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제주 올레 6코스 (5) 서복공원, 서복 전시관

모산재 2011. 10. 6. 19:14

 

정방폭포 매표소를 지나면 중국에서나 볼 수 있는 석조 패방이 정면에 나타난다. 패방에는 '서복공원(徐福公園)'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제주도의 가장 빼어난 풍광인 정방폭포 위의 이 넓은 자리를 중국풍의 기념관으로 가득 채웠다는 게 낯설고 안타깝기만 하다. 어째서 4. 3양민 대학살의 바로 그 현장을 밀어낸 자리에 그 아픔을 기록한 역사 기념물 하나 없이 전설적인 인물을 위해서는 이렇게 거대한 공원을 헌정해야 했을까?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찾아왔다는 서불. 그의 이야기는 이곳 정방폭포와 매물도 거제 해금강 등 곳곳에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암벽 글씨로 남아 있다고 전하지만, 명확하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남해안을 거쳐 일본까지 들러 항해를 하였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몇 십 미터쯤 걸어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중국풍의 담장에 둘러싸인 정원이 나타난다.

 

 

 

정원을 들어서는 문.

 

동그란 문을 통해 정원의 모습을 담고 싶은데, 사람들이 줄을 이어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어느 낯선 부부의 기념 사진인 양 돼 버렸다.

 


 

정원 한가운데는 중국풍의 정자 하나 서 있고, 주변은 꽃을 심은 화단과 연못이 어우러져 있다.

 

연못에는 검정말이 그득하게 서식하고 있는데, 마치 싸락눈이 내리기도 한 듯, 하얀 수꽃이 점점이 떠 있다. 줄기를 건져 암꽃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정방폭포로 흐르는 개울 동홍천을 만난다.

 

동홍천은 서귀포시 동홍동에서 솟아오른 산짓물이 정모시공원을 지나 정방폭포까지 이어지는 하천이다. 이곳 그 어디쯤에 4.3 당시 양민들을 수용한 단추공장이 있었을 것이다. 하류 쪽을 바라보니 4.3 당시 굴비처럼 엮어서 폭포 아래로 떠밀려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심란해진다.

 

 

▼ 상류쪽 방향

 

▼ 하류, 정방폭포쪽

 

 


동홍천을 지나 해안 절벽 위의 넓은 터엔 서복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올레길은 서복기념관 앞마당 끝, 해안절벽 위로 지나간다.

 

 

 

서복전시관은 2003년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물론 서복에 대한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관광자원으로 조성된 것인데, 때마침 중국인들의 관광 붐이 일어 호황을 누리는 모습이다.

 

 

 

 

 

전시관은 서복 전시실과 서귀포시 역사관으로 나뉘어 있다. 

 

입구의 좌상은 서복의 모습인가...

 

 

 

서복 전시실로 들어서자마자 시안의 진시황 무덤에서 보았던 진시황의 청동마차와 병마용갱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어 좀 멋쩍은 느낌이 든다.

 

서복의 항로를 랴오뚱반도의 남쪽 해안을 따라 평안도-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로 이어지는 해안선으로 추정해 놓았다. 어떤 근거로 추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서복이 수천 명의 동남동녀와 함께 타고 왔다는 선박의 축소 모형  

 

 

 

서복의 석상은 전시관의 서쪽에 서 있다.

 

 

 

여기서 잠시 서복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는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사방으로 보냈으나 구해오지 못했다. 기원 전 219년, 제나라 출신의 서복이 나서서 상소를 올린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두 번에 걸친 서불의 여행이 시작된다. 시안을 떠난 그의 행적은 지금의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폭넓게 이어진다. 그의 여행에는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와 각각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했다고 한다. 불로초를 발견하지 못한 서복은 바다로 나아가 일본의 큐슈지방으로 추정되는 평원광택(平原廣澤)에 도달하여 그곳에 머물러 스스로 왕이 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에는 서불이 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고 나온다. 중국에서 이주(夷洲)는 대만을 가리키며,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학자들은 정방폭포의 서불과지(徐福過之)라는 글자를 근거로 단주(亶洲)를 제주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불의 상소문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이요, 영주산(瀛洲山)은 한라산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옛 문헌에도 서불이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 이인로의 <파한집>과 조선시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가 그것이다. 일본에서도 미야자키현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서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기념관 내부는 의례적인 내용들밖에 없다. 

 

그보다는 해안절벽 위, 마당 끝에서 주변 해안을 바라보는 것이 더 즐겁다. 꿈틀대는 적송과 흑송의 줄기 사이로 섶섬과 문섬, 해안절벽과 푸른 바다가 환하게 보인다.

 

 

 

 

 

 

 

바다 풍경을 즐기며 서쪽으로 이동하다보면 서복기념관을 벗어나게 된다.

 

 

 

서복기념관으로 오르는 서쪽 계단

 

 

 

섶섬은 물론 제지기오름도 보인다.

 

 

 

 

길은 해안선을 따라 식당들이 늘어선 서귀포 시내로 접어든다. 

 

오후 네 시가 되어가는 시간, 더 이상 배를 홀대하고 걸을 수 없다. 걷기도 지친다. 해물뚝배기 메뉴가 크게 내걸린 식당으로 들어서서 민생고를 해결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