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1) 민족시인 신동엽 시인의 생가를 찾아서

모산재 2011. 11. 15. 11:16

 

백제의 숨결을 느껴보겠다고, 깊어 가는 가을날 부여를 찾았다. 고속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먼저 신동엽 시인의 생가부터 찾아보기로 한다.

 

생가의 위치는 터미널에서 계백장군 동상이 서 있는 군청 앞 사거리 못 미쳐 오른쪽 골목이다. 동남리라는 동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 어디에도 생가 방향을 알리는 팻말이 없어 한참 헤매어야 했다. 찾아가고픈 사람들은 큰길에서 성모의원을 돌아 보훈회관을 끼고 쭉 들어가면 된다.

 

 

 

 

 

 

기대했던 생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잡한 시멘트 기와에 파란 페인트를 칠한 듯한 이 기와집이 설마 신동엽 시인의 생가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하였다.

 

 

 

 

 

생가 앞에 승용차들이 늘어선 채 가리고 있는 것도 눈에 거슬리는데... 대문에서부터 만나는 저 국적을 알 수 없는 푸른 지붕은 참 어색하기 짝이 없다.

 

 

 

 

 

새마을운동으로 단장된 70년대 풍의 집으로 복원된 생가.

 

원래 초가집이었다고 하는데... 시인이 살았던 삶의 흔적이 원형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복원했으면 좋았을 것을, 원래의 모습에서 너무 멀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페인트를 칠한 파란 기와지붕이 세수하지 않은 얼굴에 분칠한 것처럼 천박하고 생뚱스럽다. 시인이 이 집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유지 관리에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빨리 원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기를 희망해본다.

 

 

 

 

 

마당에도 잔디를 깔아 놓았다. 탐방객 입장에서야 다니기 편하고 흙먼지가 없어 좋기야 하겠지만, 시인의 가슴 가득한 질박한 농촌 정서와 맞닿은 흙마당을 가려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원형대로 복원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목조건물에서 한옥의 정갈한 기품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그나마 위안이 된다. 

 

 

 

 

 

방 안 서가에는 창비신서 등 70~80년대의 교양서들이 진열되어 있고, 선생의 사진과 천상병 시인이 쓴 시작품이 걸려 있다.

 

 

 

 

 

긴 액자로 걸린 천상병 시인의 시는 '곡 신동엽 (哭 申東曄)'. 신동엽을 떠나 보내며 쓴 시이다.

 

 

어느 구름 개인 날
어쩌다 하늘이
그 옆얼굴을 내어보일 때

그 맑은 눈
한 곬으로 쏠리는 곳
네 무덤 있거라.

잡초 무더기
저만치 가장자리에
꽃 그 외로움을 자랑하듯

신동엽! 꼭 너는 그런 사내였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그 잠깐만 두어두고
너는 갔다.

저쪽 저 영광의 나라로!

 

 

그리고 방문 위에는 부인 인병선이 쓰고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새긴 '생가(生家)'라는 글이 걸려 있다. 남편인 신동엽과의 만남을 현재진행형으로 기념하고 싶은 부인의 심정을 담은 글이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부엌은 무쇠솥이 걸려 있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부뚜막은 시멘트를 발라 만든 70년대 풍이지만...

 

 

 

 

 

 

 

한때는 이 집에 아흔이 넘은 시인의 부친이 기거하면서 자식인 시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일화를 들려주기도 해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생가가 복원된 것은 1985년, 2003년에 부여군에 기부되어 부여군이 관리하고 있다. 

