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병인박해, 1천 천주교인의 비극을 간직한 해미읍성

모산재 2011. 7. 9. 19:34

 

15년만에 찾은 해미읍성, 허허벌판이던 예전과는 달리 동헌과 객사 등 많은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다.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 하지만 폐성된 지 오래되어 성곽이 일부 허물어지고 성 안의 건물이 철거되어 그 자리에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 ·민가 등이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이 훼손되었으나, 1973년부터 민가 및 관공서가 철거되고 1974년 동문과 서문이 복원되면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북동쪽 낮은 구릉을 의지하여 넓은 평지를 에워싸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남문인 진남루는 홍예문, 동문과 서문은 사각문(四角門)인데 북문은 원래 없다. 수구문(水口門)이 서문 옆에 있고 치성(雉城)이 두 개이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병인년(1866년) 천주교도 천여 명이 처형된 비극적인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해미읍성 남문(진남문) 쪽 성벽

 

 

 

 

남문(진남문)

 

 

 

 

 

 

 

 

해미읍성은 거의 평지성이나 다름없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되었다.

 

 

 

 

 

농악단 행렬 

 

 

 

 

 

 

 

진남문 안 뜰에 전시된 화포(火砲)들. 조선시대의 주력 무기다.

 

 

 

 

신기전(神機箭) 화차. 1448년(세종 30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의 다연발 로켓 추진 화살이다.

 

 

 

 

천자총통(天字銃筒), '천지현황'의 이름을 딴 화포 중서 가장 위력이 큰 화포로 적의 진지와 군함을 부수는 데 사용하였다. 그 외 화포로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등이 있다.

 

 

 

 

불랑기(佛狼機).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에 의해 도입된 유럽식 화포. '불랑기'는 당시 유럽을 지배한 프랑크를 음차한 말인데 화포 이름으로 쓰였다.

 

 

 

 

 

 

천주교인의 한이 서려 있는, 해미읍성의 옥사(獄舍)

 

 

 

 

 

300년 된 회화나무 노거수

 

 

 

 

 

 

 

지역 주민들에 의해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는데, 이 나무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인들을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고 처형하였다.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 나희덕

 

해질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돋힌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 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 나오며
단 한 번만 회화나무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회화나무를 한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옥사(獄舍) 전경

 

 

 

 

 

 

 

 

 

해미읍성은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이 대량으로 처형 당한 순교성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도들의 박해는 병인양요 이후 1868년 대원군의 부친 남원군의 묘를 도굴한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후 더욱 심해진다.

 

천주교인들을 일일이 처형하기 힘들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한다. 덕산 주렛골에 살던 인연민(마르띠노)과 덕산 황모실에 살던 이보현(프란치스코)은 1799년 12월15일 매맞아 첫 순교자가 되었고 이후 덕산군 배나드리에 살던 신자 30여 명이 잡혀 와 옥에 갇히고 다수가 순교하게 된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가 10여 년 간 옥살이 끝에 1814년에 옥사하였으며, 부친 김제준과 김대건에 이르는 4대에 걸쳐 11명이 순교한다. 1866년 병인박해, 1868년 무진박해를 거치면서 자리개질, 생매장, 수장 등의 방법으로 처형 당하였다. 해미 진영 겸영장은 군사권을 쥐고 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이곳 해미읍성 1000여 명 이상을 처형하였다.

 

해미읍성으로 끌려온 천주교인들을 옥사 앞 회화나무에 철사줄로 매달고  포졸들이 활을 쏘거나 매질을 하는 등의 고문을 하였으며, 서문 밖 돌다리 위에서 생사람을 돌에 타작하는 자리개질로 쳐 죽이기도 하였다. 여숫골에서는 천주교인을 한꺼번에 처형하기 위해 생매장 시켰다. '여숫골'이란 지명은 생지옥 속에서 천주교인들이 '예수 마리아'를 외치는 기도 소리를 '여수 머리'로 잘못 들은 데서 생긴 이름이다. 생매장 터에는 죄인을 빠트려 죽인 '진둠벙'('죄인둠벙'이 바뀐 말)을 발굴하여 옛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60여 년이 지난 뒤 동문본당 주임인 바로 신부가 발굴 작업에 나섰는데, 당시 현장을 목격한 증인들이 참가하여 천주교인들이 앞다투어 뛰어들었던 그 구덩이를 정확히 짚어 냈다고 한다. 증인으로 참석한 이주필이란 노인은 열 살 되던 해 동리 아이들과 목격한 장면을 고스란히 기억해 내고 생생하게 증언하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실제로 증인들이 가리킨 곳을 파보니 수많은 유해와 고상, 목주 등 성물이 수습되었다. 특히 유해가 하나같이 서 있는 형상이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처형이 늦으면 혹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포졸들이 밀어 넣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구덩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숨진 천주교인들은 하나같이 그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대부분 평범한 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해미진영의 영장은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교적 신분이 있는 사람들은 홍주(지금의 홍성)나 공주등 상급 고을로 이송시켰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평민이었고 그들은 아무런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처형되었기에 이름조차 기록으로 남겨질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순교자 가운데 기록에 남은 숫자가 500여 명, 그와 맞먹는 숫자가 이름 없는 순교자로 파악하는데 그 상당수가 이곳에서 순교한 사람으로 짐작된다.전체  3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름이 드러난 사람은 70여 명에 불과하다. 

 

 

 

말단 관리 서리의 집

 

 

 

상인의 집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 외곽 돌담터가 발견되었다

 

 

 

복원된 동헌

 

 

 

 

 

 

 

 

 

 

복원된 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