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동해의 절경, 촛대바위와 형제바위

모산재 2011. 5. 19. 21:30

 

동해시와 삼척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일출의 명소 촛대바위, 예전에는 삼척 추암바위라고 불렀지만 지금의 주소는 동해시 북평에 속합니다.

 


출렁이는 동해 바다와 기암절벽, 그리고 깨끗한 백사장에 작은 어촌 마을이 어울려 최고의 절경 추암해변을 만들었습니다. 기이한 암석으로 되어 있어 마을 이름이 추암(湫岩)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해암정을 지나 촛대바위로 가는 해안 구릉으로 오르는 길로 접어듭니다. 입구에 이식이 썼다는 '능파대'라는 시를 만납니다.

 


 

 


시에 대해서는 좀 있다 알아 보기로 하고, 잠깐 능파대부터 구경하기로 합니다.

 

언덕으로 오르며 뒤돌아보면 해암정 뒤편으로 석림(石林) 같은 멋진 해안 절경이 펼쳐집니다.

 


 

 


세조 때(1462년) 왕명으로 이 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파견되어 있던 한명회는 이 바위군이 만들어 내는 절경을 '능파대(凌波臺)'라 불렀다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삼척군 동쪽으로 십 리쯤 가면 한 곳에 경치 좋은 곳이 있는데, 혹은 불끈 솟아 오르고 혹은 구렁이 나고 절벽을 이룬 것이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위는 매우 넓어 수십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고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 서 흡사 사람이 눕기도 하고 비스듬이 서 있기도 하는 것 같고 또는 호랑이가 꿇어 앉은 것 같기도 하고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이 천태만상을 이루었으며, 소나무가 우거져서 그 사이로 비치니 참으로 조물주의 작품이라 하겠다. 강릉 경포대와 통천 총석정과는 그 경치가 난형난제이며 기이한 점은 이 곳이 더 좋다 하겠다. 속되게 '추암' 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이제나마 자태에 대하여 부끄럼이 없게 '능파대' 라고 그 이름을 고치노라. -한명회, '능파대기(凌波臺記)'에서

 

'능파(凌波)'란 물결 위를 가볍게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소설 <구운몽>에서 양소유가 만난 여덟번째 선녀가 바로 동해 용왕의 딸인 '백능파'이었지요. '능파'는 미인의 이름으로 통용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희대의 모사꾼 한명회도 이 아름다운 바위 절경과 밀려오는 동해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 함께 '능파(凌波)'라는 이름을 순간적으로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능파대를 보았으니, 이제 다시 앞에서 보았던 이식의 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千仞稜層鏤積氷  천길 절벽은 얼음을 쌓은듯

雲斤雷斧想登登   하늘나라 도끼로 만들었던가

散蹄欲駐奔淵騏   부딛히는 물결은 광류처럼 쏟아지니

警看浴海鵬   해붕이 목욕하는듯한 이광경 말로는 못하겠네 (騫그르치다. 부리 주, 쪼을 탁)

                順浪高吟思謝傅   잔잔한 물결은 사부*의 시문 같고

觀濤奇筆憶林乘   거센 파도에서 임승의 시를 연상케 한다

蓬山此去無多路   여기서 봉래산까지 길 멀지 않으나*

却恐凌波到不能   물결 두려움 물리치고 가기 어렵구나. 

 

*謝傅(사부) : 南朝의 謝安을 가리킨다. 동진(東晉)의 사안(謝安)이 손작(孫綽) 등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는데, 마침 폭풍이 불어 물결이 크게 일어나자 일행 모두가 안절부절 못했으나 오직 사안만은 노래를 높이 부르며 태연자약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도량이 넓고 침착함을 가리킨다.

 

*蓬山此去無多路 :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812~858)의 '무제(無題)'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相見時難別亦難    어렵게 만난 우리 헤어지기도 어려운데

東風無力百花殘    봄바람 힘 잃으니 온갖 꽃들 시드네.

春蠶到死絲方盡    봄누에는 죽어야 실 토하기 멈추고

蠟炬成灰淚始幹    밀초는 재 되어야 촛물이 마른다네.

曉鏡但愁雲鬢改    님은 새벽에 거울 보면 귀밑털 세는 걸 근심하겠고

夜吟應覺月光寒    나는 밤늦도록 시 읊으니 달빛 차게 느껴지네.

蓬山此去無多路    여기서 봉래산까지 길 멀지 않으니

靑鳥殷勤爲探看    파랑새야 부디 날 위해 소식 전해 주렴.

 

“春蠶到死絲方盡 蠟炬成灰淚始幹”은 희대의 명구로서 죽을 때까지 사랑이 변치 않을 것임을 비유하고 있다.

 


이 시를 쓴 택당 이식은 이른바 '상월계택(象月谿澤)'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정구, 상촌 신흠, 장유와 더불어 한문학의 4대가라 불리는 분입니다.

 

능파대는 간성에도 있는데, 이식의 이 시는 간성의 능파대를 읊은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간성의 능파대에 대해  <간성읍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위 언덕이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바다 속까지 들어갔는데 마치 창끝이 늘어선 것처럼 멀리서 보면 참으로 기이하다. 층층이 몰려오는 파도가 부딪쳐서 흩어지는데, 그 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면 석상의 기괴한 모습에 눈이 부시다. 마치 큰 곰과 우마가 뒤섞여 사방으로 달리는 듯하다.

  



능파대를 지나 추암 언덕으로 올라서니 짙푸른 동해가 일망무제로 펼쳐지고, 일출 명소 촛대바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득한 수평선을 배경으로 추암의 상징 촛대바위를 비롯한 해안절벽의 기암괴석들이 수직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 촛대바위에 전설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 추암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소실(첩)을 얻은 뒤 본처와 소실 간의 투기가 심해지자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두 여자를 데려가고 남자만 남겨 놓았다. 홀로 남은 어부는 두 여인을 그리며 그 바닷가 그 자리에 하염없이 서 있다가 망부석처럼 바위가 되었으니 그 바위가 지금의 촛대바위라고 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남성들에게는 일부일처제를, 여성들에게는 현모양처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고 써 놓았는데, 참으로 가부장적 가치관이 잘 반영된 전설인 듯합니다. 

 

 

 

 

촛대바위는 원래 두 개로, 그 중 하나가 숙종 7년(1681년) 5월 11일에 일어난 지진으로 10자 가량 부러져 나갔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지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원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뢰같고 담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갔다. 양양에서는 바닷물이 끓는듯 요동쳤고 설악산 신흥사와 조계암의 바위들이 무너졌다. 삼척부 동쪽 능파대 수중의 10여 장(丈) 되는 돌기둥이 부러지고 두타산 층암이 무너졌다.

 


그리고 남쪽으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형제바위가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잠시 전망대에 올라 바다를 조망합니다. 그런데 이곳이 남한산성의 정동방이라고 하네요~.

 




여기서 남쪽으로 돌아나가면 바로 추암해수욕장입니다.