 

 

 

생가 바로 뒤에는 신동엽문학관을 짓는 공사로 분주하다. 2009년에 착공하였다고 하는데, 완공되려면 아직 좀더 시간을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그가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창작과 비평>에 남긴 그의 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기로 하자.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썼으리라 짐작되는, 이 세상에서 맺고 떠나야 하는 찰나의 인연에 대한 그의 안타까운 마음에 동참하면서...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창작과 비평 1968년 여름호>

 

 

 

너에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 터
새순 돋듯

허구 많은 자연중
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

            -<창작과 비평 1970년 봄호>

 

 

 

 

※ 부여읍내 안내도 및 신동엽 생가 위치(다음 지도 활용)

 

 

 

 

 

 

 

 

※ 신동엽(1930~1969)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

 

신동엽은 일제 군국주의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기, 1930년 8월 18일 부여 동남리에서 농사꾼 부모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겐 전처 소생의 아들이 있었지만 죽고 후처인 그의 어머니가 낳은 독자였다. 부여초등학교 시절 신동엽은 내향적 성격으로 말 없이 곧잘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고, 6년간 내리 우등상을 탈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6학년 때 학교 대표로 '내지 성지 참배단'으로 뽑혀 보름간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그의 부친은 아들을 통한 신분 상승의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 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는 가난한 수재들이 선망하는 학교였다. 사범학교에서 신동엽은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문학, 종교, 사상서에 파묻혀 살며 민족의식에 눈떠 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을 맞이하고 1948년 남한 총선을 반대한 동맹 휴학에 가담하여 퇴학 처분을 받았다. 전하기로는 이 시기 우익과 좌익 학생들 모두에게 끌려가 린치를 당했다고 한다. 그의 소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이 '중립'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던 신동엽은 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3일 만에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민족주의가 좌절된 정치적 현실에 좌절감을 갖고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 이 때 부패한 군간부와 공무원들이 군수품을 횡령하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며 신동엽은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현실 참여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이듬해 2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귀향하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낙동강에서 날게를 잡아 먹는 바람에 간디스토마에 걸려 고생하다 결국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악화되어 요절하게 된다.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뒤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할 때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책방을 열었다.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을 만난다. 1953년 겨울 고서점에서 여고 3학년 단발머리 소녀는 철학계열 전문서적을 찾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는 모르지만 이런 책은 어떨까요?" 하는 소리에 돌아보다가, '크고 빛나는 눈'을 발견하고 신동엽 시인에게 운명처럼 빠져들었다고 한다. 인병선 씨는 "데이트를 시작한 지 3일 되던 날, 신동엽 시인이 아버지의 성함을 물어봤다. 내가 성함을 말하니까 갑자기 걸음을 멈추면서 깜짝 놀라더라. 자신이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고 그 분의 책도 다 읽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시 우리 아버지에 대해 주위 분들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상적 문제 때문에 나도 학교에서 굉장히 외롭고 왕따를 당하는 입장이었는데 신동엽 시인이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너무 감동받아 마음을 금방 준 것 같다."고 밝혔다.

신동엽의 아내이자 짚풀문화 연구가인 인병선은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사상가인 인정식의 딸이다. 1957년 인씨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중퇴를 감행하면서 가난한 시인과 결혼했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부인은 부여 읍내에 양장점을 열고, 신동엽은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 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하다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1960년 신동엽은 건강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훗날 4·19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나올 수 있었다.

1961년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안정된 직업을 얻게 되어 시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출간하고 1967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1964년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9년 4월 7일 신동엽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월용산 기슭에 안장되었으며 12월 14일 묘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1993년 11월 부여 능산리 고분의 건너편 산으로 묘소를 옮겼다.

1969년 신동엽이 세상을 뜬 후 인씨는 지금까지 혼자 자녀들을 키워내며 짚풀문화를 연구해 왔다. 출판사 등에 다니며 생활을 꾸려나가는 한편 신동엽 시인의 육필 원고를 모아 책을 냈다. 신 시인이 알려진 것은 온전히 인씨의 노력에 힘입은 결과다. 신동엽 시전집은 출판되자마자 곧바로 판매 금지되었다.

1970년 4월 18일 고향인 부여읍 동남리 백제교옆 백마강 기슭에 <산에 언덕에>라는 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시비 곁에는 87년 대선 무렵에 반공주의자들이 세운'반공애국지사 추모비'가 높다랗게 서서 민족화해를 염원하는 그의 시정신을 억누르고 있다고 한다.1982년 신동엽 창작기금이 조성되어 창작과비평사에서 해마다 신동엽 창작상을 수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