 거슬린다.

 

 

 

 

 

삼문을 보면 문화재 관리가 너무도 허술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사방은 쑥대밭이 우거져 있고, 지붕도 잡초들이 덮고 있다. '백제의 고도'라는 의미가 너무 강조되어선지 조선시대의 건축물은 거의 폐허 수준으로 방치되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 도강영당(道江影堂)

 

보수 공사 중인 내아 건물 뒤 높은 언덕 위에는 세 칸짜리 사당, 도악영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으로 오르는 시멘트 계단은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지 얼마인지 완전히 잡초에 묻혀 있다.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는 상태...

 

 

 

 

 

 

 

이 사당은 조선 후기의 문인 홍가신·허목·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인 영당은 앞칸을 개방하여 참배공간으로 뒤칸은 세 분의 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당 주변은 잡초가 우거지고 참배 공간인 마루에도 먼지가 가득 쌓여 있고 향로와 촛대도 사람의 손길을 받아본 지 오래된 듯 먼지가 앉앗다. 

 

작년 10월 이곳에 봉안되어 있던 홍가신과 허목의 초상화가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되었다는 보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폐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원래 관아 건물이 있던 자리에 1971년 이 영당을 신축하여 세 분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바깥에서 본 삼문과 도강영당 창건 약사 비문 

 

 

 

 

 

부여 동헌과 객사, 그리고 도강영당 등 조선시대의 유적은 거의 방치되어 있었던 듯 쓸쓸하고 정적만 감돈다. 마치 백제의 역사가 이 땅에서 대접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듯이...

 

  

※ 도강영당에 모신 홍가신, 허목, 채제공에 대하여

홍가신(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화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중 일어났던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류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으로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이순신과는 사돈지간이다. 45세 때 수원부사로 재직하며 구휼정책을 펴 어진 관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허목(1595∼1682)은 조선 후기 남인의 사상적 종장으로 꼽힌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그림, 글씨,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퇴계이황의 학맥을 이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근기지역으로 옮겨 받아 근기학파를 열었고, 그 뒤를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이 잇게 됐다.

채제공(1720∼1799)은 성호 이익을 사숙한 오광운의 제자로 정조 탕평정책의 한 축인 남인의 영수로 화성 축성의 총리대신을 지냈다. 영조 때 사도세자의 신원과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초상화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퇴색하거나 손상되기 마련이라 이에 대비하여 원본과 똑같이 이모본을 만들어 후세에 전한다. 도강영당에서 소장하고 있던 초상화도 집안에서 조상의 모습을 후대에 온전히 전하기 위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무렵 이모한 것이라 한다.
     ▲ 미수 허목의 초상화

 

 

 

 

 

※ 부여 동헌과 객사 위치도 (다음 지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