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구천동 계곡의 유일한 절, 덕유산 백련사

모산재 2011. 6. 25. 14:27

백련사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다섯 시에 가까워졌다.

 

 

 

백련사는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 아래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구천동 계곡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 900m나 되는 높은 곳이다. 구천동 골짜기에는 원래 열 넷이나 되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백련사 하나만 남아 있다.

 

백련사(白蓮寺)는 금산사의 말사. 그 기원과 역사가 확실하지 않은데, 신라 신문왕 때 백련 스님이 초암을 짓고 수도하던 중 그곳에서 흰 연꽃이 솟아 나와 이 절을 창건하였다는 이름에 얽힌 전설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1900년에 무주부사 이하섭이 중수한 절은 6·25전쟁으로 불타고 1961년에 대웅전을 건립하면서 현재의 절이 자리잡게 되었다 한다. 원래의 절터는 훨씬 아래 골짜기에 있었다고 한다.

 

 

백련사는 향적봉 아래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서 법당에 오르기까지는 3단의 돌층계를 올라야 한다. 층계를 오르며 차례대로 천왕문-우화루-대웅전으로 상승하는 구조이다.

 

천왕문은 1973년 일주문과 함께 지은 건물인데, 편액은 탄허 스님이 쓴 것이라고 한다.

 

 

 

 

 

천왕문 오르기 전 왼쪽에 부도 하나가 보이는데, 조선 중기의 승려로 사명당 유정 등과 함께 휴정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정관당 일선선사(1533∼1609)의 사리탑이다.

 

천왕문 안에는 증장천왕 지국천왕 다문천왕 광목천왕 네 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천왕문에서 또 한 층의 돌계단을 올라서면 2층 문루가 나타난다.

 

문루의 이름이 초서로 적혀 있어 처음에는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앞의 글자가 '깃 우(羽)'자로 보여 '우화루(羽化樓)'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우화'는 흔히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으로 쓰는 도교적인 말이다. 설마 불교 도량에서 도교적인 의미를 가진 전각 이름을 쓰게 되었을까 싶어 다시 살펴보다가 '깃 우'자로 보았던 글자가 '비 우'자라는 걸 문득 깨닫는다. 그제서야 절의 문루 이름으로 '우화루(雨化樓)'가 있었음(봉정사 영산암의 문루였던가)을 생각해낸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득도한 후 법화경을 처음 설법하셨을 때 꽃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여기서 바로 우화루(雨花樓)란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1978년에 지었으며 이 편액은 탄허 스님의 글씨라 한다.

 

우화루 왼편의 범종각은 1987년에 조성되었으며, 편액은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다.

 

 

 

우화루 앞마당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아름드리 돌배나무이다.

 

 

 

 

아마도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배꽃 피는 4월말에는 정말 부처님의 설법 같은 순백의 꽃비가 내릴 것 같다. 우화루에 잘 어울리는 돌배나무...

 

 

 

 

 

우화루의 아래층 중앙 통로를 지나면 대웅전이 올려다 보인다.

 

 

 

 

 

대웅전은 '위대한 영웅(大雄 :범어 '마하비라'의 의역)' 석가모니를 모신 전각이다.

 

 

 

 

1974년에 세운 건물 바깥 벽에는 심우도(십우도)가 그려져 있다. '대웅전'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라 하며, 건물 앞 기둥에 걸린 주련은 탄허스님이 쓴 것이라 한다.

 

 

 

 

 

 

건물 내부 불단에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주존으로 좌우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그 뒷벽에는 3폭의 아미타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마당의 오른쪽으로 원통전이 있다. 1977년에 건립되었는데 건물 외벽에는 부처님 전생의 설화를 담은 벽화들로 장엄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주존으로 화려한 보관을 쓴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1970년대 전남 강진에서 모셔온 것으로, 높이 82㎝의 중형 불상이다. 해수관음보살탱이 후불탱으로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 칠성탱을 비롯하여 독성탱ㆍ산신탱ㆍ석고산신상이 있다.

