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지리산 주능선 (1) 세석평전, 촛대봉의 아침 풍경

모산재 2011. 11. 7. 20:53

 

지리산의 밤은 너무 적막하고 길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겨우 7시, 미처 예약하지 못해 임시 잠자리를 배정받고  났을 때도 8시가 못 되었다. 세석이건 벽소령이건 뱀사골이건 텐트 속에서 새벽까지 술 마시고 마음껏 노래부르며 놀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몇몇 사람들은 취사장에 모여 앉아서 술을 마시기도 하지만, 대개는 침상에 모포를 깔고 잠을 청하는 분위기다.

 

칼잠과 다름없는 잠이 깊이 들지 못한다. 사방에서 코를 골고 이까지 가는 소리가 들리고, 잠이 좀 드는가 싶으면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 땜에 또 깨어 버린다. 다시 잠이 좀 드는가 싶은데 아직도 깜깜한 새벽에 출발하는 사람들이 짐 챙기느라 소곤대고 부스럭거리고 달가닥거리고...

 

 

잠은 깊이 못 들어도 오래도록 누워 있다 보니 허리가 아프다. 결국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공기에 온 정신이 번쩍 든다. 불빛이 없는 고산 평원의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하다. 시간을 확인하니 네 시를 지날 무렵이다.

 

저 별들도 렌즈에 담아질까...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렌즈를 겨눈다. 뷰파인더 속에는 별이 보이지 않아 눈 대중으로 방향을 맞추어 셔터를 누른다. 다행히 겨울 별자리 삼태성(오리온자리)이 잡혔다.

 

 

 

화장실을 다녀온 뒤 다시 모포 속에 들어가 한기를 달래며 누워 있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엊저녁과 마찬가지로 라면에 햇반...

 

그리고 대강 설겆이를 끝내고 짐을 챙겨 나서니 벌써 7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촛대봉을 향해 오르다 돌아보니 어느새 환한 아침 햇살이 대피소 뒤 영신봉을 흠뻑 적시고 있다.

 

 

 

찬이슬을 맞은 과남풀이 얼마나 청초한지...

 

 

 

멀어지는 산장을 다시 한번 뒤돌아본다.

 

이 풍경을 몇 번이나 담았을까. 아침햇살에 명암이 선명히 드러나는 세석의 풍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리산 풍광의 하나다.

 

 

 

촛대봉 아래 습지를 지난다. 습지 보호를 위해 깔아 놓은 나무 보도엔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봄날에 왔으면 이 습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동의나물 노란 꽃들을 보았을 것이다.

 

 

 

서리 맞은 쑥부쟁이꽃, 얼굴이 시리도록 말갛다.

 

 

 

동쪽의 촛대봉에서는 눈부신 햇살이 마구 내리고 있다. 

 

처음에 햇살의 눈부심으로 몰랐는데, 촛대봉에 올라 내려다 본 평원은 흐드러지게 핀 가을 들꽃들로 만든 융단 같다. 산오이풀, 구절초, 개쑥부쟁이, 과남풀...

 

 

 

 

 

세석평전 한가득 겨울 여행을 떠나기 위한 가을 들꽃들의 한바탕 잔치판 같다.

 

 

 

20년 전 만하여도 이 너른 세석평전은 야영객들로 들끓어 운동장이나 다름없었는데, 짧은 시간에 이처럼 멋진 생태계가 회복된 것이 놀랍다.

 

6.25 전쟁 중 빨치산 토벌한다며 숲은 불타고, 70~80년대 등산 붐이 일기 시작하며 야영객들에 의해 풀밭은 마당으로 바뀌고, 철쭉제 인파로 밟히던 세석이 이젠 명실상부한 국립공원 제1호 고산 평원의 모습을 되찾은 듯하다.  

 

 

촛대봉에서 아침햇살을 듬뿍 받고 에너지를 충전한 다음 천왕봉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삼신봉-연하봉-제석봉-천왕봉의 우뚝한 능선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걷는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여기서부터 삼신봉, 연하봉에 이르는 길이 바로 지리십경의 하나인 연하선경을 이룬다.

 

연하선경(煙霞仙景)이란 안개와 노을 속 신선이 머무는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 계절 촛대봉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멋진 운해가 오늘은 보이지 않으니 아쉽기만하다.

 

2010년 6월 하순에 보았던 촛대봉 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