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제주 올레 6코스 (4) 정방폭포의 절경, 그리고 4.3 대학살의 아픈 역사

모산재 2011. 10. 6. 14:13

 

정방폭포에서 서쪽으로 300여 m 쯤 걸어가자 정방폭포 입구 주차장이 나타난다. 입구 매표소 주변은 몰려든 사람들로 몹시 붐빈다.

 


영주 12경의 하나로 꼽히는 국가 명승이자  바다로 떨어지는 유일한 동양의 폭포라는 정방폭포, 장대하게 펼쳐지는 해안 절벽에 하얀 비단 두 폭이 드리워진 이 멋진 풍경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복(또는 서불)이 이 폭포의 암벽에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구절을 '새겼다고 전한다. 하지만 1993년 암벽 전문가들이 절벽을 타고 올라 조사하였지만 '서불과차'라는 새김글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다. (이와 같은 새김글에 대한 전설은 소매물와 거제도 해금강, 일본에도 전하고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어쨌거나 서귀포(西歸浦)라는 현재의 지명은 서불이 돌아간 곳이라 해서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방폭포의 서쪽 300m쯤 되는 곳에는 암벽 동굴이 있는데, 그곳에는 높이 280cm이나 되는 거대한 화강암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언제 누가 왜 조성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폭포의 아름다움이야 말할 나위가 없지만, 눈을 돌려 섶섬 쪽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또 하나의 비경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푸른 하늘빛을 그대로 담고 있는 선명한 쪽빛 바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그림처럼 떠 있는 섶섬, 숲을 이룬 둥근 갯바위와 부딛치는 하얀 물거품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 정방폭포와 4.3의 비극

 

절경에 취해 있다가도 문득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역사의 비극...

 

60여 년 전 저 까마득한 절벽에서는 군경 토벌대에 의해 남제주 최대의 학살극이 벌어졌다. 토벌대는 굴비처럼 엮은 양민들을 절벽 꼭대기에 세워 사격하고 장검을 찔러 폭포 아래로 떨어뜨렸다. 죽창과 총에 난자 당한 피살자의 시신에서 떨어지는 살점, 부서진 뼈마디는 바로 비폭 물줄기와 함께 폭포 속에 감돌면서 바다로 떨어졌다.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면 거북이들이 수면으로 떠올라 함께 춤을 추었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아름다운 정방폭포의 깊은 연못, 폭포수가 떨어지는 저 물웅덩이에는 수십 명의 시체가 쌓여 6.25 전쟁이 끝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방폭포에서의 학살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자료에 따르면 1948년에만 10. 24(음), 11. 22(음), 12. 1(음), 12. 14(음), 12. 24(음), 12. 28(음) 등 6차례의 학살이 확인되고 있다.

 

안덕면 동광리, 감산리, 상창리, 대정읍 영락리, 서귀포 도순리 등지의 주민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피해 일자도 각각이다. 86명이 한꺼번에 희생되었다고 하는 증언도 있으며 신흥2리 주민 40여명이 이곳으로 끌려와 희생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동광리 사람들도 1948년 12월 24일 정방폭포 근처에서 모조리 총살되었다.

 

1949년 1월 21일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4.3항쟁과 여순항쟁의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유시하였다. 바로 다음날(1월 22일) 토벌대는 안덕면 동광리·상창리 주민 등 80여 명을 서귀포 정방폭포 부근에서 집단 총살하였다.

 

특히 동광리는 4·3 당시 140여 호 중에서 205 명이나 학살되었다고 한다.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중산간 마을에 대한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은 전소됐고,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1948년 11월15일에 토벌대들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10여 명을 총살하고 10여 호의 집도 군인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집들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동광리 주민들은 마을 근처 큰넓궤라는 곳에 숨어지내다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자, 한밤 중에 눈이 무릎까지 차오른 산길을 걸어 영실부근의 볼레오름까지 올라가 피신했다. 토벌대는 피난민들의 남긴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 산을 에워싸며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하거나 총살했다. 붙잡힌 주민들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의 단추공장 건물에 수용되었다가, 모두 정방폭포 위에서 집단학살당했다고 한다.

 

토벌대는 우리들을 서귀포 정방폭포 입구 위쪽 지하실에 가뒀다. 거기 가서도 어른들을 한사람씩 불러다가 마구 때렸다. 나는 겁 먹고 우니까 시끄럽다고 하면서 개머리판으로 때려서 눈왼쪽이 병신이 되었다. 거기서 삼일간 갇힌 뒤, 삼일째 되던 날 아침 주먹밥 반쪽을 들고 아이들과 86명의 어른들을 정방폭포 옆에 세우고 죽이는 걸 보라고 하여 지켜 보았다. 보는 거리는 약 200m였다. 나는 똑똑히 봤다. 시체는 정방폭포에 많이 깔려 있었다. 나는 누나 손을 잡고 한없이 울었다.(동광리 김복남씨의 증언)

▲ 당시의 정방 폭포. 저 단추공장에 수용된 양민들은 폭포 위에 일렬로 세워져

총과 장검, 발길질에 의해 폭포 아래로 떨어뜨려져 학살당했다.

 

 

정방폭포에서 학살된 시신을 거둬 온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유족들이 시신이나마 찾으려고 수소문을 해서 찾아간 정방폭포 주변에는 이미 시신들의 살이 녹아 뼈가 엉겨서 누구의 시신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의 시신은 바다로 떠내려 갔다. 시신을 찾아 나섰지만 시신을 구분할 수 없어서 포기하고 대신에 헛묘를 만들었다.

4·3 희생자들 가운데 시신을 거두지 못한 사람은 4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바다에 돌을 매달아 수장된 사람들, 정뜨르비행장 등 제주 산야에 백골로 묻힌 사람들, 형무소에 갔다가 행방불명된 희생자들... 이들 시신을 찾지 못해, 혼이라도 불러 모시고자 만든 헛묘가 동광리 등 제주 곳곳에 역사의 아픈 흉터로 남아 있다.

 

이상 정방폭포와 4.3관련 정보는 <제주 4.3 진상규명.명예회복 추진 범국민위원회>와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동광리 헛묘> 등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