 

 

 

 

 

명부전은 대웅전을 사이에 두고 원통전과 마주보고 있는데 1986년에 세워졌다. 안에는 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ㆍ무독귀왕, 그리고 시왕들이 봉안되어 있다.

 

 

 

 

금동지장보살상 양쪽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열 명의 지하국(명부)의 왕들이 늘어서 있다. 경직될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인데, 유쾌한 웃음이 번지는 선운사 명부전과 대조된다.

 

 

 

 

 

바깥 벽에는 사후 세계의 심판을 표현한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향적봉으로 가는 등산로 위로 삼성각이 보인다.

 

단층을 하지 않은 백골집이라 수수하고 정갈한 멋이 있어 참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물이다.

 

 

 

 

 

삼성각 뒤편, 덕유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변에 불도들의 계율의식을 행하기 위한 계단(戒壇)이 있다고 하는데, 시간에 쫓기고 하여 생략한다.

 

 

우화루 쪽으로 내려다본 풍경

 

 

 

 

 

구천동 33경 중에서 32경인 백련사(마지막 33경은 덕유산이다)는 비경으로 꼽힐 만큼 고색창연한 절도, 규모가 큰 절도, 문화재가 많은 절도 아니다. 구천동 유일의 절이지만 평범한 느낌이 드는 절이다.

 

요사채도 둘러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무주 동헌을 옮겨 놓은 정면 9칸 측면 6칸의 문향헌(聞香軒)이나 큰스님이 거주하는 조실당, 옛 대웅전 건물이었다고 하는 선수당(善修堂)이 그것이다.

 

깊은 계곡이라 햇살은 사라지고 6km나 되는 계곡길을 나가야 하기에 바쁘게 절을 나선다.

 

 

백련사 일주문을 벗어나기 직전 부도밭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이곳에는 생육신 김시습의 사리탑으로 알려지고 있는 매월당 부도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바로 가운데 있는 제일 큰 부도가 매월당 사리탑이다.

 

 

 

 

 

탑신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석종형으로 둥근 대석 위에 올려 놓았다. 상륜부에 보륜(寶輪)을 조각하였고, 그 윗부분에다 유두형 보주를 조각하였다. 탑신의 윗면과 보주에는 화려한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매월당이란 호에 이끌려 당연히 김시습의 묘탑이라고 단정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도 지금껏 김시습의 묘탑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도 그렇게 설명해 놓았고 다른 많은 자료에도 김시습의 묘탑이라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탑신에는 '매월당설흔지탑(梅月堂雪欣之塔)'이라는 탑명이 있고 그 옆에 "건륭갑진삼월일생질임선행건립(乾隆甲震三月日甥姪任善行建立)"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건륭갑진'은 1784년, 생질 임선행이 매월당 설흔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김시습은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았던 15세기 인물인데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를 쓴 1784년 묘탑일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김시습의 행적을 찾아보던 중 그의 묘탑은 백련사가 아닌 곳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고, 9년의 방랑생활 끝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lt;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그리고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선 김시습은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죽었다.

 

 

그렇다면 그의 무덤도 무량사에 있지 않을까 하여 찾아보니 과연, 김시습의 부도탑은 무량사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매월당이란 호와 '설잠(雪岑)'과 '설흔(雪欣)'을 혼동한데서 생긴, 참으로 어이없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해프닝이었던 것!

 

 

결론적으로 이 부도는 설잠(雪岑) 김시습의 사리탑이 아니라 설흔(雪欣) 스님의 사리탑이다. 매월당 설흔은 영조 48년(1772)에 이곳에서 멀지 않은 적상산 안국사 극락전 후불탱화 조성에 참여하였고 정조 8년(1784) 이곳 백련사에서 입적한 스님이라고 한다.

 

 

※ 부여 무량사와 김시습 부도에 대한 글 => http://blog.daum.net/kheenn/15854971

 

 

부도밭에 자라고 있는 씀바귀와 죽대

 

 

 

 

 

 

탄허 스님의 필적이라는 '덕유산백련사(德裕山白蓮寺)'라는 일주문 편액의 날렵한 글씨를 돌아보곤 백련사를 이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